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궁전’ 지상에 내려와 있었네

두 강이 만나는 곳에 장엄하게 솟구쳐…눈부신 경관만큼 문화 자부심 높아

  • 정찬주 소설가 ibuljae@naver.com

    입력2014-01-06 11: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하늘궁전’ 지상에 내려와 있었네

    하늘궁전을 본떠 건립한 푸나카종.

    부탄 푸나카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가 도추라(Dochu La·3116m)다. 일행은 잠시 도추라에서 휴식을 취한다. ‘라(La)’는 고개라는 뜻인데, 산악국가인 부탄은 우리나라 백두산보다 높은 해발 수천m 라가 많은 나라다.

    미세한 빗방울이 부유하는 비구름 속으로 초르텐(탑) 108개가 보인다. 인도 아삼과 접한 남부 부탄 지역 사람 가운데 일부가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인도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아삼 지역에서 세력을 키우던 반군이 종종 남부 부탄을 공격했다. 결국 부탄 4대 국왕은 군인을 이끌고 남부 부탄으로 갔다. 그 결과 소수의 사상자만 내고 서로 평화적으로 협상해 분쟁을 종식했고, 2005년 초르텐 108개를 건립했다. 이곳 초르텐은 피아간(彼我間) 사상자의 위령탑도 된다고 하니, 전범 유골을 봉안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제국주의 환상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도추라에서 내려가는 산길 옆쪽 계곡에도 초르텐 같은 건축물이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초르텐이 아니다. 그 안에는 마니차(경전 문구를 새긴 둥근 통)가 있고, 호스로 유입되는 계곡물이 마니차를 24시간 내내 돌린다. 옆에는 진흙으로 만든 작은 고깔 모양 카차(Kacha)가 무수히 놓여 있다. 진흙 반죽에 죽은 사람의 뼛가루를 섞어 만든 초미니 스투파다. 이승에서 하던 마니차 수행이 다음 생으로도 이어지는 셈이다. 이 역시도 부탄 사람들이 고단한 이승의 삶을 자족하는 지혜다. 다음 생이 있으므로 이승의 삶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부탄 사람들이 이승에서 허송세월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승에서 쌓은 수행과 선업에 따라 다음 생에 주어지는 복덕이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단한 이승의 삶 자족하는 지혜

    인구 2만 명의 전원도시 푸나카에 입성하기 전 나와 일행은 치미라캉(Chimi Lhakhang) 사원을 들러본다. 이 사원을 참배하는 이유는 부탄 사람에게 가장 친숙한 고승인 드룩파 쿤리(Drukpa Kuenley)가 이곳에서 주석(승려가 입산해 안주)했기 때문이다.



    티베트 출신 수행자 드룩파 쿤리는 ‘미친 성자’라고도 불렸다. 여느 고승과 달리 그는 어깨에 활과 ‘불타는 벼락’이라는 큰 남근상을 멘 채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다. 사람들이 그에게 축복을 상징하는 흰 천의 카타를 목에 걸어주면 그는 그것을 남근상에 묶고 다산(多産)을 기도해줬다고 한다. 그는 고승의 권위를 버리고 중생에게 먼저 다가가 ‘불타는 벼락’으로 요괴를 제압하고 다산과 풍요를 기원해줬는데, 그래서 지금까지 이곳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듯하다.

    부탄 사람들이 낮은 생활수준에도 우리와 달리 행복지수가 높은 까닭은 마음의 스승을 모시며 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드룩파 쿤리, 파드마삼바바, 샤브드룽 나왕 남겔, 역대 국왕 등이 그들의 스승이다. 마음으로 의지하며 따르고 싶은 스승이 없다는 것은 정신적 궁핍 내지는 불행이라는 자각이 든다.

    치미라캉 사원 초입에 있는 마을 농가 벽에는 로켓처럼 드룩파 쿤리의 남근상이 크고 씩씩하게 그려져 있고, 상점들은 외지인에게 드룩파 쿤리의 남근상을 만들어 판다. 논두렁에 잠복한 말똥을 피해 치미라캉 사원에 이르자 동자승 몇 명이 사원 뜰에서 경을 외거나 장난을 치고 있다. 일행 중에는 치미라캉 사원에서 기도하면 아이를 낳게 된다는 설명을 듣고 법당에 들어가 승려로부터 축복을 받고 나왔다. 어떤 지인은 앞으로 태어날 손주의 이름을 승려에게 받아와 자랑한다. 그러나 부탄 이름이라 별칭으로만 사용할 것 같다.

