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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가족, 쓰다

아버지의 육필노트 자서전이 되다

평소 꼼꼼한 메모 습관이 힘…평생 제일 잘한 일로 기억할 것

  • 김지현 객원기자 koreanazalea@naver.com

아버지의 육필노트 자서전이 되다

“내는 그렇게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게 참 다행이라고.”(영화 ‘국제시장’ 대사 중)

자식에게만은 더 나은 삶을 물려주겠다는 의지. 세상 모든 아버지의 마음이다. 사회 격동 속에서 가족을 지켜내려고 아버지들은 안간힘을 썼다. 실패에 부딪혔고 남몰래 눈물도 흘렸다. 하지만 가족 앞에서는 늘 강해야 했다. 어떤 상처와 아픔도 쉽게 말하기 힘들었다. 말할라치면 어린 자식들은 “아버지는 또 그 얘기”라며 귀찮아했다.

이제 아버지들이 입을 연다. 자신의 인생을 쓴 자서전을 통해서다. 각각 60, 70, 80대인 그들이 자신의 숨겨왔던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잘나지 않은 평범한 인생”이라며 쑥스러워하면서도 얼굴에는 기쁨이 감돌았다.

흥남철수 때 피난 이재명(81)

“이제라도 책을 낸 것이 참 다행이지. 평소에 적어뒀던 일기를 자식들이 편집해준 덕분이야.”



자서전 ‘가족이 있는 삶’을 낸 이재명 씨. 1933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난하지만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6·25전쟁은 삶의 평화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북진해 흥남 근처까지 다다랐다. 전쟁통에도 인민군은 ‘반동분자’를 척결하고 있었다.

인민군에게 총살된 큰형은 그에게 평생의 한이다.

“형님과 늦은 저녁에 길을 가다 인민군에게 걸렸어. 당시 형님이 민주당 당원이었던 거야. 그때 이북에서 민주당은 ‘반동분자 집단’이었거든. 형제가 손을 붙잡은 채 끌려 나가 걸어갔지. 어떻게 도망가지, 머리가 하얀 순간 ‘탕’ 소리가 나면서 형님이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쓰러졌어. 나는 본능적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지. 그날도 남 도와주려고 길을 나선 마음 착한 형이었는데….”

어머니는 큰형이 죽은 직후 지병으로 운명했다. 그해 겨울 유엔군이 흥남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50년 12월 23일 가족과 함께 흥남에서 거제도로 떠나는 피난선에 올랐다. 석 달만 지나면 돌아갈 줄 알았던 고향과 영영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피난살이에도 가족의 비극은 계속됐다. 누이 남편이 간첩으로 몰려 죽고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54년 세상을 떠났다.

하루벌이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아이스케키’, 담배를 팔고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렸다. 학창 시절부터 키운 미술가 꿈은 접어야 했지만 서울 광장시장에서 화장품, 메리야스 등을 팔며 착실히 돈을 모았다. 27세 때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자식 셋을 낳았다. 그중 둘째가 글로벌 패션기업 ‘자라(Zara)’의 이봉진 한국지사장이다.

아버지의 육필노트 자서전이 되다

‘가족이 있는 삶’을 쓴 이재명 씨.

이봉진 사장은 “지금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분”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철두철미한 성격의 노력파다. 삶에 최선을 다하는 법과 도덕적으로 바른 길을 스스로 보여줬다. 그 세대 아버지로는 드물게 자식들과 대화도 많이 했다. 그 덕에 가족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정서적으로 든든한 뒷받침이 됐고 일에서는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으로 성장했다.”

20대인 손주들은 자서전을 통해 할아버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됐다. 외손녀 이은정 씨는 “할아버지의 삶을 단편적인 사건으로만 알았는데, 책으로 접하니 인생이라는 거대한 맥락이 가슴에 와 닿았다”고 했다. 외손녀 전은경 씨도 “영화 ‘국제시장’의 흥남부두 철수 장면에서 ‘저 배에 할아버지가 타지 않았다면 나도 없었겠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이재명 씨는 자서전을 쓴 후 자신의 삶을 새롭게 돌아보게 됐다고 말한다.

“그동안 삶의 희로애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바쁘게 살면서 감정을 절제해야 했으니까. 책으로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정말 오랜만에 눈물이 났어. 그래도 이만하면 열심히 살았구나 싶었지.”

