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6

2013.12.09

북쪽에서 소리 없이 내려온 손님

가는털백미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ymlee99@forest.go.kr

    입력2013-12-09 13: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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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에서 소리 없이 내려온 손님
    우리 같은 산림생물 연구자는 이즈음이 아주 중요한 시기다. 한 해 동안 산과 들로 다니며 혹은 실험실에서 땀 흘리며 노력한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분석해 평가받고, 이를 기반으로 다시 내년의 연구 계획을 마련하는 일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국립수목원에서 멸종 직전 식물을 증식해 복원하는 일, 새로운 생물을 찾아내는 일, 식물종의 주권을 찾고자 오래된 문헌이나 표본과 씨름하는 일 등 수많은 성과를 만드는 과정에서 문득 가는털백미라는 다소 낯선 이름의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식물은 몇 해 전 강화도 바닷가에서 발견됐다. 가는털백미는 좀박주가리라고도 하는데, 박주가리보다 백미꽃 집안에 속하는 식물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분포지역은 몽골과 만주 일대, 평안남도 지역까지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에 좀 더 남쪽인 강화도에서 발견됨으로써 분포 지역이 더 넓어졌다. 원래 북부지방 식물이니 본 사람도 없고, 기록으로 접하기도 어렵던 식물이 남한 바닷가에서 발견됐다며 언론을 타기도 했다. 처음 발견 당시에는 50m2(15평) 남짓한 곳에 100여 개체가 아주 작은 집단을 이룬 모습만 확인됐다. 이 발견으로 가는털백미의 남쪽 분포 근거가 더 튼실해졌으며, 특히 남한 내에서 어떻게 보전할지에 대한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식물을 공부하다 보면 식물이 사람보다 낫구나 싶은 순간이 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 작은 욕심을 버리고 큰 세상을 엮어내는 틀…. 가는털백미가 우리 땅에 사는 모습도 그러하다. 기후 변화에 따라 식물의 분포 한계가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거꾸로 남쪽에 새로운 분포를 만드는 일도 그렇고, 사람은 경계를 만들어 이리도 엄정하게 대치하는데 낯선 땅에 와서 자유롭게 자리 잡아 잘 살아가는 모습도 그렇다. 누가 보든 말든 서쪽 바닷가에서 맑은 꽃을 피우는 의연함도 돋보인다. 이 가녀리고 고운 꽃송이의 의연함을 보면서 문득 동동거리고 쟁쟁거리는 우리 일상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꽃은 언제나 참으로 장하다.

    가는털백미는 여름이 시작할 무렵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해 여름내 볼 수 있다. 순백의 아름다운 꽃이 피는데, 자세히 보면 수술과 암술이 약간 뒤틀려 발달하는 꽃잎 모양이 개성 있다. 심장형의 마주 달리는 잎 모양도 귀엽고, 덩굴식물이라 마음대로 모양을 만들어 키울 수 있는 장점도 지닌다. 식물 전체가 예부터 감기와 오한 치료를 위한 약용으로 쓰였다.

    한 해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다. 후회도 많은 열한 달이었겠지만, 이 흰 꽃의 맑음과 의연함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갈무리를 잘하는 연말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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