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7

2013.12.16

최강 조직력과 스피드 얕보다 큰코다친다

러시아

  • 이해구 러시아 축구 전문가 email@address

    입력2013-12-16 09: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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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한국 축구팬과 전문가는 강호 벨기에는 이기기 힘들겠지만, 러시아와 알제리를 제물삼아 한국이 브라질월드컵에서도 16강에 무난히 진출할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수년간 생활하며 직접 러시아 축구를 경험하고 꾸준히 관찰해온 필자 생각은 좀 다르다. 먼저 러시아가 아시아지역 예선보다 훨씬 까다로운 유럽지역 예선을 조 1위로, 그것도 호날두, 나니 등이 버틴 포르투갈을 플레이오프로 밀어제치고 본선에 진출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결과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포르투갈, 북아일랜드, 이스라엘 등 만만치 않은 팀을 상대로 한 예선전 총 10경기에서 20골을 득점했고 실점은 5골에 불과했다. 경기당 평균 2골 득점과 0.5골 실점은 골 결정력과 단단한 수비력을 동시에 갖췄다는 것을 증명한다. 얼마 전 러시아와의 평가전에서 한국 팀이 패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패했어도 경기 내용은 좋았다고 자위하지만, 그날 러시아는 1.5군 전력으로 나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 러시아를 얕잡아보는 가장 큰 이유는 순수 국내파 선수로만 이뤄진 팀이라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 팀은 따지고 보면 우리 해외파보다 더 비중 있는 선수가 많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에서 주전으로 뛰었던 안드레이 아르샤빈(32), 토트넘 공격수였던 로만 파블류첸코(32), 레딩 공격수 파벨 포그레브냑(30)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탈리아 명장 파비오 카펠로(67) 감독이 우리와의 평가전에서 고의적으로 그들을 제외했을 뿐이다. 장시간 이동해 시간, 체력 등에서 문제가 되는 해외파에 의존하지 않고 언제나 빠른 시간 안에 소집 가능한 국내파를 통해 조직력을 극대화한 것.

    러시아 프로리그는 세계 수준

    카펠로 감독이 이런 결정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러시아 국내 리그 수준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한마디로 러시아 국내 리그는 우리 K리그와는 여러 면에서 차원이 다르다. 먼저 선수 연봉부터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는 선수 평균 연봉이 1억4609만 원이며 데얀, 김정우 등이 받는 최고 연봉은 15억 원, 가장 부자구단인 수원의 팀 연봉은 90억 원이다.



    그런데 러시아 국내 리그는 선수 평균 연봉이 150만 달러로 영국 프리미어리그(186만 달러)와 별 차이가 없다. 첼시 소속인 섀뮤얼 에투(32)가 받았던 프리미어리그 최고 연봉은 2000만 유로, 유리 지르코프(30)가 받은 러시아 선수 최고 연봉은 500만 유로에 이른다. 에투의 친정팀이자 히딩크가 감독을 맡고 있어 홍명보 감독이 코치연수를 다녀왔던 안지는 현재 최하위 팀이지만 팀 연봉은 5000만 달러, 팀 인프라 투자비는 2억 달러에 이른다. 러시아 국가대표팀에서 주류를 이루는 러시아 국내 리그 1위 팀 제니트 선수들의 평균 연봉은 약 300만 유로다.

    연봉 수준만 높은 게 아니다. 웬만한 유럽 상위권 팀도 무시하지 못할 경기력을 갖춰 매년 유럽 리그에서 복병 노릇을 톡톡히 한다. 거기에 축구팬들의 응원과 국내 리그에 대한 사랑은 가히 광적이다. 결국 거액의 유혹이 없는 한 굳이 몸과 마음이 모두 고생스러운 해외 진출을 노릴 필요가 없어 우수한 선수 대부분이 국내 리그에 남는다. 심지어 해외로 떠났던 국내파가 국내로 귀환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예를 들어 현재 러시아 국가대표팀 최종 공격수인 알렉산데르 케르자코프(30)는 스페인 리그 3위 팀인 세비야, 미드필더 지르코프는 프리미어리그 첼시에서 뛰었던 선수지만 모두 고국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러시아 국가대표팀이 순수 국내파로 유럽 예선을 통과했다는 사실은 전혀 감탄할 만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탄탄한 국내 리그 실력을 믿고 그 장점을 최대화한 카펠로 감독의 탁월한 선택에서 비롯한 당연지사라 볼 수 있다.

