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2

2014.11.10

우린 ‘스펙’보다 인문학 본다

올 대기업 공채 다양한 분야 지식 연결 ‘통섭력’ 평가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4-11-10 09: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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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스펙’보다 인문학 본다

    10월 12일 서울 강남구 단대부고에서 삼성그룹의 하반기 신입사원 선발 필기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역사 속 발명품 중 공학도의 자질과 연관 있는 것을 선택해 그 이유를 쓰시오.’

    현대자동차그룹(현대차)이 올봄 입사시험(HMAT)에 출제한 에세이 문제다. 현대차는 10월 초 치른 하반기 HMAT 응시자들에겐 ‘몽골제국과 로마제국의 발전 사례가 현대차의 글로벌 전략에 시사하는 점’에 대해 쓰라고 주문했다. 역사와 공학, 그리고 현대차의 글로벌 전략까지 두루 알아야 답할 수 있는 논제다.

    전문가들은 올해 대기업 공개채용(공채)을 특징짓는 요소로 이러한 ‘통섭력’을 꼽는다. 인문학, 그중에서도 역사에 기반을 두고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연결하는 능력을 요구한 기업이 많았다는 뜻이다. 삼성그룹은 하반기 입사시험(SSAT)에 신라시대를 유추할 수 있는 지문을 제시한 뒤 해당 시대에 발표된 시조를 고르라는 문제를 냈다. 보기는 ‘처용가’‘황조가’‘청산별곡’ 등이었다.

    SSAT 응시생들은 또 조선에서 김홍도가 활동하던 시절 프랑스에서 발생한 사건, 산업혁명 시기 영국 상황과 맞지 않는 것 등에 대한 질문에도 답해야 했다. 취업 포털사이트 사람인의 임민욱 홍보팀장은 이에 대해 “최근 기업들은 인문학적 상상력과 창의성, 이를 기반으로 한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갖춘 직원을 원한다. 이에 따라 학벌과 스펙을 중시하는 기존 채용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기존 채용 방식 벗어나 새로운 시도



    스펙은 영어 단어 ‘specification(설명서)’의 줄임말로, 직장이나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를 뜻하는 신조어다. 취업준비생 사이에서는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면 최소한 ‘스펙 5종 세트’(학벌·학점·토익점수·어학연수·자격증)를 갖추고, 가능하면 봉사활동·인턴십·공모전 수상경력 등 ‘옵션 3종 세트’까지 추가하는 게 좋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그러나 정작 기업들은 스펙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는 게 채용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해 325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3년 신입사원 채용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기업의 65%는 스펙을 최소한의 자격 판단 요소로만 활용했다. 취업 포털사이트 잡코리아가 기업 인사담당자 31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93%는 ‘입사 지원자들의 스펙이 과하다’고 답했다. 취업준비생의 스펙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면서 기업들은 새로운 평가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최근 인문학이 바로 그 기준으로 널리 활용되는 모양새다.

    포스코는 최근 취업시장에서 지나친 스펙 경쟁이 일고 있다며 해외연수, 봉사활동, 제2외국어 점수, 인턴십, 자격증 등을 우대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단 한국사 자격증에만 가점을 준다. 또 상반기 채용부터 면접 단계에 역사에세이 평가를 추가했다. 지원자가 40분간 2문제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도록 하는 방식이다. 포스코 홍보실의 정용민 매니저는 이에 대해 “지원자의 인문학적 소양과 사고력, 소통역량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LG그룹, GS그룹, CJ그룹도 속속 지원자의 한국사 실력 평가를 시작했다.

    금융권에도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는 곳이 많다. KB국민은행은 채용원서에 최근 읽은 인문도서를 기재하도록 했으며, 필기시험에서 ‘은행산업의 현재를 나타낼 수 있는 사자성어’‘기업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는 이유와 사례’ 등도 물었다. 우리은행도 자기소개서에 감명 깊게 읽은 인문학 서적 3권을 적는 칸을 만들었고, 한국사·국어·한자 등 관련 자격증 소지자를 우대한다.

    신한은행 지원서에도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인문학 서적과 경제·경영 서적을 소개하는 자리가 있다. 한 기업 인사담당자는 “현장에서 보면 스펙이 업무능력과 바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최근에는 토익점수 좀 더 받은 사람보다 배려심, 협동심 등 인성을 갖춘 사람을 선호하는 추세”라며 “최근 채용시장에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그런 기업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들이 전형 과정에 인문학 관련 요소를 늘린 것은 인문학이 기업 운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11년 최고경영자(CEO) 회원 49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7.8%가 ‘인문학적 소양이 경영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가산점을 주고서라도 뽑을 의향이 있다’는 항목에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도 82.7%였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 조사 결과 등을 담은 보고서 ‘인문학이 경영을 바꾼다’에서 인문학은 조직 창의성 제고, 미래경영환경 예측, 제품개발 및 디자인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다.

