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6

2014.07.14

웨이보 탄압…글 안 쓰고 ‘눈팅’뿐

중국 정부 검열 이어지자 게시물 70% 급감…건강한 소셜 생태계 구축 요원

  • 데이비드 밴더스키 홍콩대 중국미디어프로젝트 편집인 번역·강찬구 동아시아재단 간사 ckkang@keaf.org

    입력2014-07-14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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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의 봄’을 몰고 온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바람은 아시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권위주의에 대항해 다양한 견해를 표출하는 통로이자, 극단적 선동이 여과 없이 흘러 다니는 하수구 구실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 영문계간지 ‘글로벌아시아’는 2014년 여름호를 통해 아시아 각국의 ‘SNS 정치 현상’을 집중 해부했다. 중국의 대표적인 마이크로블로그 서비스 ‘웨이보’ 열풍과 그에 대한 중국 정부의 본격적인 제재, 일본 우익세력의 공격적인 SNS 활동, 동남아 각국에서 진행되는 ‘온라인 민주화운동’의 실체를 각각 분석한 세 편의 글을 번역, 소개한다.

    “웨이보가 곤경에 처했다.” 최근 중국의 중견 언론인들로부터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필자를 포함해 많은 이가 대략 2013년을 기점으로 그간 활동해온 블로그 서비스 ‘웨이보’를 떠나 ‘위챗’ 등 다른 단문메시지 서비스로 옮겨 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참아왔던 웨이보에 대한 중국 당국의 검열이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웨이보는 4월 미국 뉴욕 나스닥에 상장됐고, 주식시장 총액이 2억8400만 달러에 달한다. 올해 1분기 적극 사용자 수는 34%가 늘어난 1억4300만 명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듯 미디어 산업이 발전할수록 중국 정부의 공격적인 통제정책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1년 악명 높은 인터넷 통제 시스템 ‘거대 방화벽’(Great fire wall·만리장성의 영문표기 ‘Great Wall’에 빗댄 표현)을 처음 운용하면서 쓴 한 해 예산이 7억7000만 달러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젤리로 못을 박으려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터넷은 본래 압제에서 빗겨난 아이디어들이 끈질기게 꿈틀대는 곳이고, 지식경제 체제에서는 좋든 싫든 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이 ‘관념의 시장’에 오로지 공산당 목소리만 남기를 원한다. 이른바 ‘여론 계도’라고 부르는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공산당의 ‘여론 계도정책’



    웨이보 탄압…글 안 쓰고 ‘눈팅’뿐

    2009년 7월 7일 오전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우루무치 남부에서 위구르인들이 체포된 1000여 명의 위구르인 석방과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위). 2013년 1월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난팡주말’ 기자들이 정부 검열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였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정치적 안정을 위해 매체 통제가 필수라는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건에서 시작됐다. 당시 중국공산당 내 강경 보수세력은 자오쯔양 전 총서기의 언론에 대한 자유방임주의가 사태의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언론이 시위대 편을 들면서 사태가 심각해졌다는 것이다. 90년대 들어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한층 심해졌고, 가혹하기 짝이 없는 제작 지침이 내려졌다. 정부의 책임을 암시하는 표현은 어떤 경우에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경제의 성장과 함께 언론 역시 급격히 상업화하면서부터다. 정부 지원금이 줄어들자 각 매체는 광고와 판매라는 시장 경쟁에 내몰렸고, 생존을 위해 상업적 목적의 출판물을 펴내기 시작했다. 90년대 말에 이르러 탐사보도가 늘어나는 등 대중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가진 언론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후진타오 정부가 들어서면서 중국에는 수백 개의 신문과 잡지가 생겨났고 시나, 소후, 넷티즈 같은 거대 포털사이트도 탄생했다.

