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7

2015.05.11

노인이라 부르지 마라 6080 新중년

노인정 대신 평생학습관으로…평생 배우고 즐기며 청년처럼 산다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5-05-11 1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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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이라 부르지 마라 6080 新중년

    서울 강서구 강서평생학습관이 운영하는 ‘강서 행복한 인문학당’ 수업 모습.

    #1 어릴 때부터 ‘방송인’이 꿈이었던 한연희(68) 씨는 방송에서 남녀 노인 모델을 보고 불현듯 옛 생각이 떠올랐다. “여자 직업은 무조건 교사”라는 부모 고집에 자신의 꿈을 접고 교사가 됐던 한씨는 지난해 9월부터 서울 서초구립 양재노인종합복지관 실버모델로 활동 중이다. 그동안 CF 5편을 찍고 홈쇼핑 방송과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장남한테 시집가 40년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돌아가시기 전 3년간 병수발도 했다. 그 뒤 투병생활을 한 딸을 간호했고 손자도 3년간 키웠다. 오랫동안 모범생으로 살았으니 이제는 지금까지 나를 깨뜨리자는 생각으로 모델에 도전했다”고 했다. 또 “처음엔 부끄러워 주위에 모델 활동에 대해 말을 못했다. 지금은 모델 일을 하는 게 삶의 가장 큰 활력소다. 친구들이 부러워한다”고 했다.

    #2 서울 강남구 대치평생학습관 댄스스포츠반에서 만난 조창희(66) 씨는 6년째 구민회관, 복지관 등에서 댄스스포츠를 배우고 있다. 모던댄스, 라틴댄스, 사교댄스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는 재미가 크다. 택시기사와 부동산공인중개사로 ‘투잡’을 뛰고 있는 그는 “오랜 시간 운전대를 잡으면 척추에 무리가 간다. 처음엔 건강을 위해 산행을 했는데 의사가 무릎에 무리가 간다고 등산을 말렸다. 댄스스포츠는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척추를 교정해주고 정신건강에도 좋다.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다 보면 저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또 “현재 구청에서 운영하는 댄스스포츠 수업을 듣고 있는데, 학생 40여 명 가운데 80%가 60세 이상인 내 또래”라며 “수강료가 일반 댄스학원의 3분의 1밖에 안 돼 빈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대기자도 많다. 큰돈 들이지 않고 운동과 취미생활을 겸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3 서울 강서구 강서평생학습관에서 만난 이기덕(71) 씨는 지난 6개월 동안 그림과 하모니카 등을 배웠다. 최근에는 인문학에 관심이 생겨 ‘강서 행복한 인문학당’에 수강신청을 했다. 이씨는 “강서구청 소식지에 강좌 개설 안내가 실렸는데, 수강신청 기간에 사람이 엄청나게 몰려 자칫하면 강좌를 못 들을 뻔했다”고 전했다. ‘소일거리’ 삼아 부동산공인중개사로 일하고 있다는 그는 “우두커니 집에 있는 것보다 밖으로 나와 문화생활을 즐기고 친구도 사귀는 것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에 좋다”고 했다.

    전국 구석구석 신종 놀이터

    노인이라 부르지 마라 6080 新중년

    서울 강남구 대치평생학습관의 댄스스포츠 기초반 수업 풍경.

    오랜 세월 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해온 노인정과 경로당은 지금도 동네마다 빠짐없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노인들이 모여 심심풀이 화투를 치며 외로움과 적적함을 달래던 노인정과 경로당에서 최근 60대는 물론이고 70대도 찾아보기 어렵다. 노인으로 불리기를 거부하는 자칭 ‘신(新)중년’이 새로운 곳으로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군·구 등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직영 또는 위탁)하는 노인복지관, 평생학습관, 도서관, 노인대학, 문화센터 등이 이들의 새로운 놀이터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4 노인복지시설현황’에 따르면 노인들의 사회활동 참여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교양, 취미생활, 건강 증진, 소득 보장 등과 관련한 각종 정보와 학습프로그램 등을 제공하는 노인 여가복지시설에는 노인복지관, 노인교실(노인대학 포함), 경로당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시·군·구에 신고된 노인복지관은 전국적으로 319개, 노인교실은 1413개로 집계됐다. 또 60세 이상 노인이 이용할 수 있는 평생학습관은 2014년 기준으로 전국 393개이며, 이곳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만 2만2630개(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연보). 강좌별 수강생 수가 많게는 수십 명에 이르는 걸 감안하면 전국적으로 노인 여가시설을 이용하는 사람 수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셈이다.

    한연희 씨는 “평생학습관이나 노인복지관에서 진행하는 노인 대상 프로그램은 대부분 무료이거나 한 달에 1만~3만 원이면 참여할 수 있다. 복지관 식당은 한 끼 식사에 2500원, 카페 커피 값은 1000~2000원 수준이다. 몇천 원만 있으면 하루 종일 복지관에서 강좌를 듣고, 친구들과 식사하고 커피 마시면서 즐겁게 놀 수 있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 ‘실버컴퓨터교실’에서 만난 전중세(84) 씨는 “정독도서관은 노인들한테 천국 같은 곳”이라고 했다. 3년째 이곳에서 컴퓨터를 배우고 있는 그는 “은퇴한 친구들이 도서관에서 책과 신문을 보며 소일한다는 얘기를 듣고 따라왔다 노인들한테 무료로 컴퓨터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았다. 수시로 인문학 강의나 영화 상영회 등도 열려 참 좋다”고 했다. 그는 매일 오전 8시 집을 나서 정독도서관 디지털자료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10시부터 시작하는 컴퓨터 수업에 들어간다. 끝나면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시립복지관에 가서 1000원짜리 점심식사를 하고 남녀 노인들과 함께 게이트볼을 즐긴다. 매주 세 차례씩 복지관에서 봉사활동도 한다는 그는 “죽기 전까지 공부하면서 즐겁고 건강하게 살다 가는 게 최고”라고 했다.

