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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평화를 빕니다 02

“나에게 회초리 들어야 남을 훈계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 한국 교회 원로 방지일 목사 “신앙인부터 이기심 버리면 모든 문제 풀릴 것”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나에게 회초리 들어야 남을 훈계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회초리 들어야 남을 훈계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죠. 늘 그 말씀을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건 그런 거예요. 자기를 버리고 포기하고 죽이고 없애는 것. 그렇게 나의 명예, 감정, 의지, 인격까지 다 없애고 진정으로 남을 위하는 것. 그게 참된 신앙인의 삶이고, 또 인간의 자세입니다.”

성경서 멀어지고 변질된 지도자들

방지일(103·사진) 목사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1911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난 그는 37년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올해로 78년째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큰 어른이다. 백수를 훌쩍 넘겼지만 귀가 다소 어두운 것을 제외하면 인터뷰에 어려움이 없었다. 나지막이 대화를 이어가다가도 강조해야 하는 부분이 있을 때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농담을 던지고 껄껄 소리 내 웃기도 했다. 그에게 한국 사회와 교회를 향한 조언을 부탁했을 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들려준 것이 바로 ‘자신을 버리는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방 목사는 사회 구성원 모두, 특히 신앙인부터 이기심을 버리면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했다.

방 목사가 7월 열린 ‘한국교회와 목회자 갱신을 위한 회초리 기도대성회’의 포스터 모델로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포스터 속에서 그는 바지를 걷고 손에 든 회초리로 직접 자신의 종아리를 내리쳤다. ‘나부터 회개하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다.

이 대회를 주최한 한국기독교원로목사회(대표회장 최복규 목사)는 당시 기자회견을 통해 “작금의 한국 교회는 우리가 사회를 바라보며 느끼는 불안감만큼이나 지도자들의 도덕성 하락, 부정과 부패, 습관처럼 반복되는 분열과 분쟁으로 심각한 진통을 겪으며 혼란에 휩싸여 있다”면서 “우리 기독교인이, 무엇보다 교계 지도자들이 성경적 가치에서 멀어지고 변질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방 목사는 이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교회에 유독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회든 교회든 지도자들이 먼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매를 맞아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나. 그래서 나부터 종아리를 걷은 것”이라고 했다.



“어릴 때 보면 우리 숙부님들은 자식을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때렸어요. 그런데도 사촌들이 순종을 하더란 말이에요. ‘그렇게 맞고도 분한 마음이 들지 않느냐’ 했더니 사촌이 ‘우리 아버지는 나를 때리고 나면 그 회초리를 들고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 뒤 스스로를 때리신다. 회초리가 부러지도록 당신을 때려 멍들고 피가 나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고, 그때부터는 매를 맞아도 더는 아프지 않다’고 합디다. 내가 그 이야기를 평생 잊지 않아요. 스스로를 징계할 수 있어야 타인도 꾸짖을 수 있는 거죠.”

방 목사는 이렇게 평양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많이 이야기했다. 한국 장로교 초기 신자였던 조부모와 숙부들은 지금도 그의 삶의 모델이라고 한다. 방 목사는 “어머니가 나를 낳다 돌아가시고, 아버지(방효원 목사)도 내가 다섯 살 때 중국으로 선교를 하러 떠나셔서 조부모님 손에 자랐다. 조부의 부지런함과 신앙생활을 지금도 늘 마음에 되새긴다”고 했다. 방 목사의 침실 벽에는 그의 조부와 부친, 방 목사, 그리고 방 목사의 어린 아들까지 4대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평양 숭실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가 평양 장로회신학대를 다시 졸업하고 목사가 된 데는 이런 가족의 영향이 컸다. 그는 이후 중국 산둥(山東)성으로 파송돼 21년을 선교사로 지냈다. 그사이 중국은 국민당 집권기에서 일본 점령기와 미국 치하를 거쳐 국민당의 재집권과 공산화까지 숨 가쁜 변화를 겪었다. 권력 중심이 다섯 차례나 옮겨가는 사이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방 목사는 1957년 중국공산당 정부에 의해 추방되면서 비로소 고국 땅을 밟았다. 6·25 전쟁과 남북 분단으로 이미 고향 평양은 영영 갈 수 없게 된 뒤였다.

그는 이때부터 서울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를 맡았고, 1979년 은퇴한 뒤에도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봄까지만 해도 자신을 찾는 교회가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 설교단 위에 섰는데, 최근 다리가 불편해져 휠체어를 타게 되면서 인터넷에 접속해 세계 각지 선교사들과 e메일을 주고받는 것으로 소통을 대신한다고 했다. “목사님보다 수십 세 더 젊은 70, 80대 노인 중에도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는 분이 많은데 대단하시다”고 하자 방 목사는 “내가 대학생 시절에는 타이프라이터로 1분에 300~400타씩 쳤다. 그 실력이 아직 남아 있는 건지 e메일 보내는 게 전화통화보다 오히려 수월하더라”며 환히 웃었다.

“귀가 어두워져 전화 목소리를 듣는 게 쉽지 않거든요. 내가 e메일이 더 좋다고 하니까 많은 사람이 편지를 보내와서 요새는 하루에 수백 통을 읽고 답장을 보내요. 그러면서 좋은 말씀을 듣고 나누는 게 보람이고 기쁨이죠.”

죽으러 온 예수의 삶 되새겨야

매일 아침 쉬지 않는 성경 읽기와 기도, 그리고 50년 넘게 계속하고 있는 월요일 성경 공부 모임도 그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방 목사가 ‘한국장로신문’에 기고한 칼럼 ‘나의 나됨’에는 “1957년 중국으로부터 추방을 당해 조국으로 돌아왔는데 몇몇 분의 신앙 동인이 찾아와서 성경공부를 하자고 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는 이듬해부터 매주 월요일 동료 목사들과 함께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인터뷰 날인 8월 11일 월요일에도 1시간 동안 이 모임에 참석한 뒤 기자를 만났다.

그의 삶의 철학은 “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는 않겠다”는 것. 방 목사는 “예수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러 온 게 아니라 죽으러 왔다. 죽고 부활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줬다. 지금 교회가 되새겨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그의 삶”이라며 “나도 평생 녹슬지 않고 예수의 삶을 따라 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방지일 목사는 …

1911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난 한국 개신교의 살아있는 역사. 평양 숭실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3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중국 산둥성에 가 선교사가 됐다. 57년 귀국 후에는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 일하다 은퇴했고 예장통합 교단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등을 맡았다. 국민훈장 모란장(1998), 숭실인상 추양목회대상(1998) 등을 받았다.



주간동아 2014.08.18 951호 (p14~15)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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