    다양한 전략 구사 카펠로 감독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화려한 개인기를 자랑하는 팀은 아니지만, 세계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 튼튼한 기초 실력과 체력, 조직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12년간이나 유럽 예선에서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해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해왔다. 전문가들은 그 가장 큰 이유가 국가대표팀을 월드컵 예선을 위해 급조한 탓에 조직력을 살리지 못하고 정신력이 와해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카펠로 감독은 바로 이런 문제를 ‘순수 국내파 팀’이라는 전략을 통해 극복하고 유럽에서 조직력이 가장 좋은 팀으로 만들었다. 먼저 포백을 사용하는 협력 수비는 그야말로 세계적 수준이다. 포르투갈 호날두, 브라질 네이마르가 러시아전에서는 화려한 개인기를 보일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러시아 수비가 사전에 이들에게 가는 패스 길을 차단해 고립시켰고, 패스가 가더라도 순간적으로 수비라인을 올려 만들어내는 오프사이드에 이들이 번번이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양쪽 측면 수비인 드미트리 콤바로프(26), 알렉세이 코즐로프(27)는 뛰어난 스피드와 균형감각으로 상대방 윙 플레이를 차단했고, 중앙 수비인 알렉세이 베레주츠키(31)와 세르게이 이그나셰비치(34)는 오랜 경험과 높은 키로 수비를 노련하게 주도했다. 러시아 수비의 단 한 가지 약점은 종종 실점의 원인이 되곤 하는 중앙 수비수들의 느린 발이었다. 그런데 최근 카펠로 감독은 좀 더 젊고 빠른 블라디미르 그라나트(26), 예브게니 마케예프(24)라는 대체 선수까지 발굴해 조직력과 속도를 겸비한, 말 그대로 철옹성 수비진을 구축했다.

    한편 미드필더를 포함한 공격진도 골 대부분을 서너 번의 원터치 패스로 만들어낼 만큼 뛰어난 조직력을 갖췄다. 포르투갈, 브라질 등과의 경기에서 케르자코프와 알렉산데르 코코린(22)이 넣은 골이 모두 원터치 패스에 의한 기습 공격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무엇보다 가공할 만한 장점은 공격수들의 고른 득점력이다. 월드컵 유럽 조 예선 10경기에서 넣은 20골 가운데 센터포드 케르자코프가 5골, 처진 공격수인 신예 코코린이 4골, 미드필더 빅토르 파이즐린(27)과 로만 시로코프(32)가 각각 3골, 역시 미더필더인 데니스 글루샤코프(26)와 알렉산데르 사메도프(29)가 각 2골, 그리고 수비수인 베레주츠키가 1골을 넣었다. 한마디로 누구나 골을 넣을 능력을 갖춘 셈이다.

    최종 공격수 케르자코프는 강력한 순간 파워와 어디서든 슛을 날릴 수 있는 기량을 가졌으며, 22세 신예 공격수 코코린은 높이와 개인기, 골 결정력을 모두 갖춰 카펠로 감독이 “2014년 월드컵의 떠오르는 스타이자 2018년 월드컵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정도다. 여기에 엄청난 스피드를 자랑하며 수시로 상대 측면을 뚫는 오른쪽 윙 블라디미르 비스트로프(29), 엄청난 활동량으로 공수 연결을 담당하는 글루샤코프, 뛰어난 개인기를 갖춘 미드필더 사메토프, 마지막으로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중앙 미드필더 시로코프 등 현재 러시아 국가대표팀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앙상블을 만들어낸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상대팀에 따라 적재적소에 선수를 배치하고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지장 카펠로 감독이 있다.

    그럼에도 모든 스포츠 경기는 상대적이다. 결국 우리 국가대표팀이 스피드와 조직력을 앞세운 러시아 국가대표팀을 압도할 정도의 조직력을 남은 준비 기간 얼마나 만들어낼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러시아의 철옹 수비력을 교란할 포메이션을 어떻게 꾸밀지도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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