    4월 27일 오후 4시쯤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운 날씨에도 서울 강남구 평생학습센터(롱런아카데미)가 마련한 ‘동화구연지도사 2급’ 강좌에는 50~70대 수강생 20여 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나무꾼이 땀이 나서 수영을 하셨네. 산신령이 나타나서 펑펑펑~. 이 팬티가 네 팬티냐? 이 팬티가 네 팬티냐?’

    밴드 산울림의 노래 ‘산할아버지’ 멜로디에 맞춰 동화 ‘금도끼 은도끼’ 내용을 개사한 노래를 부르며 강사의 다양한 율동을 따라 하는 수강생들 모습은 희끗한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에도 유치원 아이들처럼 신나 보였다. 수업이 끝난 뒤 전직 교사 출신 수강생 김영해(64) 씨를 만났다. 그는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어 동화구연을 배운다. 수업시간에 노래와 율동을 하면 즐겁고 재미있어 다시 아이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또 “손녀가 세 살이라 종종 동화를 들려준다. ‘머리를 흔들어~ 엉덩이를 흔들어~’ 하면서 엉덩이를 씰룩씰룩 흔들어 보이면 아이가 좋아서 자지러진다. 동창회에 가서 하면 다들 박장대소하며 따라 한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수강생 최희숙(67) 씨는 “지난 5년간 사진을 찍었는데 나이가 드니까 장비를 메고 다니는 게 힘들어 그만뒀다. 그 뒤로 뭘 할까 고민하다 동화구연반이 있다는 걸 알았다. 처음엔 오글거려서 어떻게 할까 싶었는데 배워보니 무척 재밌고 신난다. 자격증을 따면 유치원에 가서 ‘동화구연 할머니’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끊임없이 도전하며 다시 찾은 동심

    노인이라 부르지 마라 6080 新중년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의 실버 컴퓨터교실 수업 모습.

    4월 24일 오후 3시 양재노인종합복지관 5층 강당에서 열린 시니어모델 선발 오디션장에서 만난 ‘신중년’들도 꿈이 많았다. 주최 측에 따르면 6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이 오디션은 매년 봄가을 열리는데, 이번 대회 참가자 모집에는 90명이 몰렸다. 이날 오디션을 통해 15명을 선발하기로 돼 있었다. 경쟁률이 6 대 1에 달하는 만큼 현장 분위기는 뜨거웠고 참가자는 저마다 한껏 멋을 낸 모습이었다. 행사장 입구에 마련된 접수대에서 번호표와 대본 한 장씩을 받아든 참가자들은 긴장된 얼굴로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돋보기를 꺼내 쓰고 연기 연습에 몰두했다. 검정 레이스 미니원피스를 입고 빨간 테두리의 선글라스를 낀 60대 여성 참가자, 턱시도에 나비넥타이 차림의 70대 남성 등이 눈에 띄었다. 참가자들은 한 사람당 주어진 3~5분 안에 연기와 노래, 춤, 무술시범, 악기 연주, 마술 등 그동안 갈고닦은 장기를 펼쳐놓았다.

    “아들이 신청서를 접수해 오디션에 참가했다”는 이재희(84) 씨는 “마침 내가 받은 대본 내용이 남자의 독백이라 나한테 잘 어울릴 것 같다. 모델 오디션이라고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올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나처럼 평범한 노인들이라 자신감이 생긴다”며 기대를 나타냈다.

    장장 3시간에 걸친 오디션이 끝난 뒤 10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그사이 행사장을 빠져나간 사람들이 있어 합격자 발표 때 4명의 자리가 비었다. 그중 “어린이집에 손자를 데리러가야 한다”며 자기 순서가 끝나자 부리나케 행사장을 빠져나간 60대 남성도 있었다. “시니어모델을 하고 싶어 두 달 전 대전에서 서울로 이사 왔다”는 김순영(66) 씨는 “지난해부터 벼르다 올해 드디어 오디션을 보게 됐다. 예전에 시민대학에서 뮤지컬을 배워 딱 한 번 무대에 선 적이 있다. 꼭 시니어모델이 돼 당당하게 무대를 누비고 싶다”고 했다. “만약 오늘 합격한다면 응원차 따라온 언니네 식구들과 함께 파티를 하겠다”던 그는 이날 15명의 합격자에 들자 기쁨에 들떠 환호했다.

    시니어모델 오디션 1기 출신 김인호(75) 씨는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직업에 귀천이 없다. 교육계에 종사하다 은퇴했는데 주변에서 ‘그 나이에 놀면 뭐하느냐’면서 격려해준다. 나이가 들어도 할 일이 있고 직업이 있다는 것 자체가 삶의 활력소가 되고 젊게 사는 비결”이라고 했다.

    노인복지관과 평생학습관 등에서 노인 대상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직원들이 입을 모아 꼽는 6070세대의 공통점이 있다. 배움에 대한 탐구심과 호기심이 강하고, 수업시간에 지각하거나 절대 결석하지 않는 등 열의가 대단하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관심 있는 강좌를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등 적극성과 열정 면에서 젊은이들 못지않다. ‘신중년’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게 은퇴 후에도 그들의 시계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노인이라 부르지 마라 6080 新중년

    서울 서초구립 양재노인종합복지관에서 열린 시니어모델 선발대회 합격자들. 왼쪽에서 6번째가 김순영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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