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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국수와 살다

‘한 그릇’으로 마음 通했다

한국 문학 속 국수는 질긴 생명력과 삶을 위로한 음식

  • 소래섭 울산대 국문과 교수 letsbe27@ulsan.ac.kr

‘한 그릇’으로 마음 通했다

‘한 그릇’으로 마음 通했다

대한적십자사 수요봉사회가 5월 15일 서울 강북구 번리공원에서 사랑의 국수나눔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 국수는 본디 세상을 잔칫집처럼 넉넉하고 든든하게 만드는 음식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국수를 이야기하자면 시인 백석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음식에 관한 시를 여러 편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것이 ‘국수’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매혹적인 것은 국수의 맛과 의미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국수는 물론, 음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 작품에 담겼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굳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국수’ 중에서)

이 작품에서 국수는 봄비와 여름 볕, 구시월 갈바람 등의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과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국수를 만드는 마을은 성탄절을 맞아 선물받을 생각에 들뜬 아이처럼 즐거움에 휩싸인다. 또 백석은 국수가 아득한 옛날부터 때가 되면 어김없이 마을을 찾아오는, 마을 사람과 친한 존재라고 말한다.

음식에 대한 마음 헤아린 시인 백석

백석이 국수를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그리는 것은 그가 국수에서 그것을 만든 사람의 마음을 음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수에는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맛뿐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의 ‘고담하고 소박한’ 마음의 맛이 담겨 있다. 요즘 사람은 대개 음식을 먹으며 맛이나 영양소에 대해서만 생각하지만, 백석은 음식에 담긴 마음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헤아리는 데 집중한다.



물론 마음이 담길 수 있는 음식이 국수만은 아니므로, 백석은 다른 음식을 통해서도 여러 마음의 맛을 발견해낸다. 그런데 특히 국수에 애착을 느꼈던 듯하다. 백석 시에는 국수가 자주 등장하고, 심지어 ‘메밀국수 연작’이라고 부를 만한 작품도 있다. 원제는 ‘산중음(山中吟)’ 연작으로, 함경도를 여행한 후에 발표한 기행시인데, 연작 4편 중 3편에 메밀국수가 등장한다. 특히 울림이 큰 것이 ‘산숙(山宿)’이라는 작품이다.

‘여인숙이라도 국숫집이다/ 모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여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골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산숙’)

그는 여행 중 국숫집을 겸하는 여인숙에 묵었던 모양이다. 국수를 만드는 분틀과 함께 누워 때 묻은 목침들을 바라보며 그 방에서 묵었을 수많은 사람을 떠올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국수 가닥처럼 그의 생각은 그 방에 묵었을 사람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들로 이어진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국수 가닥처럼, 얼굴과 생업과 마음도 긴 역사를 관통해 지속된다.

어쩌면 역사를 지탱하는 것은 그렇게 가느다랗고 사소한 것들일 터이다. 산골 벽지를 오가며 좁은 여인숙 방의 목침에 때를 남긴 사람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 사람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도 언젠가는 죽고, 휘황찬란한 건축물도 끝내는 퇴색하지만, 얼굴과 생업과 마음만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지나도록 유전해 내려간다. 사소하지만 질긴 것의 생명력, 백석이 국수에 그토록 애착을 보였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백석이 말한 국수는 이북식 냉면이다. 냉면이 본래 요즘 같은 한겨울에 먹는 음식이라지만, 역시 이런 계절에는 뜨끈한 멸치국물을 우려낸 잔치국수가 제격이다. 잔치국수는 말 그대로 잔치 때 먹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비빔국수와 짝을 이루자면 물국수쯤으로 불러야 마땅할 테지만,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잔치국수라는 명칭을 더 선호한다. 김종해 시인의 ‘잔치국수’라는 시를 보면 왜 그러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을 잔칫집 만드는 잔치국수

‘어머니 손맛이 밴 잔치국수를 찾아/ 이즈음도 재래시장 곳곳을 뒤진다/ 굶을 때가 많았던 어린 시절/ 그릇에 담긴 국수면발과/ 가득 찬 멸치육수까지 다 마시면/ 어느새 배부르고 든든한 잔치국수/ 굶어본 사람은 안다/ 잔치국수 한 그릇을 먹으면/ 잔칫집보다 넉넉하고 든든하다/ 잔치국수 한 그릇은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잔치국수’ 중에서)

국수는 잔치음식이기도 하지만, 한때는 쌀밥 대용품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파스타가 17세기 출현한 압착기 덕분에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서민음식으로 각광받았던 것처럼, 잔치국수 또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서민음식으로 자리 잡게 됐다. 그래서 지금도 중·장년층에게 국수는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음식이다.

어린 시절 질리게 먹던 음식에 대한 반응은 두 패로 나뉜다. 어떤 이는 질색하면서 거들떠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반면 어떤 이는 중독되기라도 한 듯 예전 맛을 찾아 곳곳을 떠돌기도 한다. 김종해 시인은 후자였던 모양이다. 백석에게 국수가 마을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처럼, 김종해 시인에게 국수는 어머니 손맛을 기억해낼 수 있는 음식이다. 그래서 그에게 잔치국수는 잔치 때 먹는 음식이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잔치국수가 물국수가 아니라 여전히 잔치국수로 불려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를 잔칫집처럼 넉넉하고 든든하게 만드는 음식, 나아가 세상을 잔칫집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물국수보다 잔치국수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여럿이 함께 잔치국수를 먹으며 백석처럼 ‘아, 이 반가운 무엇인가’라고 노래할 수 있다면 국수 한 그릇으로 세상이 잔칫집으로 변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살짝 귀띔하자면, 국수 한 그릇으로 세상을 잔칫집으로 만드는 더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 있다. 이상국 시인의 ‘국수가 먹고 싶다’라는 작품에 그 방법이 소개돼 있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국수가 먹고 싶다’ 중에서)

이 작품에서 방점이 찍혀야 할 것은 ‘사람들과’와 ‘따뜻한’이라는 말이다. 국수 한 그릇으로 혼자서도 넉넉해질 수 있겠지만, 세상을 잔칫집처럼 만들려면 가급적 여러 사람과 함께 먹는 것이 좋겠다. 특히 잔칫집 같은 세상에서 자기만 홀로 버려졌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둥글고 기다란 면발을 함께 나눠먹을 동료를 구하는 것이 좋겠다. 그 둥근 면발이 삶의 모서리에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끊어진 마음을 다시 기다랗게 이어줄 것이다.

본래 국수는 그런 음식이었다. 혼자서는 잔치를 벌일 수 없듯이, 잔치국수는 잔치 때처럼 여럿이 함께 먹어야 제맛이다. 백석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과 살뜰하게 친하고, 사람들을 서로 살뜰하게 친하게 만드는 것이 국수였다. 그런 국수를 이상국 시인은 ‘따뜻한 국수’라고 말한다. 물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만이 따뜻한 국수일 리 없다. 차갑고 매콤한 비빔국수도 사람들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따뜻할 수 있다. 국수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울고 싶은 사람을 헤아리는 마음, 다른 사람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따뜻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잔칫집일 때도 국수는 필요하고, 세상을 잔칫집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국수는 요긴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국수가 먹고 싶다고 말한다.



주간동아 918호 (p42~43)

소래섭 울산대 국문과 교수 letsbe27@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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