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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위험 불감 대한민국 02

요란한 비상 나팔 소리…구명보트 밑으로 신속 대피

미국 대형 여객선 출항 전 의무 비상대피훈련 실제 상황 방불

  • 포트커내버럴=신석호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kyle@donga.com

요란한 비상 나팔 소리…구명보트 밑으로 신속 대피

요란한 비상 나팔 소리…구명보트 밑으로 신속 대피
5월 5일 오후 4시 정각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 인근 커내버럴 항구에 정박해 있던 8만4000t급 크루즈 여객선 ‘디즈니 매직’에서 요란한 비상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출항을 앞두고 모든 승객과 승무원이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비상대피훈련(mandatory emergency drill)이 시작된 것이다.

승무원들의 안내에 따라 어린이와 부모 등 승객 2000여 명은 일사불란하게 객실로 돌아가 지정된 대피 장소를 확인했다. 객실 방문에는 개개인의 집합 장소와 이동 경로가 그려진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플라스틱 카드 모양의 객실 키에도 커다란 알파벳으로 자신이 가야 할 대피 장소가 찍혀 있었다.

2000여 명 일사분란한 움직임

승객은 마치 여러 차례 훈련해온 사람들처럼 4층 갑판과 공연장에 마련된 대피 장소 20곳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객실 복도에는 구명조끼를 입은 승무원들이 대피 장소를 잘 모르는 승객들에게 길 안내를 했다. 의족을 차거나 휠체어를 탄 노인 등 몸이 불편한 승객은 승무원들이 직접 대피 장소까지 안내했다.

배를 정면에서 바라볼 때 4층 오른쪽 갑판에 마련된 D구역. 노란색 구명보트 아래에는 승객 수십 명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역시 노란색 구명조끼를 입은 승무원들이 일일이 객실 번호를 부르며 출석을 확인했다. 비상 사태가 벌어지면 훈련 때와 마찬가지로 신원 확인 뒤 곧바로 구명보트에 타고 배를 탈출하게 된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훈련 분위기는 실제 상황을 방불케 했다. 기자가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자 구명조끼에 ‘집합 팀장(assembly leader)’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여성 승무원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빨리 당신의 대피 장소로 가라. 어딘지 모르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대편인 왼쪽 4층 갑판에 마련된 C구역에서도 승무원들이 승객에게 비상시 탈선 요령을 설명하고 있었다. 중간인 실내 공연장에 마련된 B구역 대피 장소에는 승객 150여 명이 의자에 앉아 구명조끼를 어떻게 조작해 몸에 맞게 착용하는지, 어떤 순서로 구명보트에 타게 되는지 설명을 듣고 있었다. 모든 승객이 한꺼번에 모이기에는 4층 야외 갑판이 비좁기 때문에 B구역 승객은 이처럼 강당에서 기다렸다가 순서에 따라 구명보트에 올라탄다.

이 배의 안전 책임자인 러시아 출신 예브게니 씨는 “배가 침몰하거나 화재가 나는 등 재난이 발생했을 때 승객이 어디로 대피해 구명보트를 타야 하는지 미리 몸에 익히게 하는 것이 훈련 목적”이라며 “국제협약에 따라 출항 전 의무적으로 훈련을 실시해야 하고 승객도 움직일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모든 훈련에 승객이 100% 참가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하지만 훈련에 참가하지 않는 승객에게는 배가 출발한 뒤 편지를 보내 훈련이 왜 필요하고 비상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설명해준다”고 말했다.

예브게니 씨를 비롯한 승무원들은 4박 5일 일정의 여행을 시작하는 첫 프로그램인 이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려고 많은 준비를 했다. 훈련 시작 30분 전부터 식당과 매점 등 배 안 모든 편의시설이 문을 닫았다. 객실 안 유선TV의 한 채널에서는 훈련 홍보영상이 계속 흘러나왔다. 실제 상황을 가정해 비상 나팔이 울린 뒤에는 엘리베이터도 정지돼 모두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승무원은 별도의 교육과 훈련

900명이 넘는 승무원은 비상 상황에서 모두 안전요원으로 변신한다. 식당 지배인으로 일하는 불가리아 출신 게오르기 테오도레스쿠 씨는 12번째인 L구역에서 승객이 탈출할 구명보트를 내리는 것이 임무다. 그는 “각종 비상 상황에서 승객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려고 일주일에 한두 번 별도의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며 “승무원 개개인에게 지급되는 비상시 행동 매뉴얼을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승객들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초등학생 딸과 아들의 봄방학을 맞아 미국 여행을 온 페루인 알도 씨는 “크루즈 여행은 이번이 처음인데 승객 안전 시스템이 철저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며 “절대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승무원도 승객도 한 달 전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 참사를 미디어를 통해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아홉 살 아들과 함께 여행을 온 미국인 캐니 씨 부부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고교생 희생자와 유가족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마음이 아프다”며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들에게는 ‘객실에 있으라’ 하고 자신들만 탈출한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범죄행위”라고 흥분했다.

4시 15분쯤 “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안내방송이 나온 뒤 승객은 모두 객실로 돌아갔다. 팽팽한 긴장감을 가라앉히려고 4시 반부터 9층 갑판에서는 승선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고, 배는 고동 소리를 울리며 항해를 시작했다. 대부분 아들딸,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배를 탄 승객은 한국의 어린이날에 시작된 4박 5일 일정의 크루즈 여행이 “철저한 안전 시스템 덕에 더 행복할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시맨십이란

선원의 안전의식…반복 훈련으로 키워야


임우선 동아일보 기자 imsun@donga.com

국내외 전문가는 한목소리로 “세월호 침몰 참사는 결국 선장과 선원의 시맨십(seamanship·뱃사람 정신) 결여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했다. 승객을 끝까지 지키고 책임져야 한다는 시맨십의 사전적 정의는 배를 모는 ‘기술’을 의미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의미가 넓어져 기술뿐 아니라 선원이 마땅히 갖춰야 할 태도와 정신까지 아우르는 표현이 됐다. 일본에서는 시맨십 조건으로 △예지력 △확실성 △신속성 △절도 △스파르타 △모험심을 꼽기도 한다. 시맨십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선원으로서 ‘배와 배에 탄 사람의 안전을 책임지려는 의식’을 의미하는 셈이다.

시맨십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인 영국 어니스트 섀클턴 경은 20세기 초 남극탐험시대의 영웅이다. 남극대륙에서 배가 난파했을 때 그는 대원 27명을 이끌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634일 동안 스스로 구조의 길을 개척해 모두 살려냈다. 하지만 세월호 선원들은 이런 시맨십이 없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을 선원 개인에게서 찾기보다 반복적인 훈련과 교육의 부재(不在)에 따른 결과라고 지적한다. 모든 사람이 리더십의 교본인 섀클턴 경 같은 높은 책임감과 고매한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은영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시험을 보면 답변할 수 있을 정도로 매뉴얼을 아는 사람이더라도 위급한 상황에서는 머리나 논리가 아닌, 몸의 반사신경대로 행동하는 게 인간 습성”이라며 “비상 매뉴얼을 몸으로 익혀 머리보다 몸이 저절로 움직이게 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간동아 938호 (p14~15)

포트커내버럴=신석호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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