    치미라캉 사원에서 숙소까지는 승용차로 30분 정도 거리. 아직 석양 무렵이다. 일행 중 누군가가 숙소 바로 위쪽에 자리한 비구니 사원을 발견하고는 저녁예불을 하고 내려오자고 제의한다. 비구니가 95명, 비구가 20명 정도 수행하는 왕비 원찰이다. 사원은 도추라에서 내려온 산등성이가 푸나카에서 힘차게 멈춘 산언덕에 자리 잡았다. 산바람에 룽가와 타루초가 펄럭인다. 일행은 저녁예불을 하고 법당을 지키는 비구니에게 봉투를 내민다. 보시를 받는 비구니 얼굴이 석양 노을처럼 붉어진다.

    벌써 며칠 밤을 부탄에서 보내고 있다. 규모와 상관없이 부탄 숙소 어디에나 생화가 없다. 숙소 현관 화병에 꽂아놓은 것도 모두 조화다. 20대 아가씨 사리카(Sarika) 씨에게 물어보니 부탄 사람은 꽃도 살아 있는 생명이기에 꺾지 않는단다. 살생하지 말라는 불법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부탄 사람의 마음이 꽃보다 더 향기롭다. 차를 따라주는 사리카 씨에게 또 물어본다.

    “손님을 맞는 이 일이 힘들지 않나요?”

    “매일 많은 손님과 함께해서 행복해요. 제 일에 아주 만족해요.”

    승합차 기사와 가이드 친리 씨, 농사짓는 농부에게도 질문해봤지만 모두 한결같은 대답이다. 어떤 선입견을 갖고 그들에게 직업만족도를 물은 나 자신이 어리석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매달 받는 봉투 두께보다 일 자체를 더 즐기는 것이다.

    ‘하늘궁전’ 지상에 내려와 있었네

    분쟁 종식을 기념하는 도추라의 108개 초르텐.

    선진국의 부유함도 초라해져

    ‘하늘궁전’ 지상에 내려와 있었네

    푸나카에 있는 왕비 원찰인 비구니 사원(위). 치미라캉 사원 가는 길에 있는 드룩파 쿤리의 남근상.

    그다음 날 우리 일행은 마치 부탄 사람이라도 된 듯 서두르지 않고 기상한 후 산책하고 현관 로비에서 차도 마신다. 오늘 일정은 부탄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푸나카종 방문이다. 푸나카종은 부탄을 알리는 책표지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종이다. 이는 1637년 샤브드룽이 지시해 건립했다는 것이 정설이고, 1955년 팀푸로 천도하기 전까지 300여 년간 부탄 왕궁이었다고 한다.

    푸나카종의 건립에도 전설이 깃들어 있다. 그 하나는 파드마삼바바가 이곳에 도착해 “샤브드룽이 코끼리 형상의 언덕에 머물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샤브드룽이 한 건축가에게 설계를 지시했는데 그 건축가 꿈에 파드마삼바바가 사는 ‘하늘궁전’이 나타나 그 모습을 재현했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푸나카종의 정식 명칭은 풍탕 데첸 포드랑이다. ‘위대한 행복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두 강이 만나는 위치에 푸나카종이 보인다. 설산에서 발원한 유속이 느린 노추(Nochu·여자의 강)와 빠르게 흐르는 포추(Phochu·남자의 강)가 만나 푸나창추(Punachangchu)를 이루는데, 그 너머에 하늘궁전이 솟구쳐 있다. 나는 물론, 일행 모두가 푸나카종이 마치 금족의 공간인 양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구루린포체라고도 부르는 파드마삼바바가 사는 하늘궁전이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다리를 건너 푸나카종에 다다른다. 지금도 법왕은 겨울 3개월 동안 팀푸종을 떠나 푸나카종에서 머무는데, 이때 승려 400명이 동행하며 팀푸 주민 30~40%가 국왕과 함께 배웅한다고 한다. 이곳의 공간 배치는 정문에서 볼 때 첫째 공간은 행정관리, 두 번째 공간은 승려가 머물며, 일반인 출입을 엄금하는 세 번째 공간은 샤브드룽의 가부좌상이 있는 건물이다.

    샤브드룽은 1651년 사망했는데 이후 50년간 사망 소식을 알리지 않고 비밀에 붙였다. 아마도 티베트의 침략을 우려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역사 때문인지 부탄에는 샤브드룽의 후신이라는 가짜 지도자가 많이 등장했다.

    푸나카종이 있는 한 부탄 사람의 자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결코 식지 않을 것 같다. 눈부신 푸나카종 앞에서는 선진국의 몇만 달러 개인소득도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 든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