    2002년 후진타오 정부 출범과 함께 내세운 정책은 한마디로 ‘언론 상업화는 정부의 엄격한 계도하에 추진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실, 삶, 인민과 밀착한다는 이른바 ‘세 가지 밀착점’은 정부가 지도하는 범위 내에서 언론의 의사표현을 허용한다는 당의 입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2003년 봄 중국공산당은 2008 베이징올림픽 시점까지 ‘잘못된 언론을 바로 잡는다’는 계도정책을 발표하고, 2004년 9월에는 지역 간 교차 취재 활동을 금지하기도 했다. 명실공히 상업 언론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한 시기다.

    2007년 1월에 이르러 후진타오 주석은 공산당 지도부에 인터넷의 적극적인 ‘활용’ 및 ‘관리’를 촉구하기에 이른다. 상업적 인터넷 사이트를 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부 선전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취지였다. 각종 뉴스매체는 정부의 메시지를 증폭하는 확성기 구실을 강요받게 됐다.

    언론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2013년 1월 광저우의 한 주간지가 정부 검열에 반대하는 파업에 돌입했고, 이는 거리 시위로 번지면서 소셜미디어에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그러나 상황은 점차 악화 추세에 놓였고, 중국 내 다수의 독립적 언론인은 “진정한 보도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무력감을 호소한다. 여기까지가 지난 20년간 중국 언론이 걸어온 길이다.

    돌파구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열렸다. 언론 통제에 대한 공산당의 일관된 정책에도 2004년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블로그가 새로운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용자들이 직접 생산해낸 콘텐츠로 무장한 이들 블로그는 순식간에 대안언론 기능을 수행하게 됐고, 이는 점차 국제적인 관심을 받는다. 2005년 미국 ‘뉴욕타임스’는 “중국 지도자들이 인민들에게 인터넷을 허용함으로써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고 평했다.

    우루무치 폭동 잔해 속에서 탄생

    웨이보 탄압…글 안 쓰고 ‘눈팅’뿐

    ‘중국판 트위터’라 부르는 웨이보 메인 화면(위)과 게시글. 게시글에는 탈북자 북송을 반대하는 한국 내 움직임을 전하는 내용이 올라와 있다.

    특히 두각을 나타낸 것은 마이크로블로그였다. 모바일 기기를 이용해 짧은 내용을 실시간으로 올릴 수 있는 이들 블로그는 긴 문장을 사용하는 이전의 웹사이트보다 감시나 필터링, 통제가 훨씬 까다로웠다. 2004, 2006년 시작된 페이스북과 트위터도 이러한 추세에 기름을 부었다.

    변화가 폭발한 기점은 2009년이었다. 중동에서의 ‘트위터 혁명’ 소식이 중국에도 전파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와중에 허베이성 한 호텔 직원의 죽음이 은폐됐다는 소식이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으며 시위가 촉발됐고, 이는 수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폭동 이후 최초 72시간 동안 정부가 관영매체를 통해 내놓은 기사는 3개에 불과했지만 시위 현장에 있던 블로거 한 명이 올린 게시글은 140개에 달했다.

    2009년 7월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에서 한족과 위구르족 사이에 폭동이 일어났다. 트위터와 유튜브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퍼 나르기 시작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해진 소식은 이내 외신기사로 이어졌다. 영국 ‘데일리텔레그래프’는 ‘중국 폭동 : 트위터와 유튜브, 중국 정부의 검열을 좌절에 빠뜨리다’는 장문의 기사를 타전했다. 공산당 선전부서는 주요 언론과 뉴스 사이트에 이와 관련한 기사를 ‘관리’하라고 강제했지만, 독자들은 이미 트위터 등을 통해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동영상과 이미지로 공유하고 있었다.

