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6

2014.05.07

공동체 좋은 기억 만들어야 ‘트라우마’ 극복한다

국가적 추모 노력이 국민들 ‘외상 후 성장’ 가능케 해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4-05-07 11: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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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대한민국은 온 국민이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다.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최태산 전국재난심리지원센터 연합회장의 말이다. 그는 “세월호 침몰 후 사건 당사자가 아닌 시민까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고 있다”며 “사실상 심리적 재난 상태”라고 평했다.

    최 회장만이 아니다. 상당수 전문가가 현재 대한민국이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많은 국민이 평화로운 아침 시간에 수백 명이 찬 바닷속에 수장되는 광경을 TV로 지켜봤고, 이후 이어지는 사고 수습 과정을 보며 사회 구성원에 대한 믿음과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신뢰까지 무너졌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 대다수는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과 살아남은 것에 대한 미안함에 고통스러워하는 상태다.

    일각에서는 이런 정신적 외상, 이른바 ‘트라우마’가 사회의 존립기반을 흔들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김준기 정신과전문의는 “강력한 트라우마는 세상이 안전하고 믿을 만하며 세상에는 올바른 질서와 의미가 존재한다는 신뢰감을 한순간에 철저히 파괴한다”고 했다. 트라우마를 경험하면 사람들은 첫째, ‘난 뭔가 잘못했다’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같은 책임감과 연관된 부정적 생각을 갖게 되고, 그다음으로 ‘난 모든 것을 잃었다’ ‘난 위험에 처했다’ 같은 안전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갖게 되며, 마지막으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난 힘이 없어 무기력하다’와 같이 조절감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시작돼야 하는 이유다.

    일단 정부는 피해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경기 안산시에 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를 세운다는 방침이다. 또 향후 중앙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를 설립해 PTSD 치료의 ‘컨트롤타워’로 삼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런 기관이 ‘세월호’ 생존자와 유족의 심리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사회 전반의 심리적 충격을 치유하려면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회 존립기반 흔들 재난

    2001년 ‘9·11테러’ 당시 미국 뉴욕 시 보건당국은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 등 사고 당사자와 이 사고로 심리·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일반 시민을 두 그룹으로 나눠 각각에 맞는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우리나라도 이번 사고를 계기로 일반 시민이 심리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미국 보스턴 시가 지난해 보스턴마라톤대회 테러사건 이후 ‘Boston Strong(보스턴은 강하다)’ 캠페인을 펼친 것처럼, 상처 받은 시민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슬로건을 만들어 사회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보스턴마라톤대회는 1897년부터 매년 4월 셋째 주 월요일에 열려온 보스턴 시의 축제다. 그런데 지난해 대회 도중 폭탄테러가 발생해 3명이 사망하고 183명이 다치면서 보스턴 시 전체가 큰 충격에 빠졌다.

    ‘보스턴의 힘’ 캠페인에 동참

    당시 보스턴 소재 매사추세츠종합병원에서 연수를 했던 전홍진 성균관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보스턴 시는 사건 발생 뒤 테러를 막기 위한 위기대응 체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상처 받은 사람들의 심리 치유에 힘썼다. 보스턴 시내 병원과 학교도 시민들에게 메일을 보내 상황 대처법을 일러줬다”고 밝혔다. 이후 시 전역에서 ‘Boston Strong’ 캠페인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이 슬로건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거나 차량에 같은 문구의 스티커를 붙이며 테러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올해 다시 열린 마라톤대회는 시민들이‘보스턴의 힘’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지난해 테러로 다리를 잃은 마라톤 선수가 의족을 한 채 출전하는 등 참가선수가 전년보다 약 9000명 늘고, 관람객도 오히려 크게 늘어난 것. 약 100만 명이 대회를 보기 위해 현장을 찾은 것으로 집계됐다. 전 교수는 “우리도 세월호 침몰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면 사회 구성원이 ‘우리는 이 상처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는 희망을 갖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참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철저히 기록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미국 오클라호마 시에는 1995년 발생한 폭탄테러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다. 당시 테러리스트의 폭탄 공격으로 연방청사 건물이 무너지면서 168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쳤다. 바로 그 자리에 세운 국립 추모 박물관 입구에는 테러 발생 직전 시각인 오전 9시 1분을, 출구에는 폭발 후 건물이 무너져 내린 시각인 오전 9시 3분이 새겨져 있다. 이외에도 희생자를 위한 빈 의자 168개를 배치하는 등 건물 전체를 기억과 추모의 공간으로 꾸몄다.

