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5

2014.09.22

세월 더 가기 전에 ‘영화 주인공’ 되어볼까?

영화 속 잊지 못할 장면과 그곳에서의 남다른 여행

  • 백승선 여행칼럼니스트 100white@gmail.com

    입력2014-09-22 1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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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 더 가기 전에 ‘영화 주인공’ 되어볼까?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 톰 행크스가 3년간의 달리기를 멈췄던 곳.

    영화를 볼 때 문득 ‘저기는 어디일까’ 하며 눈이 번쩍 뜨이는 곳이 있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예쁜 도시와 자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멋진 배우를 보면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런 곳이 있다. 아무 데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아름다운 영상이 나온다는 유럽 도시들과 스케일이 큰 영화나 로드 무비에 잘 어울리는 미국의 여느 도시들은 특히 영화감독이촬영지로 선호하는 곳이다. 올가을,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영화 속 아름다운 도시로 여행을 떠나자.

    ‘델마와 루이스’ ‘포레스트 검프’ 속

    미국 모뉴먼트밸리

    ‘델마와 루이스’는 1990년대 로드 무비의 전형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리들리 스콧이 감독을, 수전 서랜던과 지나 데이비스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중반부터 사막과 협곡들이 배경으로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모뉴먼트밸리와 그랜드캐니언이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평범한 두 여인의 여행은 처음엔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도중에 예기치 않은 살인을 하고 강도짓까지 하게 된 두 사람은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도주하는 두 사람이 타고 있던 1966년산 초록색 선더버드(Thunderbird) 뒤로 보이던 모뉴먼트밸리의 모습은 쓸쓸하다.

    점점 더 내몰리는 상황에서 황량한 느낌을 지을 수 없더니 경찰 추격으로 그랜드캐니언의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된 두 여인은 울며, 또 웃으며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서로의 눈빛을 확인한 두 사람은 그랜드캐니언의 벼랑 끝으로 질주한다.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은 바람에 날아가고, 서로의 손을 굳게 잡은 두 사람은 푸른색 자동차와 함께 새가 날 듯 자유롭게 날았다.

    수많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됐지만, 이렇게 슬픈 영화는 없었다. 서부 지역에서 가장 경이로운 장소가 그 두 사람에겐 ‘끝’을 향해 지나치는 곳이었을 뿐이다.

    영화를 본 지 한참 후 이곳을 찾았다. 남편에게서 단 하루만이라도 벗어나, 커피 시중드는 일에서 하루만이라도 벗어나 “단지 즐거운 여행을 하려고 했을 뿐이었는데…”라고 말하던 그들의 슬픈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세월 더 가기 전에 ‘영화 주인공’ 되어볼까?

    영화 ‘델마와 루이스’ 중반부터 배경으로 나오는 모뉴먼트밸리.

    미국 애리조나 주와 유타 주 경계에 걸쳐 있는 모뉴먼트밸리는 나바호(Navajo)족의 자치지구다. 1250년께부터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인디언의 삶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에 오면 누구나 보게 되는 모뉴먼트밸리를 대표하는 3개의 바위가 있다. 웨스트 미튼 뷰트(West Mitten Butte·1882m), 메릭 뷰트(Merrick Butte·1892m), 이스트 미튼 뷰트(East Mitten Butte·1898m)라는 이름의 바위산. 야구 글러브 같다 해서 붙은 미튼이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주전자 같기도 하고 코끼리 같기도 하다.

    Tip

    미국 163번 도로의 ‘밸리 드라이브’ 진입 도로 입구를 지나쳐 북동쪽으로 13km를 더 달리면 도착하는 곳이 바로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 톰 행크스가 그저 달리고 싶어 달렸던 3년간의 달리기를 멈추는 곳이다. 이곳에선 모두가 멈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어쩌면 다시 못 볼 풍광을 마음에 새긴다.

    ‘해리 포터’ 속

    영국 옥스퍼드

    세월 더 가기 전에 ‘영화 주인공’ 되어볼까?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 설치된 9와 4분의 3 플랫폼(위). 호그와트 식당 장면을 촬영한 크라이스트처치대.

