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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운용 규제 왜곡 현상
보험사가 자금운용을 잘 못 해 보험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보험 가입자 전체에게 돌아간다. 이 때문에 정부와 감독당국은 보험사들이 고객 돈을 안전하게 운용하고 있는지 각종 규제장치를 둬 감독한다. 현행 보험업법에서는 보험사가 다른 회사의 주식이나 채권을 보유할 경우 그 보유금액이 보험사 총자산 또는 자기자본의 일정 비율을 초과하지 않도록 한도를 정해놓고 있다. 보험사가 특정 주식에 ‘몰빵’했다 그 회사가 잘못될 경우 그 피해가 보험 가입자 전체에게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함이다. 일종의 분산투자를 통해 위험 도미노 현상을 피하려는 사전적 예방조치다.문제는 이 같은 자산운용 한도를 정해놓은 보험업법에 허점이 있다는 것이다. 자산운용 규제에서 자기자본의 몇 %, 총자산의 몇 %라고 한도를 정해놓았지만, 자산평가 기준을 서로 다르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보험업 감독규정은 총자산과 자기자본의 경우 ‘시가’를, 주식이나 채권 소유금액의 경우 ‘취득원가’를 각각 기준으로 평가하도록 정해놓고 있다.
그런데 시가와 취득원가를 혼용토록 허용하면서 불합리한 일이 발생했다. 주식이나 채권가격이 상승하거나 하락할 때 시가 대 시가, 취득원가 대 취득원가로 규제하는 경우와 비교해 왜곡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보험업법 개정안에 대한 국회 검토보고서에서는 규제 왜곡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보험사 자산이 주식, 채권, 부동산, 기타 4개로 구성돼 있고 주식과 채권의 자산운용비율 한도가 50%라고 가정해보자. 이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주식+채권+부동산+기타=총자산’이 분모, ‘주식+채권’이 분자가 된다. 모든 값이 1로 같다면, (1+1+1+1)÷(1+1)이 된다. 즉 자산운용비율은 1분의 2로 50%이다. 그런데 다른 자산은 가격이 1로 같은 상황에서 주식가격만 2로 상승했다고 치자. 이때 총자산인 분모는 2+1+1+1=5, 분자는 2+1=3이 된다. 즉 주식가격이 1에서 2로 2배 상승하면 자산운용비율은 60%가 돼 자산운용비율 50%를 초과하게 된다. 이때 현행 보험업법은 한도 초과분 10%를 매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분자에 취득원가를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분모인 총자산은 주식의 시가를 적용하므로 2+1+1+1=5가 되지만, 분자는 취득원가를 적용받아 1+1=2가 된다. 즉 주식가격이 2배로 뛰었음에도 자산운용비율은 5분의 2, 즉 40%로 낮아지는 결과가 나온다. 일정 비율 이상 특정 주식에 투자하지 못하게 한 규제가 시가와 취득원가의 이중 잣대 적용으로 오히려 왜곡현상을 만드는 것이다.
삼성생명 특혜법?
서울 삼성 서초사옥. [동아DB]
시가와 취득원가의 이중 적용으로 자산운용 규제에서 벗어나 혜택을 누리는 국내 보험사는 삼성생명이 유일하다. 은행과 상호저축은행, 금융투자업 등 다른 금융사는 주식이나 채권의 소유금액에 대해 모두 ‘시가’를 기준으로 자산운용비율을 적용받고 있다.
19대 국회 때 시가와 취득원가 이중 적용의 예외를 인정하는 보험업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관련법을 대표 발의한 이는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었다. 국회 상임위원회 논의 과정에서 보험업법 개정에 적극적이던 인사는 국회 정무위원회(정무위) 야당 간사였던 당시 김기식 의원이었다. 2015년 11월 25일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원회 제4차 회의에서 김 전 의원은 이렇게 지적했다.
“다른 모든 (금융사 자산운용) 규제를 다 시가로 하면서 보험사 주식만 취득가액으로 하는 이유는 오로지 삼성 때문인 거지요. 삼성생명이 갖고 있는 삼성전자 주식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거지요. (중략) 한 국가가 법을 운용하면서 특정기업의 지배구조에서도, 그것도 아주 특수한 하나의 케이스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시가로 하면서 이것만 취득가액으로 하는 이런 특혜적 조치를 언제까지 유지해야 되느냐, (중략) 삼성전자를 위한, 더 (엄밀히) 얘기하면 삼성전자라는 기업도 아닌 거지요. 이재용 씨 개인을 위한 이 특혜입법을 언제까지 우리가 유지하고 있을 거냐. 국회가 이제는 입법적 결단을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지난해 6월 말 기준으로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은 1062만여 주로 삼성전자 전체 지분의 8.13%를 차지한다. 취득원가는 5690억 원이지만 시가는 25조2504억 원에 이른다(주당 249만 원 기준). 만약 보험업법이 개정돼 총자산과 자산가격을 시가로 적용하면 삼성생명은 총자산의 3%를 초과하는 17조 원 가까운 삼성전자 지분을 매각해야 하는 것이다.
20대 국회 들어 보험사의 자산가치를 시가로 평가하게 하는 두 건의 법안이 제출돼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19대 국회 때 임기만료로 폐기됐던 법안을 다시 제출한 이종걸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과 더불어민주당 김영주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 등이 그것이다.
