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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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비둘기 두 마리가 내려온 이유

삶에서 보석 같은 우연

  • 마야 최 심리상담가 juspeace3000@naver.com

    입력2013-11-11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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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비둘기 두 마리가 내려온 이유
    가슴 아픈 이를 상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슴속에 어떤 상처가 상흔으로 자리 잡았는지 알아야 하고, 그것을 발견해낸 뒤에도 그 상흔을 어떤 식으로 감싸줄 것인지는 내담자 각각의 성향과 배경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직조된 직물을 짜는 것 같은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성자(28·가명) 씨가 찾아온 때는 쌀쌀한 가을, 노란 은행잎이 황금융단처럼 거리에 깔렸을 즈음이었다. 단조로운 색상으로 차려입은 옷이 시크한 멋을 발산해 그가 상담실에 들어온 순간을 선명히 기억한다. 우울함이 깃든 듯한 얼굴과는 반대로 목소리는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소년 같았다. 그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이 그의 외모에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더했다. 왠지 그가 영화에서 툭 튀어나온 캐릭터 같았기에 상담하는 동안 나는 그를 닮은 영화배우가 누구였더라 하는 생뚱맞은 사념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선생님, 저는 누가 저를 죽이려는 것 같아요. 실제로 죽이는 거 말고요. 그냥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죽이려는 것 같아요.”

    “그럼 누가 죽이려는지 알겠어요?”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전 그냥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는데, 자꾸만 동아리 홈페이지에 저를 비방하는 포스팅이 올라와요. 처음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는데, 지속되니까 저랑 친했던 친구들까지 저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했어요. 저는 해명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왠지 변명 같고 신뢰를 더 못 준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비방이 너무 지나치니까, 해명하지 않는 제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겐 그 비방 내용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나 봐요.”



    청년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떨렸다. 요즘 해결책을 빨리 찾아야 하는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왕따’다. ‘이지메’라고도 부르는 이 현상은 이제 학교를 넘어 어른들의 장인 직장, 동아리, 심지어 노인정 등 사람이 모여 군집을 이룬 집단이라면 어디서든 발생한다.

    근거 없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청년

    이씨를 안정시키고 구체적으로 어떤 비방이 있었는지 들어봤다. 비방은 극히 개인적인 것과 그의 사회생활, 인간관계, 나아가 가족 관련 내용까지 포함됐다. 듣고 있기 민망한 수준의 싸구려 작화가 난무했지만, 인간은 극히 쉽게 세뇌당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씨의 정신상태가 무간지옥과 같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씨가 돌아간 뒤 이씨의 상담 방향을 잡아야 했다. 보통 심리상담이라고 하면 개인문제를 사적인 돌파구를 통해 해결한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씨처럼 개인문제가 사회문제와 긴밀히 연관된 경우 상담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자폐아를 둔 부모의 상담이나,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의 상담처럼 말이다.

    이씨를 더 잘 이해하려고 이씨에게 그가 속한 동아리 홈페이지를 보여달라고 했다. 이씨를 비방하는 포스팅들을 꼼꼼히 읽고 그 밑의 댓글도 놓치지 않고 다 읽은 뒤 나는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사람은 성인이 될 수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괴물도 될 수 있는 존재다. 신이 있다면 신은 우리가 마음속에 가진 이 두 마음을 잘 다스리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만약 인간에게 하나의 마음만 넣어줬다면 세상은 정말 밋밋해졌을 테니까. 작전을 짜야 했다. 청년을 그냥 두면 분명 그 안에서 말라죽거나 악다구니가 될 것이 빤했다. 그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주고, 그런 현상을 방치하는 사회는 바꿔야 하는 것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알고도 모른 척하는 가장 큰 죄다. 청년의 마음은 널뛰기를 했다. 자신감이 높아지면 마음도 밝아졌다. 자신감을 잃으면 마음도 어두워졌다. 그 고통은 당해본 사람만 알 것이다.

    청년에게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이야기가 살아 움직였고, 또 어떤 날은 차디찬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청년의 마음에 따라 내 마음은 포근한 봄날 같기도 하고, 또 소나기 퍼붓는 곳에 홀로 서서 축축이 젖기도 했다. 상담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청년이 말했다.

    “선생님, 그래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요. 제가 이렇게 노력해도 세상은 여전히 차고 어둡고 무서워요. 희망이 없어요.”

    청년에게 어떤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세상이 차갑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청년이 돌아간 후 집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홀로 자주 찾는 찻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내가 가면 늘 앉는 야외 테라스 자리가 있다. 찻집 내부는 인테리어가 굉장히 독특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야외 테라스는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한 분위기를 띤다. 찻집 주인은 나이를 먹어서도 저렇게 매력적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아한 여인인데,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60세는 넘은 듯한데 목소리나 외모는 40대로 보였다. 차를 시키고 앉아 있는 나에게 여주인이 말을 걸었다.

    “여기 자주 오시는데, 제가 인사가 없었네요. 잘 지내시죠?”

    여주인의 목소리는 어머니 목소리 같기도 하고 언니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런 편안함과 향수가 그의 목소리에 있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인은 내게 묻지도 않고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나는 조금 불편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호기심도 일었다. 여주인은 멀리 시선을 둔 채 차근차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찻집에서 발견한 삶의 빛

    흰 비둘기 두 마리가 내려온 이유
    “오늘은 제 딸이 결혼하는 날이에요. 딸은 멀리 아프리카에 있어요. 오늘 하루 종일 결혼식은 어떻게 했을까, 우리 딸은 얼마나 예뻤을까, 내가 없어서 혹여 딸에게 무슨 흠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많았어요. 그런 생각을 하느라 손님들에게 신경을 많이 못 썼죠. 그런데 계산을 마치고 나가던 한 단골손님이 다시 들어와서는 제게 떡을 주시는 거예요. 집에서 만들었다면서요. 감사히 받았는데, 그분이 제 손을 꼭 잡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너무 걱정 마세요. 너무 슬퍼도 마세요. 모두 괜찮을 겁니다.’ 뜬금없는 그분의 말에 저는 엉겁결에 허리를 숙여 인사했죠. 바람처럼 들어와 떡을 건네주고 또 바람처럼 사라진 그분의 뒷모습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하얀 비둘기 두 마리가 마당에 내려앉는 거예요. 그 순간 비둘기 두 마리가 저와 제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둘기들은 서로 마주보고 구구거리다 정원을 이리저리 뒤뚱거리며 걸었어요. 그러다 작은 비둘기가 휙 날아오르고 남은 한 마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자신도 날아올랐죠. 바로 저기예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봤다. 그런데 그곳에서 청년이 내게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청년은 길을 걷다 우연히 나를 보고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청년에게 미소 지으며 차 한 잔을 더 시켰다. 세상이 아무리 불공평하고 어두워도 가끔은 보석 같은 우연이 우리의 삶을 빛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청년은 간혹 흔들리긴 했지만 꿋꿋이 자신을 지켜나갔고,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기보다 그들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그 후 한 사람의 힘이 무슨 변화를 가져올까 회의가 들 때마다 나는 찻집 여주인과 흰 비둘기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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