    인문학의 가치 재평가

    전문가들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애플 CEO 고(故) 스티브 잡스와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 등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고 평가한다. 혁신적인 유저인터페이스(UI)를 개발해 모바일 기기 시장을 석권한 잡스는 아이패드를 선보이는 자리에서 “애플은 기술과 교양(liberal arts)의 교차로에 있다”고 했을 만큼 기술뿐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을 중시했다. 그 자신이 철학, 심리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UI를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임민욱 사람인 팀장은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 기업들은 인문학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됐다. 기술력으로 단기성과는 낼 수 있어도 글로벌 시장의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오래 살아남기는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자연스레 채용시장의 인문학 열풍을 가져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촉,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동물적 감각’을 쓴 이병주 경영전문작가도 “현대 기업 경영에서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현대인의 보다 고차원적인 욕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러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진짜’ 인문학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의 저자 문화(수유너머N 연구원)는 저서에서 “이제 인문학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한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인문학을 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다그친다. 성공한 사람들이 다 읽지 않았느냐! 인문학이야말로 실용 학문이다! 여기에 인문학이 아니라 다른 것을 넣어도 모두 통한다. 한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컴퓨터를, 영어를 배워야 했던 이들이 이제는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미 서점가에는 취업시험에 나올 만한 인문학 지식을 집대성한 개론 형태의 서적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심지어 전형 과정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하는 기업은 크게 늘었지만, 정작 인문학 전공자의 취업문은 좁아지는 추세다. LG화학, LG디스플레이 등 상당수 대기업이 올해 하반기 공채에서 인문계 졸업자를 뽑지 않았다. 현대차도 인문계 학생은 신입사원 공채 대상에서 제외했다. 현대차는 “인문계 출신자가 원하는 직무를 등록하면 인사담당자가 그 내용을 확인한 뒤 수시 채용하는 식으로 채용 방식을 바꿨을 뿐 인문계 출신자의 입사 규모를 줄인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가시지 않고 있다.

    우린 ‘스펙’보다 인문학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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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은 이공계 출신이 취업에 유리

    인문계 졸업생의 취업률은 현재도 다른 계열 졸업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상황이다.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건강보험공단 DB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 발표한 2013 취업통계연표에 따르면 지난해 6월 현재 대학 인문계열 졸업자의 취업률은 48.1%로 공학(68.6%), 교육(64.0%), 사회(56.7%), 자연(56.1%) 계열에 비해 크게 낮다. 특히 국어국문학과(37.7%) 졸업자의 취업률은 기계공학과(71.7%)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계 졸업자의 ‘구’십 퍼센트(%)는 ‘논’다는 의미를 담은 ‘인구론’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특히 취업준비생이 선호하는 대기업의 경우 인문계 사원 비율이 매우 낮은 편이다. 지난해 삼성그룹 신입사원 중 인문계 졸업자는 20%였고, 삼성전자의 경우는 15%에 불과했다. LG그룹과 SK그룹 주요 계열사의 인문계열 신입사원 비율도 15~20% 선으로 알려졌다. 삼성이 내년부터 채용방식을 바꾸기로 하면서, 인문계열 졸업자의 취업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삼성은 모집 직군별로 ‘직무적합성 평가’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SSAT 응시 기회를 주기로 했는데, 이 단계에서 전공 위주의 업무능력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연구개발·기술·소프트웨어 직군은 대학에서 들은 전공과목 수와 난이도, 학점 등을 제출하고, 영업이나 경영지원직은 평소 지원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를 기술한 에세이를 내는 방식이다. 이에 대해 인문계 취업준비생들은 “지금까지는 웬만하면 SSAT에 응시해볼 수는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며 술렁이고 있다.

    인문계열 취업률이 낮아지면서 대학평가에서 불리해진 대학이 인문학과들을 통폐합하는 문제가 발생하자 교육부는 2014년 대학평가 때부터 아예 인문계열 취업률을 평가지표에서 제외했다. 대학의 인문학 교육이 위기를 맞은 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 ‘뉴욕타임스’도 지난해 10월 정부가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 관련 전공에 관심을 두는 데다 경기 침체가 길어짐에 따라 대학에서 인문계열 인기가 퇴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역사와 철학에 대해 고민하고, 인간을 연구하는 인문학의 필요성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정부도 올해 인문학 대중화 예산을 지난해 29억 원에서 60억 원으로 2배 이상 증액하고, 대통령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안에 인문정신문화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인문학 확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취업시장에서 시작된 인문학 열풍이 사회 전반의 인문학 중흥으로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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