두 건의 보험업법 개정안
4월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 정의당 의원들이 본회의가 무산되자 퇴장하고 있다. 이날 본회의는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불참 통보로 무산됐다. [뉴스1]
현행법은 보험사의 자산가격 변동으로 자산운용비율 규제를 위반한 경우 1년 유예기간을 두고 그 비율에 적합하게 매각하도록 하고 있다. 만약 삼성생명이 보험업법 개정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대량 매도하게 되면 국내 주식시장에 대혼란을 끼칠 가능성이 높아 이를 순차적으로 해소할 수 있도록 유예기간을 두려 했던 것이다. 그만큼 시장에 끼칠 충격을 완화하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종걸 의원실 관계자는 “보험업법 개정안 제출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고 다른 금융업권 기준에 맞추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며 “19대 국회 때 법안 발의 이후 논의 과정에서 개별 기업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초과 보유 주식 처분 유예기간을 7년으로 늘리면 법안 심사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편 김영주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의 경우 3% 초과 보유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게 했다. 즉 초과 보유에 따른 실익이 없도록 하겠다는 입법 취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서조항을 달았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 제11조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는 것.
공정거래법 제11조 2항은 ‘보험자산의 효율적인 운용·관리를 위해 보험업법 등에 의한 승인 등을 얻어 주식을 취득 또는 소유하는 경우’에는 의결권 행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김 의원이 발의한 법안의 단서조항에 따르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주식을 3% 초과해 보유하더라도 ‘보험업법 등에 의한 승인 등’을 거칠 경우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국회 정무위 소속 의원실 한 관계자는 “김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의 경우 개정법안 본문 내용만 놓고 보면 3% 초과 보유 주식의 의결권을 제한한 것 같지만, 단서조항에 따라 우회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보험업법 개정으로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을 시가로 반영하면 총자산의 3%를 초과하는 17조 원 규모의 삼성전자 주식이 시장에 매물로 나오게 된다. 이때 마땅한 매수자를 찾지 못할 경우 삼성전자 주가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상황에 대비한 법안도 현재 국회에 제출돼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대표 발의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그것이다. 보험업법 개정으로 삼성생명이 보유한 총자산의 3%를 초과하는 17조 원 규모의 삼성전자 주식을 매각해야 할 경우 이를 삼성전자가 자사주로 매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삼성전자 주식이 시장에 대량 매물로 나와 삼성전자 주주들이 피해를 입을 우려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게 박 의원 측 설명이다.
국회의 보험업법 개정 움직임에 대해 삼성생명 측은 “해당 규정은 장기간에 걸쳐 자산을 운용하는 보험산업의 특수성을 감안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당초 취지를 살리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만약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매각해 평가차익을 실현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보험사는 고객이 낸 보험금을 운용해 자산을 불린 것이기 때문에 보험 계약자와 주주 등에게 매각 차익을 배분하게 된다. 특히 유배당 보험에 가입한 이들에게는 ‘특별 이익’ 형태로 배당한다.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매입한 자금의 원천이 유배당 보험 가입자가 낸 보험금이라는 점에서다. 지난해 7월 말 기준으로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모두 매각했다면 5조 원 가까운 금액이 유배당 보험 가입자 몫으로 돌아갈 것으로 금융감독원은 분석했다. 지난해 3월 기준으로 삼성생명이 판매한 유배당 보험상품 가입자는 210만6115명. 이들에게 5조 원이 배당된다면 가입자 인당 230만 원 이상 지급될 수 있다. 주주 몫으로는 무배당 보험계약에 따른 수익 15조7000억 원 등을 합해 21조 원이 배당금으로 돌아가게 된다.
장하성, 김상조, 그리고 김기식
3월 22일 해외 출장길에 오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캐나다 토론토 아키라 백 레스토랑에서 셰프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왼쪽). 김기식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4월 2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본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동아DB]
삼성생명 측은 “(삼성생명이) 보유 중인 삼성전자 주식을 전량 매각한다는 전제하에 보험 가입자와 주주에게 배당을 실시한다는 것은 보험업계 현실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며 “자금을 안정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보험업 특성상 유망한 회사의 지분을 한꺼번에 매각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20대 총선에 불출마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던 김기식 전 의원이 최근 금융감독원장에 취임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장하성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에 이어 김 원장까지 참여연대 출신 3인방이 본격적인 재벌개혁 진용을 갖춘 것이다. 이 때문에 19대 의원 시절 재벌 순환출자 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을 따지며 보험업법 개정을 주장했던 김 전 의원이 금융감독원장으로 일하면서 과거 생각을 그대로 정책에 반영할지 주목된다.
그가 금융감독원장으로서 실제 정책 집행에 나설 경우 삼성그룹 지배구조에 큰 변화가 올 수 있다는 점에서다. 국회에 계류 중인 보험업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않더라도, 금융위원회가 보험업 감독규정을 바꾸면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의 자산가치를 시가로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 한 관계자는 “19대 의원 시절 정무위 간사로서 보험업법 개정에 의욕을 보였던 김 원장이 보험업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기다리지 않고 금융위원회를 설득해 보험업 감독규정을 바꾸려 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현재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정점으로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SDS,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중공업 등을 간접지배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러나 보험업법 개정으로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대거 매각하게 되면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 지배력은 약화될 개연성이 크다.
재계 한 인사는 “국민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삼성 지배구조가 아니라 이건희 회장의 뒤를 이어 삼성그룹을 이끌어갈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능력”이라며 “삼성은 최근 현대차그룹이나 다른 그룹처럼 지배구조 문제를 빨리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