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3일 열리는 KB금융지주 주주총회에서 가장 관심을 끌 사안은 ‘근로자 추천 이사제’일 것으로 예측된다. [뉴시스]
지난해 금융행정혁신위원회가 금융위원회에 근로자이사제 도입을 권고하면서 최근 금융지주회사들을 중심으로 관련 내용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국내 금융지주사 가운데 근로자 추천 이사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곳은 KB금융지주다. KB금융노동조합과 우리사주조합은 2월 7일 KB금융 지분 0.18%의 주주권 행사를 통해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를 사외이사로 추천했다.
권순원 교수는 미국 코넬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노사관계 등을 주로 연구해왔으며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 서울지방노동위원회 공익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권 교수는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의 맏사위이기도 하다. 앞서 KB금융노조는 지난해 11월에도 하승수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추천한 바 있지만 주주총회(주총)에서 과반 찬성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최근 KB금융 사측도 사외이사 추천 후보군을 발표했다. 2월 23일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사추위)를 열어 선우석호, 최명희, 정구환 등 3인을 임기 2년의 신임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하는 안건을 결의했다. 기존 사외이사인 유석렬, 박재하, 한종수 등 3인은 임기 1년의 중임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할 방침이다.
선우석호 후보는 현재 서울대 경영대 객원교수로 활동 중이고, 최명희 후보는 한국내부통제평가원 부원장을 맡고 있다. 정구환 후보는 법무법인 남부제일의 대표 변호사로 인천지방검찰청 부천지청장 출신이다. KB금융 측은 “사추위는 지난해 12월 후임 인선을 위한 작업에 착수해 주주와 서치펌(헤드헌터) 등으로부터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받아 후보군을 확정했으며 외부 인선자문위원 평가와 사추위원 투표, 자격 검증의 엄격한 절차를 거쳐 최종 후보자를 확정했다”고 밝혔다.
노조 추천 이사 지난해엔 부결
KB금융노조가 사회이사로 추천한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 [뉴시스]
사추위 추천 후보와 노조 추천 후보가 모두 이사로 선임될 경우 KB금융지주 사외이사는 기존 9명에서 10명으로 늘어난다. 후보 7명에 아직 임기가 남은 스튜어트 솔로몬 이사와 사내이사 2명(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 허인 KB국민은행장)을 합친 수다.
KB금융 정관에 따르면 전체 이사 수는 30인 이하로 정해져 있다. 사외이사는 5명 이상으로 전체 이사 수의 과반을 차지할 수 있다. 현재 이사회는 사내이사 2명과 사외이사 7명으로 구성돼 있어 권 교수가 이사회에 입성해도 정관상 문제가 없다. 사외이사 선임 안건은 의결권 주식 수 4분의 1(25%) 이상 참석하고, 참석 주주의 과반 이 찬성해야 통과된다. 주주들은 각 의안마다 찬반 여부를 표시한다.
노조를 비롯해 금융권 관계자들은 권 교수의 안건 통과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기존 사외이사인 이병남 이사가 사임을 표하면서 인력개발(HR) 분야 전문가가 필요한 상황인 데다, 권 교수의 전문성이 KB금융의 취약점으로 꼽히는 노사관계와 기업 지배구조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지난 KB금융 주총에서도 단일 최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이 하승수 변호사의 사외이사 추천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고, 금융권 안팎으로 근로자 추천 이사제 등에 대한 논의가 무르익은 만큼 이번 선임 건은 큰 무리 없이 통과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핑크빛 전망만 내놓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윤종규 회장이 지난해 주총에서 “노조 제안을 통한 사외이사 선임이 과연 어떻게 기업 가치를 증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득이 필요하다”며 부정적 견해를 비친 데다 외국인 주주들의 반대도 예상되기 때문이다. 최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이 다시 찬성표를 던진다 해도 전체 지분율의 9.62%밖에 되지 않는다.
지분 70% 외국인주주 선택이 관건
반면 지분 대부분은 외국인 주주들(69.95%)이 쥐고 있다. KB금융에 투자한 외국인 주주들은 주로 중동이나 싱가포르의 국부펀드 등 재무적 투자자 성향에 가깝기 때문에 KB금융의 경영 참여보다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투자하고 있어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기구인 ISS의 권고를 따르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KB금융의 근로자 추천 이사제 도입은 3월 중순 발표할 예정인 ISS의 권고안이 성패를 가를 것으로 전망된다.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임시주총 때도 ISS가 노조 추천 사외이사 의안에 대해반대권고를 하니 반대(기권·무효 포함)가 82.22%로 나왔다. 결국 외국인 주주는 자문기구 권고를 거의 따라간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주주들이 근로자 추천 이사제에 부정적인 이유는 경영권 침해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이사회의 의사결정이 빠르게 진행돼야 하는 사안에도 불필요한 노사 갈등이 야기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우려한다. 이러한 이유로 금융기관들이 민간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당하면 기업 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근로자 추천 이사제를 둘러싼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만큼 이번 KB금융의 주총 결과가 향후 금융권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로서는 신한은행과 우리은행 노조가 근로자 추천 이사제 도입을 계획 중이다. 다만 신한은행은 아직 적절한 후보를 결정하지 못해 사외이사 추천은 다음 주총으로 연기한다는 방침이다. 우리은행 역시 정부 지분 매각과 지주사 전환을 한 뒤 근로자 추천 이사제 도입을 추진할 계획이다.
반면 KEB하나은행과 NH농협은행 노조는 당장 근로자 추천 이사제를 추진하지 않을 방침이다. 하나은행노조는 김정태 회장 3연임 반대에 주력한다는 계획이고, 농협은행은 내부적으로 농협법을 개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 만큼 시기적으로 근로자 추천 이사제 도입은 어렵다는 판단이다.
한편 근로자 추천 이사제 도입의 필요성은 최근 금융권에서 불거진 채용비리, ‘셀프 연임’ 등 금융사의 지배구조 문제 등을 통해 더욱 부각됐다. 금융당국이 금융지주사 최고경영자 선임 절차와 경영승계 과정을 문제 삼으면서 대대적으로 점검에 나선 것이 근로자 추천 이사제 도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박홍배 KB금융노조위원장은 “자격과 역량이 있는 사외이사를 선임해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기존 사외이사 한 자리만으로 이사회 결정을 막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밀실 인사 같은 경영권 전횡을 감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사 갈등도 줄어들 수 있다. 또한 아무리 노조가 추천해 이사가 된다 해도 이사회 소속으로 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지 무조건 노조의 이익만을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