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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화의 밥꽃, 목숨꽃 사랑 ⑫

흔하기에 소중한 볼품없어 더 왕성한

생명의 꽃, 벼꽃

  • 김광화 농부작가 flowingsky@hanmail.net

흔하기에 소중한 볼품없어 더 왕성한

흔하기에 소중한 볼품없어 더 왕성한
요즘 ‘쿡방’이 대세인가. 방송마다 요리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그 나름 뜻이 있겠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그게 뭘까. 밥상에서 가장 기본은 밥. 나머지 이런저런 반찬은 밥을 잘 먹기 위한 보조가 아니겠나. 그런데 기본보다 보조에 지나치게 치우친 느낌이랄까. 재료 자체보다 지지고 볶고 온갖 양념으로 범벅을 하는 모습들. 사실 밥만 잘해도 소박한 반찬 두어 가지 해서 맛나게 먹을 수 있지 않나.

꽃잎조차 없이

이번 호는 그 밥이 되는 벼와 벼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한여름, 사람은 지치기 좋은 날씨. 그런데 이 더위를 아주 좋아하는 곡식이 있으니 바로 벼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더운 아시아 열대지방이 원산지인 벼는 뜨거운 한낮에도 잎을 꼿꼿이 하고 햇빛을 받는다. 마치 아기가 엄마 젖을 빨듯이 햇살을 달게 먹는다. 그러다 8월이면 이삭을 밀어 올리고 곧이어 꽃을 피운다.

그런데 벼꽃은 얼핏 봐선 꽃 같지가 않다. 보통 우리가 꽃이라고 할 때는 꽃잎, 꽃받침, 수술, 그리고 암술을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 그런데 벼꽃에는 그 흔한 꽃잎이 없다.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그래서인지 논마다 벼꽃이 무수히 펴 있어도 꽃이 핀 줄 아는 건 농부밖에 없는 듯하다. 하지만 벼는 농작물 가운데 가장 많은 꽃을 피우는 종류다. 크게 티가 나지 않는 꽃, 겉보기에도 참 볼품없는 꽃이다.

어쩌면 볼품없기에 인류를 먹여살려왔는지도 모른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식물의 꽃은 에너지 덩어리다. 꽃잎을 만드는 데 많은 에너지가 든다. 꽃잎을 만들지 않고 씨앗을 남길 수 있다면? 거기에 드는 에너지를 온전히 자신과 새끼한테 집중할 수 있으리라. 볏과 꽃들은 꽃잎이 없다. 벼를 비롯해 인류 3대 곡물에 드는 밀, 옥수수가 다 그렇다. 중매쟁이를 불러들이기 위해 꾸밀 필요가 없고, 중매비로 나가는 꿀이나 꽃가루에 크게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벼꽃은 꽃술조차 소박하다. 이삭이 패도 꽃술은 우리가 왕겨라 부르는 껍질 속에 들어 있어 볼 수가 없다. 이 껍질은 큰 껍질과 작은 껍질로 나뉘어 있는데 꽃이 피면 살짝 벌어진다. 그 사이로 깨알같이 작은 꽃밥이 머리를 내밀면서 꽃가루를 터뜨린다. 암술은 껍질 속 깊숙한 곳에 숨어 꽃가루를 받아들인다. 벼꽃이 활짝 피는 순간조차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암술은 아예 보기조차 어렵다.

벼꽃은 오래 피어 있지도 않는다. 날씨가 좋다면 꽃 한 송이는 한 시간 남짓 피었다 진다. 하루로 치면 가장 왕성하게 피는 때는 오전 11시. 낮 1시쯤엔 이 모든 과정이 거의 끝난다. 이삭 하나에 벼꽃 100~200송이가 피는데, 이 꽃 모두가 피었다 지는 데는 일주일 정도 걸린다.

꽃가루 찾아 가끔 벌이 오기도 하지만 벼는 중매쟁이나 하객한테는 마음 쓰지 않고 저희끼리 사랑을 나눈다. 꽃가루받이를 끝내면 꼿꼿했던 수술대는 힘을 잃고 아래로 축 처진다. 곧이어 껍질이 닫히면 수술은 바람 따라 사라진다. 그러고는 40일쯤 지나 쌀알이 다 영근다.

흔하기에 소중한 볼품없어 더 왕성한
벼꽃 한 다발의 사랑, 밥 한 그릇

이렇게 벼꽃 한 송이가 피었다 져야 쌀 한 톨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먹는 밥 한 그릇은? 벼꽃 한 다발이 피었다 진, 사랑의 결실이라 하겠다. 이렇게 벼꽃이 피고 지는 걸 볼 때면 많은 생각이 스쳐간다. 언제부터인지 쌀이 흔한 세상이 됐다. 요즘은 그 소중함을 대부분 잊고 산다. 화려한 요리에 가리고, 먹기 편한 빵에 밀려나고 있다.

이게 단순히 먹을거리 문제만으로 끝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다. 흔한 걸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 대가를 우리 스스로 고스란히 다시 받지 않을 수 없다. 뭔가가 흔하다는 건 우리네 삶과 가깝다는 것. 물이 그렇고, 공기가 그러하다. 오염되면 우리네 삶의 질이 그만큼 근본부터 나빠진다. 흙이, 우리가 먹는 쌀이 그렇다. 쌀 푸대접은 곧 생명 푸대접이나 다름없다.

사람 관계에서도 그렇지 않나. 사람 사이 가장 가까운 관계는 밥을 같이 먹는 식구. 생명 푸대접은 곧 식구 푸대접으로 이어진다. 부모는 돈을 벌어다주는 기계로, 아이들은 공부 노예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사랑보다 경쟁이, 생명보다 효율성이 강조되다 보니 삶의 근원으로부터 자꾸 멀어진다.

흔하고 볼품없는 벼꽃이 우리를 먹여 살린다. 그렇듯 보통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이 사회를 끌어가는 힘이다. 우리 모두가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꾸밈없이 자기다운 꽃으로 피어나야 하리.

흔하기에 소중한 볼품없어 더 왕성한
벼 : 볏과 한해살이풀. 여름에 비가 많이 오는 아시아 열대기후 지역이 원산지다. 벼는 평야는 물론 물이 없는 밭에서도 자라며, 심지어 물이 깊은 곳에서도 자라는 농작물이다. 전 세계 인구 가운데 절반가량이 주식으로 한다.

꽃은 줄기의 맨 끝에서 이삭이 나와 겹모두송이꽃차례(복총상화서)로 핀다. 벼꽃이 피는 시기는 볍씨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으며, 조생종이라면 우리나라에서 8월 초부터 피기 시작한다. 수술 6개와 암술 1개가 있고 제꽃가루받이를 한다.



주간동아 2015.08.10 1000호 (p88~89)

김광화 농부작가 flowingsk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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