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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인의 시간, 그 바쁨에 대하여

시간 도둑은 완벽주의자를 노린다

만성적 초과근로 남의 일자리 뺏는 일…게으름 피울 용기도 필요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시간 도둑은 완벽주의자를 노린다

시간 도둑은 완벽주의자를 노린다
직장인 김은화(39·가명) 씨는 1월부터 오전 6시 30분에 시작하는 영어 회화학원 ‘등록’을 시작했다. ‘공부’를 시작했다고 할 수 없는 건 출석률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김씨는 “학원 등록을 한 뒤부터 아침마다 더 자고 싶은 마음과 일어나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늦잠을 선택해 학원을 빠지고 나면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 하는 생각에 하루 종일 우울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계속 학원비를 내는 건 “그조차 안 하면 더 게으름을 피우게 될까 봐서”다. 야근이 잦아 보통 자정쯤 잠자리에 든다는 김씨는 “회사 동료 중에는 아이 키우고 살림하면서 직장 일까지 척척 해내는 이도 많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의지력이 부족하다는 자책감에 시달린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씨가 ‘모범’으로 여기는 직장 동료의 삶도 행복하지 않을 개연성이 높다. 통계청이 지난해 10세 이상 국민 2만7000명을 조사해 발표한 ‘2014년 생활시간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30대의 90.3%가 ‘피곤하다’고 응답했기 때문이다(‘매우 피곤하다’ 35.1%, ‘조금 피곤하다’ 55.2%). 40대의 89.2%, 20대의 84.1%, 50대의 81.6%도 피곤을 호소했다.

생존시간까지 아껴서 일하는 나라

효율과 성과가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한국인만 유독 피로에 시달리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피로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수면시간과 노동시간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은 매우 눈에 띄는 나라다. 앞선 조사에서 한국인이 잠드는 시각은 평일 밤 11시 24분, 토요일 밤 11시 29분, 일요일 밤은 11시 15분이었다.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7시간 49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한국갤럽이 2013년 19세 이상 국민 1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는 수면시간이 6시간 35분에 불과했다. 반면 OECD 회원국 국민은 하루 평균 8시간 22분 동안 잠을 자고,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오래 자는 프랑스인의 수면시간은 8시간 50분으로, 매일 우리보다 1시간 1분이나 길다.

그렇다면 남들보다 오래 깨어 있는 길고 긴 시간 동안 한국인은 주로 무엇을 할까. OECD 통계에 따르면 정답은 ‘일’이 될 것 같다. 지난해 우리나라 노동자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057시간으로 멕시코(2327시간), 칠레(2067시간)에 이어 세 번째로 길었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줄곧 노동시간 세계 1위를 유지하다 2008년 이후 내내 2위였던 걸 감안하면 다소 순위가 내려가긴 했다. 하지만 OECD 평균(1796시간)에 비하면 여전히 매우 길다. 같은 통계에서 일본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741시간에 불과했고, 서유럽국가들은 영국 1663시간, 독일 1302시간 수준이었다.