    영국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80km 떨어진 옥스퍼드는 앵글로색슨 시대인 912년에 이미 정치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했던 도시다. 오래된 역사와 풍부한 문화가 넘치는 이곳엔 크라이스트처치대, 트리니티 칼리지, 뉴 칼리지, 유니버시티 칼리지, 퀸스 칼리지, 멜튼 칼리지 등 곳곳에 대학이 흩어져 있어 도시 전체가 하나의 대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1532년 헨리 8세가 설립한 유서 깊은 학교로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유명하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당과 대학을 겸하는 크라이스트처치대는 영화‘해리 포터’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영화 속 그리핀도르와 슬리데린 등 학생들이 밥을 먹던, 높다란 천장과 양옆에 즐비한 액자가 인상적이던 호그와트 식당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크라이스트처치대 식당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보들리언 도서관(Bodleian Library)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해리 포터’에서 해리 포터와 헤르미온느, 론이 볼드모트를 이기려고 숨죽이며 오래된 문헌들을 찾아보던 곳이다. 영국에서 출판한 대부분의 초판 서적을 보유하고 있는 보들리언 도서관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으로 400만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영국명문 대학들이 있는 곳으로 이미 유명한 옥스퍼드는 영화 ‘해리 포터’ 이후 더욱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됐다.

    Tip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 역(King’s Cross Station)은 영화 ‘해리 포터’에 나오는 9와 4분의 3 플랫폼 촬영지로 유명하다.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하려던 어린 해리 포터가 9와 4분의 3 플랫폼을 찾지 못해 헤매다 우연히 론 가족과 마주치고, 그들에게서 9와 4분의 3 플랫폼의 정체를 안 뒤 승강장 사이 벽을 통과해 호그와트 익스프레스 승강장에 도착하는 인상적인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실제로 이 역에 가면 승강장 한쪽에 절반쯤 벽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카트가 있는데,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속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세월 더 가기 전에 ‘영화 주인공’ 되어볼까?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아이들이 ‘도레미송’을 부르며 놀던 미라벨 정원(위). 두 남녀의 만남과 이별을 그린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이 된 곳이자 낭만적인 연인의 도시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Do(doe·암사슴), a deer a female deer.”

    견습 수녀 마리아가 아이들에게 노래를 쉽게 가르쳐주려고 부르던 노래 ‘도레미송’으로 기억되는 영화. 뮤지컬 영화의 고전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오래전 개봉했던 영화의 인기는 나라와 세대를 뛰어넘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는 말괄량이 견습 수녀 마리아가 폰트랩 대령의 일곱 아이를 돌보는 가정교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밑에서 엄격하게 통제받으며 지내던 아이들은 밝고 구김 없는 성격의 마리아에게 서서히 마음을 여는데, 장면마다 아름다운 ‘노래’들이 등장한다.

    ‘도레미송’의 무대인 미라벨 정원(Mirabell Garten)뿐 아니라 가제보(Gazebo·정원에 놓인 정자)가 놓여 있는 헬브룬 궁전도 방문할 만하다. 이 궁전의 넓은 정원 한쪽에서 장녀 리즐과 우편배달부 소년 롤프가 풋풋한 사랑의 노래 ‘Sixteen Going to Seventeen’을 불렀다.

    모차르트의 도시로 아름다운 선율이 끊이지 않는 잘츠부르크. 바로크 양식을 비롯해 다양한 양식의 화려한 건물과 궁전, 돌길을 달리는 마차까지 모든 것이 눈길을 머물게 한다.

    ‘냉정과 열정 사이’ 속

    이탈리아 피렌체

    “너의 서른 번째 생일,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연인들의 성지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자.”

    10년 전 약속을 지키려고 두오모에 올라간 준세이. 그리고 그를 만나러 온 아오이.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다시 봤다. 역시나 밀라노 역에서의 마지막 장면과 이어서 흐르는 두 곡의 배경음악으로 늘 같은 감동에 젖는다. 요시마타 료가 작곡한 ‘The Whole Nine Yards’가 흐르는 가운데 밀라노 역에 도착한 기차에서 내려 걷던 아오이. 플랫폼을 빠져 나가는 인파 사이에 서 있는 준세이를 본다. 잠시 서로를 노려보듯 서 있던 두 사람. 준세이는 손을 들어 두 번 까딱 인사를 하고, 무표정이던 아이오가 웃는다. 그리고 준세이도 웃는다. 준세이가 아오이에게 달려가는 순간, 엔딩 곡인 엔야의 ‘Wild Child’ 위로 자막이 올라가며 영화는 끝난다. 10년이 지난 후에도 처음 본 그날의 느낌이 고스란히 남는 영화다.

