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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마오쩌둥 시대로 회귀” 문혁 반성 대신 ‘미화’

[조경란의 21세기 중국] 문화대혁명은 기억의 戰場… 동기 선하다고 책임 피할 순 없어

  •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中, 마오쩌둥 시대로 회귀” 문혁 반성 대신 ‘미화’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 국가주석을 우상화한 그림. ‘마오 주석은 우리 마음속 붉은 태양’이라고 적혀 있다. [동아DB]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 국가주석을 우상화한 그림. ‘마오 주석은 우리 마음속 붉은 태양’이라고 적혀 있다. [동아DB]

미국에서 중국 문화대혁명(문혁) 전문가로 유명한 로더릭 맥파커(Roderick Mac Farquhar)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중국은 매우 빠르게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과거’란 마오쩌둥 시대를 말한다. 마오 시대의 상징적 사건이 바로 문혁이다. 문혁의 최종 책임자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그 자체다. 중국에서 피해자 대다수가 문혁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요인 탓에 문혁의 정확한 실태 파악은 어렵다. 지금도 문혁은 ‘기억의 전장(戰場)’이자 ‘끝나지 않은 과거’다.

1966년 시작된 문혁은 1976년 가을 마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마오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하려면 인민의 의식을 ‘프롤레타리아화’하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믿었다. 대중이 문화적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을 근대 경제발전의 산물이 아닌 조건으로 본 것이다. 문혁은 전 사회 프롤레타리아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 수립에 선행한다는 전통 마르크스주의와는 크게 다른 시각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개조’하는 것이 마오주의(마오이즘)의 관건이었다.

마오쩌둥에게 계급은 ‘도덕’

마오는 계급을 사회적 범주가 아닌 도덕적 범주로 봤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마오가 주도한 대약진운동이 실패하자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적 세력이 부상했다. 이들을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적 요소를 주장하는 세력)로 인식한 마오는 체제가 위기에 빠졌다며 경계했다. 자신이 농민을 앞세워 도시를 포위함으로써 이룩한 중국식 사회주의가 도시 엘리트의 반격으로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결국 그는 일반 대중을 부추겨 당과 국가 관료를 공격했다. 중국 밖에서 볼 때 문혁은 마치 파리 코뮌처럼 정치권력을 민주적으로 개조하는 것 같았다. 따라서 당시 소련식 사회주의에 실망한 상당수 좌파 지식인이 문혁에 열광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직후부터 지식인과 전문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 1950년대 이미 중국 대학에서 정치학, 사회학, 법학, 신문학 등 중요한 학과가 사라졌다. 학자들도 설 자리를 잃었다. 당시 베이징대에서 근무한 운전기사가 “날이 어두워지면 차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는 사람이 많아 운전하기 두려웠다”고 회고할 정도다.

마오는 1956년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격하 움직임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스탈린 비판이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까 두려웠던 그는 1957년 반(反)우파투쟁을 일으켰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에서 힌트를 얻어 마오의 결정으로 이뤄진 사상통일 작업이다. 문혁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중국 지성계의 양심 첸리췬 전 베이징대 교수는 “유토피아가 현실이 되자 그것이 바로 지옥이었다”고 평했다.



1981년 덩샤오핑 정부는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를 통해 문혁을 “중국민족을 재난에 빠뜨린 하나의 비극”으로 정리했다. 이 같은 역사 해석은 1980년대까진 관방(官方: 정부, 공적 영역)과 민간 모두에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했다. 물론 일정한 비판은 허용됐으나 문혁에 대한 모든 기억이 공적 시민권을 얻진 못했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이 폭력으로 진압되자 문혁을 향한 비판적 반성은 그마저도 중단됐다.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은 문혁 관련 연구를 사실상 금지하고 문혁을 신화화하기 시작했다. 20세기 끝자락에 들어선 중국공산당은 톈안먼 시위와 소련의 붕괴 속에서 체제 위기를 감지했다. 덩샤오핑은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 우한·선전·상하이 등 중국 남부를 시찰하고 경제개혁·개방정책을 재천명)로 자본주의 경제체제 도입을 가속화해 위기를 타개했다.

‘사회주의 상품화’ 문화정책

1968년 5월 ‘68운동’ 와중에 프랑스 소르본대 학생들이 학교 건물 기둥에 마오쩌둥과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오른쪽부터)의 초상화를 붙이고 시위하고 있다. [GETTYIMAGES]

1968년 5월 ‘68운동’ 와중에 프랑스 소르본대 학생들이 학교 건물 기둥에 마오쩌둥과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오른쪽부터)의 초상화를 붙이고 시위하고 있다. [GETTYIMAGES]