이처럼 일을 많이 하니 여가시간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미국레비경제연구소와 함께 한국인의 시간 활용을 연구 분석해 펴낸 ‘소득과 시간빈곤 계층을 위한 고용복지정책 수립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보통 사람은 일주일에 약 97시간을 먹고 자고 씻는 등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행위를 하는 데 쓴다. 일주일 전체 168시간 중 이를 뺀 값(71시간)을 ‘가용시간’이라 하며, 주당 노동시간이 이를 초과하면 ‘시간빈곤’에 빠지는 것으로 본다. 즉 주당 71시간 이상 노동하는 사람은 일을 하느라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시간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시간 부족자, 다시 말해 ‘시간빈민’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주당 71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을 보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근로기준법상 최장 노동시간은 연장근로를 포함해도 주당 52시간이지만, 주말 특근을 자주 하거나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사람, 그리고 자영업자의 경우 보통 노동시간이 71시간을 넘어선다. 인터넷 취업포털 사람인이 회사원 187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응답자 10명 중 6명이 하루 평균 3시간씩, 일주일 평균 4일간 야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다 보니 한국고용정보원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노동인구의 42%가 시간빈곤 상태에 빠져 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시간빈곤 비율이 78%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우리 국민이 늘 바쁜 이유로 사회 전반에 퍼진 ‘장시간 근로 시스템’을 든다. 신봉호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는 저서 ‘잡 메이킹 이코노믹스’에서 한국 경제는 지금까지 노동자가 대부분 과로에 시달리는 ‘장시간 과로 경제체제’로 유지됐다며, 이것이 현재 우리 경제의 ‘일자리 위기, 성장 정체, 중소기업 경쟁력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초과근무를 함으로써 자신의 건강과 학습 기회를 잃고, 청년층 등 다른 사람의 일자리까지 빼앗는다는 이유에서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 사회에 이러한 장시간 노동 시스템이 굳어진 한 이유로 왜곡된 임금체계를 든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잦은 초과근로로 발생한 면이 있는데, 그 배경에는 노동자의 초과근로수당을 상대적으로 낮게 지급하게 한 과거의 통상임금 지침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2013년 대법원이 상여금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 초과근로수당을 높이는 판결을 내놓았을 때 노동부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장시간 근로를 개선하고 임금체계를 합리화하겠다”는 의견을 내놨다. 그러나 뿌리 깊은 관행은 쉬이 변하지 않고 있다.

시간 도둑은 완벽주의자를 노린다
멀티태스킹으로 극복?

시간 도둑은 완벽주의자를 노린다
이처럼 장시간 노동이 일상화한 환경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끼니를 거르거나, 잠을 줄이거나, 이동할 때 뛰어다니는 것 등이다. 운전 중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도로에서 어물거리는 앞차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대는 운전자의 상당수가 ‘시간빈민’일 개연성이 높다. 두 아이를 둔 변호사 김현영(35·가명) 씨도 전형적인 ‘시간빈곤층’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한숨부터 나온다.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하면서 아들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인 뒤 사무실까지 달려가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만 한다. 출근할 때 규정속도를 지켜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늦은 밤 녹초가 돼 잠자리에 들 때까지 늘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의 동료들도 상당수가 ‘24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산다고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렇게 생존에 필수적인 시간을 줄이거나, 멀티태스킹을 함으로써 시간빈곤 문제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스웨덴 출신의 신경과학자 토르켈 클링베르그는 저서 ‘넘치는 뇌’에서 ‘인간은 유전적으로 멀티태스킹에 특화된 두뇌 구조를 타고 나지 않았다’며 여러 실험을 통해 ‘인간은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경우 모두 저조한 성과를 내기 십상’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도 잠시간을 줄여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건강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국립수면장애위원회가 실시한 연구에서는 전체 교통사고의 절반이 피로에서 비롯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당연히 삶의 질도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팀이 2010년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지수를 조사한 결과는 100점 만점에 63.2점으로, 조사 대상 97개국 중 58위에 그쳤다. 해당 문항을 토대로 자가 검사를 해보면 자신이 한국인 평균에 비해 행복한지, 아니면 불행한지 확인할 수 있다(상자기사 참조).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처럼 불행하면서도 스스로 일을 줄임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려 하지 않는 걸까.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저서 ‘도덕감정론’에서 사람들이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오늘날 현대인이 ‘주목과 관심과 공감과 맞장구’까지 포기하며 내달리는 이유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현병철 독일 베를린예술대 교수는 그 배경에 ‘성과사회’ 프레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의 저서 ‘피로사회’에 따르면 현대인은 이 사회가 ‘개인이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개인의 성패는 전적으로 자신이 하기에 달렸다고 믿고, 끝없는 채찍질을 통해 능력을 발휘하려 한다는 것이다. ‘피로사회’를 번역한 김태환 서울대 독문학과 교수가 “이 시스템은 이상적인 자아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는 것은 삶의 주도권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기는 것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 언론인 브리짓 슐트는 현대인의 시간 부족 현상을 취재해 펴낸 책 ‘타임 푸어’에서 ‘자신의 시간에 대한 통제권이 없고 일정이 예측불가능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쫓기는 삶은 통제권 결여와 예측불가능성, 불안의 산물’이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현대인은 무기력증, 탈진증후군(번아웃신드롬), 우울증 등에 시달린다.

