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8

2014.12.22

명연주자 질시의 시선 몰아낸 지성미

앵그르가 그린 파가니니

  •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4-12-22 13: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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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연주자 질시의 시선 몰아낸 지성미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19년, 종이에 연필, 29.8×21.8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숱한 음악가가 세상에 명예와 오욕을 남기고 떠났지만 이탈리아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처럼 명예와 오욕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이도 없을 것이다. 경이로울 정도로 압도적인 테크닉과 현란한 무대 매너를 갖췄던 파가니니는 19세기 초까지 귀족에게 예속돼 있던 작곡가의 위치를 독립된 예술가, 나아가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연주회를 여는 엔터테이너의 위치로 끌어올린 연주자였다. 말하자면 파가니니는 오늘날 세계 각 도시를 돌며 콘서트를 여는 클래식 연주자와 팝스타의 시조인 셈이다.

    파가니니가 최초로 ‘전문 연주자’의 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신기에 가까웠던 그의 바이올린 연주 솜씨 덕분이었다. 바이올린 테크닉이 뛰어났던 파가니니는 연주회를 위해 고난도 기교로 가득한 바이올린 곡을 계속 작곡했고,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등 그의 곡은 지금도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난공불락의 벽으로 손꼽힌다. 파가니니가 순회공연을 한 도시마다 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바이올린을 거꾸로 들고 연주했다는 둥, 바이올린으로 고양이와 개 울음소리를 똑같이 흉내 냈다는 둥, 전설 아닌 전설이 새롭게 생겨나곤 했다. 그의 연주를 듣고 까무러치는 귀부인도 적잖았다.

    자연히 파가니니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경탄뿐 아니라 질시도 섞이게 됐다. 게다가 교통편이 매우 열악했던 19세기 초반, 역마차를 타고 유럽 전역을 돌며 연주 여행을 계속하던 파가니니는 후두염에 걸려 목소리를 잃고 말았다. 당시 불치병이던 매독을 치료하기 위해 수은 요법을 쓴 것 역시 그의 건강에 치명타였다.

    잦은 병치레로 비쩍 마른 괴이한 모습에 목소리마저 잃게 되자 곧 파가니니에 대한 선정적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애인의 창자를 꼬아 바이올린 G현을 만들었다, 연주를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등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심지어 시인 하이네조차 무대 위에 선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 있었고, 그 사슬을 쥔 악마가 앉아 있는 것을 봤다는 글을 남겼을 정도니, 파가니니에 대한 중상모략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침내 1840년 파가니니가 프랑스 니스에서 숨을 거둘 때는 어린 아들만 쓸쓸히 임종을 지켰다. 파가니니는 고향인 스위스 제노바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지만, 그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 때문에 제노바 교회들이 시신 매장을 거부했다. 납골당을 떠돌던 그의 시신은 사망한 지 36년이 지난 1876년에야 비로소 제노바의 한 교회 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파가니니는 마르고 큰 키에 긴 매부리코를 가진, 결코 호감 가지 않는 외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이런 외모 역시 ‘악마와 결탁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헛소문을 부추기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가 1819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그린 파가니니의 초상화를 보면 그의 외모에 대한 소문이 다분히 과장됐음을 알 수 있다. 종이에 연필로 그린 이 정교한 스케치에서 파가니니는 옆구리에 바이올린과 활을 낀 채 차분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파가니니의 연주 장면을 그린 캐리커처에서 으레 등장하는 긴 팔과 다리, 괴기스러운 얼굴 등은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바이올린을 소중하게 받쳐 든 자세와 균형 잡힌 얼굴에서 지성미와 신중함이 느껴진다.

    파가니니를 둘러싼 소문들, 무엇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과도 같은 수식어는 지금도 그의 이름에 빠지지 않고 따라다닌다. 앵그르의 스케치로 이 거장의 참다운 모습이 남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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