학구열이 왕성한 그는 지금도 매일 동양고전을 읽고 글을 쓴다. 남은 한 가지 소망은 14년 전 하늘로 간 아내의 회고록을 집필하는 것이다. 건강이 허락할 때 책을 내고자 그는 오늘도 아내에 대한 추억을 열심히 기록한다.

아버지의 육필노트 자서전이 되다

이재명 씨의 장녀 이현주 씨, 외손녀 전은경 씨와 이은정 씨 (왼쪽부터 시계 방향). 책상 위 사진은 2001년 고인이 된 아내 박옥현 씨의 젊은 시절 모습.

43년 교직생활을 한 권에 심진용(76)

“43년간 교사로 외길 인생을 걸었죠. 교직 특성상 여러 지방을 떠돌았어요. 남해, 밀양, 상주, 군포, 가평, 안산…. 그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어요. 이렇게 책으로 나오니 참 보람 있습니다.”

자서전 ‘심해(深海)가 살아온 길’을 쓴 심진용 씨. 1959년 초등학교 교사가 돼 2001년 정년퇴임했다. 38년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근성이 야무졌다.

“내 별명이 ‘쇳골 오뚝이’예요. 고향이 남해군 서면 금곡리인데, 금곡(金谷)이 우리말로 ‘쇳골’이거든. 동네 어른들이 ‘우리 마을에서 제일 다부진 놈’이란 뜻으로 ‘쇳골 오뚝이’라 했지. 지금도 고향 사람들은 그렇게 불러요.”

그는 온순한 모범생으로 자라 순천사범학교에 진학했다. 졸업과 함께 전남 고흥군 금산초등학교에 부임해 교사 27년, 교감과 교장 11년, 장학사 5년을 거쳤다. 성실하게 살았지만 ‘연좌제’가 평생 따라다녔다. 인민군 활동을 했던 사촌형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을 한 사촌형은 ‘볼셰비키 혁명’ 관련 책을 읽으면서 공산당에 빠졌다가 간첩 혐의로 사형됐다. 사촌형의 이력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관공서에 서류를 떼거나 취업 면접을 볼 때도 연좌제가 따라다녔다.

아버지의 육필노트 자서전이 되다

자서전 원고를 보는 심진용(오른쪽), 김영자 씨 부부. 심씨는 그동안 쓴 일기와 교사일지를 모아두었다.

“1991년 봄이었어. 경기도 연천 고랑포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는데 연천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어. 북한에서 ‘심진용 동무, 인민학교 교장 취임을 축하하오’라며 방송을 했다는 거야. 평생 사상을 의심받으며 힘들게 살았는데. 자꾸 나를 형님과 연관 지으려는 북한이 너무도 괘씸했어.”

그는 교직생활 중 반공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1979년에는 직접 만든 반공교육 자료로 우수상도 받았다. 학교 사택 화재는 교직 생활 중 큰 위기였다. 밀양 가인초등학교에 근무하던 37세 무렵이다. 당시 임신 중인 아내와 자녀 셋을 데리고 사택에 살았다. 어느 날 아궁이의 불이 번지면서 순식간에 모든 건물과 재산이 타버렸다. 방화죄로 해직될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건 학부모와 제자들이었다. “심진용 선생님은 사랑이 많은 훌륭한 교사다. 이번 일로 학교에서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다행히 임기 끝까지 학교에 남을 수 있었고 쓰러진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의 육필노트 자서전이 되다

심진용 씨가 43년간 쓴 교사일지.

43년 동안 공책 수십 권에 일기를 썼지만 자서전을 낼 생각은 못 했다. 어느 날 서울 관악구청에서 ‘65세 이상 어르신의 자서전 쓰기 지원’ 공고를 봤다.

“‘내가 올해 희수(喜壽·77)니까 꼭 해야 한다’고 했지. 생생한 자서전을 쓰려고 내 과거 행적을 다시 밟았어. 고향, 대학생 때 하숙집, 근무한 학교들, 군대 복무 지역…. 반 년 동안 총 17군데를 돌아다녔지. 지난해 6월 출판기념회를 열고 가족, 친구, 선후배 모두 불러 모았어. 제자인 김장실 국회의원도 오고.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하던지.”

심씨의 딸들은 자서전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새어머니 김영자 씨의 가족 사랑을 새삼 깨달아서다. 김씨는 심씨가 20여 년 전 첫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한 아내다.

“얼굴을 보고 대화해도 아비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웠겠지. 이렇게 책을 쓰니까 새어머니의 헌신을 진심으로 느꼈나 봐. 책 덕분에 자식들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야.”