시간 도둑은 완벽주의자를 노린다
생각은 비울수록 채워진다

시간 도둑은 완벽주의자를 노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망치는 이 악순환을 끊는 방법으로 긍정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제시하는 것은 ‘성찰’이다. ‘몰입의 즐거움’을 쓴 작가이자 긍정심리학자이며 ‘삶의 질 연구소’ 소장인 그는 ‘최고의 석학들은 어떤 질문을 할까’라는 책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을 이렇게 소개했다.

‘하루에 두세 번, 아무 때나 휴대전화의 알람을 설정해라. 알람이 울리면 공책을 꺼내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라. 내가 지금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주를 마친 뒤엔 공책에 적은 답을 다시 살펴보라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이렇게 묻는 것이다. ‘지난 한 주 동안 한 일 중 진심으로 즐겁게 한 것은 몇 가지나 되는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그토록 많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즐기며 하는 일을 늘릴 수 있을까. 그리고 억지로 하는 일을 줄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훨씬 달라진다는 게 그의 제안이다. 슐츠 역시 ‘잘 산다는 건 보람찬 일을 하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영혼을 충전할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바쁨을 추방하라 △당신이 생각하는 성공이란 무엇이며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당신의 시간 시야는 얼마나 되는가를 명확히 하라 △날마다 고요한 시간을 가져라 △심호흡을 다섯 번이라도 하라 등을 들었다.

그러나 정신없이 바삐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이처럼 홀로 ‘성찰’하는 삶을 살다 ‘게으르다’는 주위의 비난을 받게 되진 않을까. 이때 내놓을 수 있는 모범 답안은 뇌과학자 앤드루 스마트가 일러준다. 그의 저서 ‘뇌의 배신’에 등장하는 ‘나는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파악하고자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DMN)의 허브를 진동시키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그대로 들려주는 것이다.

스마트에 따르면 DMN은 2001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 신경과학자인 마커스 라이클이 발견한, 뇌과학의 최신 연구 성과다. 이 두뇌 부위는 대부분의 사람이 깨어 있되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며, 뇌 안에 있는 불필요한 정보를 삭제하고, 이전에 입력된 정보를 재정리하는 기능을 한다. ‘이렇게 불필요한 정보를 정리하지 않으면 정보 저장 공간이 줄어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게 스마트의 설명이다. ‘생각은 비울수록 채워진다’는 오랜 격언을 최신 뇌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에디톨로지’의 저자인 김정운 여러가지 문제연구소장도 “인간이 가장 창의적일 때는 멍하니 있을 때다. 멍하니 있을 때, 생각은 아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가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할 때가 있다. 그러고는 그 생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거꾸로 짚어나간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생각의 흐름을 찾아냈을 때, 자신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날아다녔던 생각의 범위에 놀라게 된다”고 했다. 일을 멈추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사람에게 창의력을 선물한다면, 그래서 결과적으로 좀 더 나은 성과까지 내게 해준다면 우리는 더는 ‘시간빈곤’ 상태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는 셈이다.

일찍이 토머스 모어는 저서 ‘유토피아’에서 ‘이상세계’를 사람들이 오전에 세 시간 일하고, 점심을 먹은 뒤 두 시간 휴식을 취하고, 오후에 세 시간을 더 일한 뒤 저녁을 먹는 곳으로 묘사했다. 나머지 시간 동안 유토피아의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했다. 우리 정부와 사회가 힘을 모아 관성화된 초과근로를 없애고 개인들이 자신의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주당 30시간만 일하고, 97시간 동안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일들을 한 뒤, 나머지 시간을 오롯이 뇌의 휴식과 여가에 할애할 수 있게 될까.

그러나 2015년 여름,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조사한 전국 400여 개 기업의 평균 하계휴가 일수는 4.6일이고, 직장인 상당수는 연차휴가의 절반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주간동아 2015.07.27 998호 (p32~35)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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