    준세이가 내려다본 그 붉은색 지붕들. 준세이와 아오이가 걷던 아르노 강가. 그 강 위에 걸려 있던 다리. 몇 년 전 나도 그곳에 서 있었다. 현실감을 잃은 채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피렌체의 좁은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사람들은 피렌체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라고 말한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한 준세이를 닮은 도시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바라본 도시는 15세기 풍광인 듯하다. 그러면서도 도시는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붉은색 지붕 사이를 흐르는 아르노 강의 풍광이 감탄을 자아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피렌체를 꽃의 도시(체타 델 피오레)라고 부른다. 르네상스 문화가 꽃을 피운 도시이기에 붙은 이름이겠지만, 나는 온 도시를 덮고 있는 붉은색 지붕들 때문이라고 우겨본다. 붉은 꽃이 핀 것 같은 도시에는 시간이 멈춘 듯, 시간을 앞서가는 듯 여행자의 시선으로는 그저 평화롭기만 한 삶들이 있었다. 가장 단순하면서 가장 포괄적인 삶의 원리,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 피렌체는 장구한 시간 그 사랑을 지켜봤다.

    세월 더 가기 전에 ‘영화 주인공’ 되어볼까?

    이탈리아 피렌체의 고풍스러운 풍경을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특히 아름답다.

    킬러들의 도시’ 속

    벨기에 브뤼헤

    세월 더 가기 전에 ‘영화 주인공’ 되어볼까?

    벨기에 브뤼헤는 중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가운데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로마의 휴일’은 로마의 거의 모든 곳을 보여줬다. 많은 사람이 그랬듯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로마에 꼭 한 번 가보리라 결심했다.

    그런 생각을 갖게 한 또 다른 영화가 바로 2008년 개봉한 ‘킬러들의 도시’다. 이 영화도 영화 배경인 벨기에의 브뤼헤 곳곳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대주교를 암살한 킬러 레이(콜린 파렐 분)와 켄(브레단 글리스 분)은 보스에게서 2주간 브뤼헤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에서 머문다. 두 사람은 브뤼헤의 아름다움에 반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곧 그들의 마지막 대결이 펼쳐진다.

    북유럽의 베네치아로 불리며 벨기에를 통틀어 중세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세계문화유산 도시 브뤼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동화 속 도시 같은 브뤼헤를 배경으로, 냉혹한 킬러들의 세계와 평화로운 도시의 아름다움이 퍽 잘 어울려 미묘한 느낌을 만들어냈다. 눈을 돌릴 때마다 만나는 멋진 거리와 골목, 13~15세기 건물, 자갈이 깔린 길, 그 위를 달리는 자전거 행렬 등 작은 도시 특유의 정서가 가득하다.

    세월 더 가기 전에 ‘영화 주인공’ 되어볼까?

    50여 개 다리가 운하를 가로질러 북유럽의 작은 베네치아라 불리는 아름다운 물의 도시 벨기에 브뤼헤.

    브뤼헤의 상징인 83m 높이 종탑 전망대에 서면 이 도시만의 아름다운 붉은 풍광을 접할 수 있다. 처음 갔을 땐 종탑을 외면했다. 366계단을 오를 엄두도, 고소공포증을 이겨낼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뒤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나는 곧장 종탑으로 올라갔다. 영화에서 죽음을 예견한, 마음이 따뜻하고 인간적인 킬러 켄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바로 이 종탑이었다. 그는 종탑에서 도시 풍광을 보며 이런 말을 한다.

    “정말 아름다운 곳 아닌가. 와 보게 돼서 영광이야.”

    사람을 죽이는 일만 하며 살아온 그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죽는 것이 행복했을까. 그 순간 켄은 눈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그 아름다움을 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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