팔순에는 부부 인생기를 책으로 내고 싶다며 그가 환하게 웃었다.

중동 건설 주역 자부심 강신영(62)

아버지의 육필노트 자서전이 되다

전문 댄서 포즈를 취한 강신영 씨.

“1970, 80년대 우리나라가 외화를 많이 벌었잖아요. 그 중심에 중동 건설이 있죠. 나도 그 분야에 내 젊음을 ‘올인’했어요. 풀 한 포기 없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외롭고 고달픈 해외 근무였지만 내 인생의 황금기였어요.”

강신영 씨는 최근 대학생 5명의 도움을 받아 자서전 ‘예순 즈음에’를 냈다. 청년 비정부기구(NGO) ‘청년이 여는 미래’(옛 미래를여는청년포럼)의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학생들과 9차례 식사하며 지나온 삶을 이야기했고 학생들은 받아쓰기와 편집을 했다.

강씨는 국내외에서 활약한 비즈니스맨이었다. 중앙대 무역학과 71학번으로 1980년 럭키개발 (현 GS건설)에 입사했다. 80년부터 83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 킹사우드대 설립 현장에 있었고, 이후 여의도 LG트윈타워 건설 현장 근무, 스키장갑업체 ‘시즈’ 공장장 등을 역임하며 99년 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화려한 경력 중에서도 중동 근무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40여 년 전 현대건설의 주바일 항만공사 규모가 9억3000만 달러였는데 당시 한국 정부 예산의 4분의 1 규모였죠. 내가 참여한 킹사우드대 공사 규모도 3억 달러 정도였으니 나도 국가 발전의 주역이란 자부심이 커요.”

귀국 후에도 승승장구했다. 35세이던 1988년 해외근무 경력을 인정받아 시즈에 입사했다. 당시 국내 스키장갑업체 중 수출 규모가 가장 큰 회사였다. 3D(Dirty, Dangerous, Difficult) 업종을 기피하는 풍조로 직원들이 공장 근무를 꺼려하는데 주문 물량은 계속 늘어났다. 궁리 끝에 중국과 스리랑카에 하청업체를 두고 현지 공장을 가동했다. 제조가 수월해졌고 입사 6년 만에 스키장갑 200만 켤레를 수출하면서 매출이 2배로 뛰었다. 12년 동안 근무하면서 자회사 사장까지 맡았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그의 성공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회사가 적자를 내자 책임지고 퇴사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내와도 이혼했다.

지금은 새로운 취미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첫 번째는 춤. 그는 경력 20년 이상의 전문 춤꾼으로 댄스대회 선수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글쓰기다. 그의 인터넷 블로그 ‘캉캉의 글 모음’에 하루 2000~3000명이 방문한다. 하지만 요즘 그에게 가장 뿌듯한 일은 자서전을 낸 것.

“원고를 읽으면서 내 상처가 치유되는 걸 느꼈어요. 잊었다고 생각한 아픔, 그런 것들이 여전히 가슴에 살아 있더라고요. ‘뭐 이런 걸 갖고 옹졸하게 속상해했나’ 싶어 창피하기도 했죠. 남에 대한 원망, 서운함을 싹 정리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후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아버지의 육필노트 자서전이 되다

1980년대 초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하던 시절 강신영(왼쪽) 씨.

그는 이번 설 연휴 자녀를 만나 자서전을 줄 계획이다.

“이혼하느라 어릴 때 아빠랑 헤어졌는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요.”

자서전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들도 한층 성숙해졌다. 원고를 편집한 김경인(명지대 미술사학과) 학생은 “50, 60대 남성을 다시 보게 됐다. 예전엔 ‘아저씨’로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들의 행동과 표정에 공감이 간다. 또 졸업 후 진로뿐 아니라 30대부터 60대까지 무엇을 할 건지 장기적인 목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서전 주인공 3명은 공통점이 있었다. ‘평소 꼼꼼히 메모하는 습관.’ 글쓰기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매일 자기 삶을 착실히 기록한다면 자서전을 낼 수 있다. 장영희 ‘서울인생이모작지원센터’ 자서전쓰기사업단 대표는 “누구나 자서전을 쓸 수 있다. 유명인의 화려한 삶보다 평범한 인물의 진솔한 삶이 더 큰 공감을 받는다. 인생의 상처를 치유하고 타인과 소통하고 싶다면 자서전 쓰기가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간동아 2015.02.16 976호 (p34~36)

김지현 객원기자 koreanazal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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