    우지연 박사는 논문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공간의 가치와 디자인접근에 관한 연구’에서 이 기념관을 “폭파 당시 무너져 철골이 드러난 벽과 잔해를 그대로 보존해 방문객에게 리얼한 현장감을 전달한다”고 묘사하며, “무엇보다 가장 강렬한 보존요소는 ‘살아남은 나무’라 불리는 폭파 당시 잿더미 같았던 느릅나무로, 당시 반쯤 타버렸던 것이 세월이 지나 무성해져서 회복의 살아 있는 상징이 됐고, 방문객들은 살아남은 이 나무 그늘에 모여 가이드로부터 슬픔과 회복에 대한 치유의 메시지를 듣는다”고 소개했다.

    미국 뉴욕 시도 9·11테러 현장에 기념관을 건립하고, 매년 그곳에서 추모행사를 연다. 당시 무너진 쌍둥이 건물을 기념하는 사우스 메모리얼 풀(South Memorial Pool)과 노스 메모리얼 풀(North Memorial Pool) 등 연못 2개도 조성해 벽면을 희생자 2983명의 이름을 새긴 동판으로 꾸몄다.

    반면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화재 등 대형 재난이 빈발한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런 공간이 없다. 2003년 2월 시민 192명이 사망한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는 여전히 화염에 녹아내린 물품 보관함과 공중전화기, 검게 그을린 벽면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지만 가림막을 설치해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대구시와 유족의 의견이 엇갈려 추모사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참사는 반복되고 시민들은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신적 외상이 꼭 부적응, 즉 PTSD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심리적 고통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긍정적 변화를 얻는, 이른바 ‘외상 후 성장(PTG·Post Traumatic Growth)’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 칼럼에서 “1000명 이상이 사망했던 엘살바도르 대지진 피난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스케스의 연구에 의하면 피난민의 절반 이상이 사건 이후 흔히 생각하는 외상 후 장애가 아니라 도리어 긍정적인 심리적 변화를 경험했다. (중략) 개인이 외상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내면의 강점과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고 이로 인해 앞으로의 다양한 상황에 대해 자신감을 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공동체 좋은 기억 만들어야 ‘트라우마’ 극복한다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세월호 침몰 사고 합동분향소에 많은 시민이 찾아와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계기

    이런 PTG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 등 대형 재난 상황을 분석한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쓴 미국 저널리스트 레베카 솔닛은 “재난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존하거나 이웃을 구하기 위해 용감하고 이타적인 행동을 하도록 한다”며 이처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해 서로를 돕는 과정에서 우리는 “잊고 지내던 유토피아를 떠올리고 강렬한 기쁨을 체험한다”고 주장했다. 재난이 인간의 이기주의를 극대화해 파괴와 약탈, 살인 및 폭동을 유발할 것이라는 그간의 편견을 깨고 오히려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논증한 이 책은 2009년 출간 당시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언론으로부터 ‘최고의 책’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이후 전남 진도를 찾은 자원봉사자 수는 연인원 1만 명을 돌파했다. 이들은 희생자 가족을 위한 요리와 세탁부터 청소, 휴대전화 충전까지 온갖 일을 도맡아하며 참사 현장을 지키고 있다. 수많은 희생자 가족이 보름 넘게 사실상 노숙을 하고 있음에도 현장에서는 어떤 강력범죄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전국 각지 분향소에도 조문객과 자원봉사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목격하며 시민들은 붕괴한 국가 안전 시스템을 지탱하는 힘이 우리 사회의 공동체 문화와 시민정신임을 새삼 깨닫고 있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마틴 셀리그만 교수는 저서 ‘플로리시(Flourish)’에서 “나를 죽이지 못한 모든 것은 결국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철학자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극심한 역경을 겪은 후 상당히 많은 사람이 종종 PTSD 수준에 달하는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증을 보이지만 그런 다음에 그들은 성장한다. 장기적으로 그들의 심리적 기능 수준은 전보다 더욱 높아진다”고 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기는 우리가 매우 불편하고 불행하고 불만족스러울 때 온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우리 사회도 세월호 침몰로 인한 이 거대한 고통을 겪어내면서 그동안 쌓였던 각종 문제를 치유하고, 끝내 더욱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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