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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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뜻’ 앞세운 구원 혹은 폭력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노아’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4-03-24 10: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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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뜻’ 앞세운 구원 혹은 폭력
    세상은 ‘신의 뜻’으로 사는 자와 ‘인간의 뜻’으로 사는 자로 나뉘었다. 각각 선한 자와 타락한 자이고,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이며, 살아남을 자와 죽어 없어질 자다. ‘셋의 후손’과 ‘카인의 후예’다. 신의 뜻으로 사는 자이자 셋의 후손인 노아(러셀 크로 분)가 보는 세상은 이토록 명확하다. 타락한 인간 세상을 물로 쓸어 없애겠다는, 그러하니 대홍수를 예비하라는 신의 계시 앞에서 노아는 번민에 휩싸인다. 방주에는 정말 인간 자리가 없단 말인가.

    방주가 만들어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씻을 수 없는 죄 속에 살던 카인의 후예는 배에 오르려고 개미떼처럼 모여든다. 방주를 방어하는 신의 대리인은 배에 오르려는 인간을 짓밟아 뭉개고, 내팽개친다. 살육과 학살이다.

    ‘블랙 스완’으로 유명한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신작 ‘노아’는 ‘노아의 방주’ 신화를 영상으로 옮긴 작품이다. 창세기부터 내려오는 성서 역사를 담아내려는 거대한 야심, 그리고 대규모 물량을 동원해 구현한 스펙터클에 일단 눈이 간다. 드라마는 선민사상과 남성 우위, 장자 계승 등 성서의 근간이 되는 모티프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노아 이야기에 상상을 보태고 인간적인 색을 덧입혀 재구성했다.

    금지된 과실을 탐한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 내려온 아담은 카인과 아벨, 셋을 낳았고,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타락한다. 카인의 후예는 타락한 세상을 이루고, 셋으로부터 내려온 노아 가족은 카인의 후예와 섞이지 않은 채 신의 뜻을 구하며 살고 있다. 노아는 꿈과 환영으로 나타난 신의 계시를 조부 므두셀라(앤서니 홉킨스 분)의 도움으로 해석하고, 타락한 인간을 멸망시키면서 세상을 씻을 ‘대홍수’를 예비한다. 거대한 방주를 지어 인간을 제외한 세상 모든 생명체를 실어 구하는 것이다.

    꿈에 나타난 계시의 의미를 묻는 것에서 시작한 노아의 고뇌는 절도와 간음, 살인 등으로 가득 찬 타락한 인간성에 대한 절망을 거쳐 신의 사명을 받은 자로서의 자기 운명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진다.



    노아 반대편에 선 자, 타락한 인간의 우두머리인 카인의 후예 두발가인(레이 윈스턴 분)은 “신은 우리에게 노동을 해 먹고살게 하셨고,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냐”며 “신은 왜 우리 인간을 버리려 하느냐”고 반문한다. 인간의 뜻으로 사는 두발가인은 완성된 방주를 빼앗으려 타락한 모든 사람을 동원해 공격한다. 하지만 노아를 돕는 거대한 바위인간 ‘감시자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영화는 상상을 보태 성서 속 이야기를 재구성했지만 신의 뜻을 따른 노아의 구원과 인간의 뜻을 좇아 타락한 자의 절멸이라는 결론에는 손대지 않았다. 그리하여 ‘노아’는 선택받은 소수의 백성을 위해 모든 인류가 ‘신의 뜻’으로 학살당하는 이야기가 된다. 구원과 학살을 가르는 것은 선악이나 윤리 문제가 아니라, 그저 묻지도 따질 수도 없는 ‘신의 뜻’일 뿐이다. 이 영화를 통해 모든 종교적 근본주의가 품고 있는 ‘신의 뜻’이라는 이름의, 타자를 향한 폭력과 배제의 욕망을 보는 건 ‘오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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