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6

2005.10.18

사각 그릇에 담긴 알갱이들

  • 현혜연/ 사진비평가 hyhy119@hanmail.net

    입력2005-10-17 09: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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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각 그릇에 담긴 알갱이들

    방명주, ‘부뚜막꽃’ 연작.

    집을 떠나 한동안 혼자 살게 되는 날이 있다. 독립이라는 즐거움과 부딪칠 것 없는 호젓함은 좋지만 생활의 모두를 스스로 해야 하는 어려움은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먹는 일이다. 게다가 참으로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밥이다. ‘엄마의 밥!’ 쌀도 알맞게 불리고 물도 열심히 맞추건만, 공 들여도 공 들여도 엄마의 밥맛은 도통 낼 수가 없다. 허기가 질 때마다 집으로 달려가 엄마가 해주신 따스하고 쫀득쫀득한 밥을 몇 그릇이고 비우고 나면 비로소 숨 쉴 힘이 생기고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밥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다. 뽀얀 살을 찌우고, 더불어 마음도 푸근히 찌운다. 바람 든 무처럼 처졌다가도 뜨끈한 엄마의 밥 한 그릇이면 몸에 온기가 오르고 생기가 돈다. 그래서 밥은 그저 우리가 생을 지속하기 위해 먹어야만 하는 사물이 아니라, 생의 에너지가 담긴 삶 그 자체인가 보다.

    밥! 그 밥을 새롭게 볼 수 있는 행복한 전시가 열린다. 10월12일부터 인사동의 문화 장터 쌈지길 갤러리(02-736-0088)에서 열리는 방명주의 사진전 ‘부뚜막꽃(Rice in Blossom)’이다. 24일까지 계속되는 이 사진전은 부뚜막에서 환하게 피어나는 꽃, 바로 ‘밥!’의 사진이다. 농부의 쌀이 아닌 엄마의 밥,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몸에 생기를 불어넣듯, 마른 쌀에 물을 올려 촉촉하고 말랑하게 지어낸 살아 있는 밥이다.

    무심코 지나친 밥에 대한 새로운 시각

    사진가 방명주는 한 솥 가득 지은 밥을 밝은 조명 위에 잘 헤쳐놓아 밥의 시각적 재미와 아름다움을 끌어내었다. 커다란 밥공기 속에 한 덩어리로 모인 묵직한 밥이 아닌 밥알 하나하나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의 사진은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밥의 또 다른 모습이다. 물을 밥 양보다 많이 부어 끓인 죽은 부드러운 질감의 사진이 되고, 적게 부은 고슬고슬한 밥은 한 알 한 알의 모양이 살아 있는 사진이 된다.



    요즘엔 흑미며 수수며 보리며, 밥의 질감도 색감도 다양해졌다. 그 다양한 밥들은 그녀가 장치한 밝은 빛 위에서, 그리고 잘 뽑아낸 사진 속에서 자신의 생명력을 드러낸다.

    그에 더하여 가로 1.3m, 세로 1.1m라는 대형의 사진과 5×3.3m의 설치작업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시각적 세계를 만나게 해준다. 한 알의 밥이 수박만큼 확대된 사진 앞에 서는 관객들은 이제껏 너무나 익숙했던 밥의 미지세계를 엿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녀 자신이 날마다 가족을 위해 밥을 짓는 주부인 사진가 방명주는 그동안 2003년의 개인전 ‘트릭’, 2004년 ‘마리오네트’를 통해 여성적 일상과 그 일상에서 잘 보이지는 않으나 우리 삶을 조직하는 숨겨진 힘들을 보여준 작가다. 특히 늘 보던 일상을 거스르는 시각적 방식으로 사물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곤 했다.

    이번 사진전은 여성적 일상으로부터 말 걸기를 시작하려는 그녀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밥의 역사만큼이나 한솥밥 속에 담긴 숱한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을 생각해보자고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커다란 사진 앞에서 우리는 밥과 그에 얽힌 관계와 가족과 여성, 혹은 어머니와 우리의 삶의 에너지까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진가 방명주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 걸음이다.

    뜨거운 밥이 그리워지는 이 가을, 투박한 부뚜막에서 환하게 피어나는 부뚜막꽃과 만나보는 즐거움은 결코 작지 않다.



    문화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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