공산당은 대중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사회주의 상품화’ 전략을 채택했다. 혁명 이후 중국 현대사를 혁명세대의 자랑스러운 회고담이나 외세에 맞선 영웅담으로 소비하는 것이 뼈대다. 문혁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0년대 덩샤오핑 정권 하에서 문혁은 성찰과 반성보다 상업적·오락적 소비 대상이 됐다. 정치권력과 시장이 결탁해 문혁에 대한 탈정치화, 탈이데올로기화를 단행했다. 쉬번(徐賁) 미국 세인트메리스 칼리지 교수의 지적처럼 문혁 당시 생활 경험을 담은 물건이 ‘문화재’ ‘개인 소장품’으로 소비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문혁은 단순히 망각될 뿐 아니라 분식되고 미화되기까지 했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아리프 딜릭(Arif Dirlik) 등 서방의 일부 좌파 지식인이 문혁 미화에 한몫했다. 신좌파와 포스트모던 학파 등은 이들과 상호작용하며 문혁에 대한 담론을 형성했다. 이들 서양 좌파 중 마오를 ‘반역의 마오’ ‘국가의 마오’로 구별한 바디우만이 아직도 자기 생각을 고수한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회가 혼미를 겪어도 서양 좌파 지식인에겐 그저 강 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문혁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강력한 권위주의를 직접 겪지도 않았으면서 선망한 셈이다. 문혁을 온몸으로 겪은 중국 지식인들은 이런 모습을 납득하기 어렵지 않을까.

문혁과 마오이즘을 인식하는 맥락과 층위는 다양하다. 중국과 유럽의 좌파 청년 지식인이 보는 문혁은 서로 다르다. 이른바 제3세계에 유통된 마오이즘은 이들과 또 다르다. 마오이즘의 모순 섞인 유산을 중국뿐 아니라 중국 밖에서도 간단히 ‘청산’할 수 없는 이유다. 1940~1970년대 마오이즘은 제3세계에서 ‘또 다른 근대’ 이데올로기로 부각됐다. 제3세계 국가엔 자신의 조국을 ‘근대화’하려던 청년과 지식인이 있었다. 이들에겐 동시대 유럽보다 중국이 가까운 미래로 비쳤다. 제3세계에서 마오이즘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등 외세에 맞설 저항 이데올로기이자 구시대적 전통·종교나 위계적 사회구조를 타파할 계몽 이데올로기였다.

애초에 마오이즘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은 거대한 대안 이데올로기의 등장이었다. 이미 1940년대 마오의 노선은 소련 스탈린주의에 실망한 세계 좌파들에게 또 다른 희망으로 여겨졌다. 마오 자신도 이를 간파하고 서양 자본주의와 소련식 사회주의를 모두 극복한 제3의 노선으로서 중국 혁명을 기획했다. 따라서 세계 수많은 좌파 지식인은 마오이즘과 중국 혁명에 열광했다. 다만 중국에서 마오이즘이 보인 많은 문제점이 마오이즘을 ‘수입’한 외부에선 보이지 않았다.

당대 프랑스 좌파 지식인과 청년들은 마오이즘과 문혁에 크게 공감했다. 이유가 뭘까. 그들은 중국을 대안으로 여겼다. “새로운 제국이 된 소련과 달리 중국은 참된 공산주의 국가로서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다”는 논리였다. “문혁은 부르주아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자 수정주의에 대한 참된 공산주의의 투쟁”이라는 인식도 팽배했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도 문혁을 스탈린주의에 대한 좌익적 비판으로 여겼다. 계급투쟁을 결말이 정해진 목적론적 과정으로 본 기성 사회주의와 달리 문혁이 혁명을 일상화·영구화했다고 상찬했다.

美·蘇 아닌 中이 해답?

일본 사상가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도 소련에 실망한 반대급부로 중국적 대안을 기대했다. 그는 흐루쇼프 이후 냉전 갈등축이 미국-소련의 대결에서 미국-중국 혹은 중국-소련의 대결로 바뀌었다고 봤다. 그 근간엔 이데올로기 대립보다 문명 차원의 대립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같은 동양 문명권에 속한 중국의 잠재력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문혁의 결과는 어땠나. 국가를 사회의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삼겠다던 약속은 깨졌다. 행동의 동기, 즉 ‘신념윤리’가 선하다고 해서 그 결과인 ‘책임윤리’를 피할 순 없다. 미국의 중국 현대지성사 권위자 모리스 메이스너(Maurice Meisner)의 지적처럼 마오는 소련식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반면교사로 삼았다면서 정작 그 진짜 교훈은 무시했다. 그리고 그 폐해에서 중국과 세계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조경란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특별위원회 위원. 중국현대사상 · 동아시아 사상 전공. 홍콩중문대 방문학자 · 베이징대 인문사회과학연구원 초빙교수 역임. 저서로는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 신좌파·자유주의 · 신유가’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 전통 · 근대 · 혁명으로 본 라이벌 사상가’ ‘국가, 유학, 지식인 : 현대 중국의 보수주의와 민족주의’ 등이 있다.





주간동아 1291호 (p48~50)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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