    수일이 지난 후 중국의 1세대 마이크로블로그 서비스 4개 사이트가 폐쇄됐고, 8월 7일에는 중국 내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 접속이 불가능해졌다. 이렇듯 우루무치 폭동은 소셜미디어가 공산당의 여론 계도 노력을 무산시킬 수도 있다고 깨닫게 만든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 사건으로 1세대 마이크로블로그 서비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거꾸로 중국 내 소셜미디어가 새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2009년 8월 우루무치 폭동의 잔해 속에서 중국 최초의 대중 마이크로블로그 서비스인 웨이보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웨이보의 초기 성장 전략은 유명 인사를 끌어들여 사용자를 모으는 방식이었다. 웨이보 운영회사는 초기부터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하에 검색 결과를 필터링하거나 부적절한 내용을 차단해왔지만, 끊임없는 게시글과 네트워크의 강한 전염성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비스 개시 후 첫 두 달이 지나자 사용자 수는 100만 명, 8개월 뒤에는 1000만 명, 1년 뒤에는 5000만 명, 2012년 말에는 5억 명에 달했다.

    웨이보 서비스가 개시된 후 3년까지만 해도 정부 검열을 따돌리며 아이디어를 전파할 방법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유희였다. 게재하려는 텍스트를 신속히 그림 파일로 변환해 키워드 검열 시스템을 피해가는 것은 기본에 속했다. 정부 당국이 민감해하는 키워드가 확인되면 사용자들은 이를 대체할 기발한 단어를 이내 찾아냈다. 흡사 ‘발에 족쇄를 달고 춤을 추는’ 형국이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파워블로거 그룹이 형성됐다. 수백만 팔로어를 자랑하는 이들의 영향력은 상상을 불허한다. 탐사보도 기자인 왕커친의 팔로어가 25만, 리카이푸 전 구글차이나 최고경영자(CEO)의 팔로어는 3300만 명을 넘는다. 이러한 분위기가 정부 당국을 당혹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서 설명한 2013년 1월 광저우 주간지의 파업은 소셜미디어 열풍에도 분기점이 됐다. 기자들과 지지자들이 파업 과정에서 웨이보를 선전수단으로 활용하자, 정부가 이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진핑 정부 출범 첫해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웨이보를 굴복시키는 것이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블로거들을 억압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2013년 8월 미국 투자자이자 블로거인 찰스 슈가 매춘부를 모집했다는 혐의로 베이징에서 체포됐다. 그해 9월 11일 중국 최고인민법원은 마이크로블로그에 작성한 글의 조회 수가 5000건이 넘거나 500회 이상 인용된 경우, 해당 글 작성자는 명예훼손으로 기소돼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발표했다. 올해 들어서도 중국 정부의 공세는 계속됐다. 웨이보가 상장을 앞두고 있던 4월에도 한 유명 블로거가 잘못된 정보를 배포한 혐의로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웨이보 전체 사용자 중 86.9%는 게시물을 올리지 않는다. 반면 전체 게시물의 80%는 4.8%의 파워 블로거가 작성한다. 문제는 정부의 탄압이 계속되면서 이들이 점차 웨이보를 떠나고 있다는 것. 이는 공산당의 공세가 거세진 후 웨이보 게시물 수가 70% 가까이 줄어들었다는 것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경쟁력 있는 미디어 가능한가

    언론 자유를 통제하면서도 경쟁력 있는 미디어 시장을 만드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이것이 바로 중국공산당이 처한 딜레마다. 수치상으로만 보면 중국 미디어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해왔다. 2013년 말 현재 인터넷 사용 인구는 5억6400만 명에 이르고, 20년 전 수백 개에 불과하던 언론사는 2000개 가까이로 늘었다. 그러나 온라인에 남긴 말 한마디로 범죄자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건강한 소셜미디어 생태계가 구축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웨이보 탄압으로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 지식인은 이제 위챗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웨이보가 개방형 소통공간이라면 위챗은 별실에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가깝다. 대중과의 소통이 극히 어려워진 것이다. 그나마 이 공간이라도 유지되길 바라는 것이 중국 내 지식인과 언론인의 간절한 소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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