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2

2013.11.11

미인의 향수 냄새 천 리를 가네

백서향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ymlee99@forest.go.kr

    입력2013-11-11 09: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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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는 향기로 한몫하는 식물이 많다. 은은히 퍼지는 수선화의 향기, 발끝에 묻어 그 향이 백 리를 가는 백리향…. 그런데 백리향보다 더 진한 향기로 천리향이란 별명을 가진 꽃나무가 있다. 바로 백서향이다.

    백서향은 팥꽃나뭇과에 속하는 상록수로 잎은 넓지만 키는 작다. 그윽한 꽃향기와 함께 순백의 꽃송이, 반질반질하고 늘 푸른 잎사귀, 오래도록 달리는 붉은 열매 등 정원 한쪽에 심어놓고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꽃나무다.

    원래 백서향이 사는 곳은 전남 맥도와 흑산도, 경남 거제도, 그리고 제주에서 바다가 가까운 숲이다. 상록수이지만 추운 곳에서는 겨울을 나지 못한다. 그래서 백서향의 꽃향기와 자태에 매료된 사람은 화분에 심어놓고 즐긴다. 더 탐스러운 꽃과 열매를 얻으려고 품종개량도 계속하고 있다.

    남쪽에선 겨울이 다 가기 전 꽃망울을 맺기 시작해 봄인가 싶으면 벌써 활짝 핀다. 어른 손가락 길이쯤 되는 길쭉한 잎은 늘 푸르게 반질거리고 가지 끝에서 돌려가며 아주 촘촘히 자란다. 그 사이로 백색의 작은 꽃들이 둥글게 모여 달려 마치 신부의 부케를 보는 듯하다.

    백서향의 꽃은 언뜻 통꽃 같지만 사실 이 나무의 꽃잎은 퇴화하고 꽃받침 잎이 꽃잎처럼 보이는 것이다. 백서향은 꽃을 일찍 피운 만큼 열매도 일찌감치 만든다. 다른 식물들이 꽃피우기에 열중할 5~6월이 되면 꽃이 있던 자리에 붉고 둥근 열매가 달린다. 열매조차 아름답다. 하지만 앵두처럼 열리는 이 열매를 먹음직스럽다고 해서 덥석 먹었다간 큰일이 날 수도 있다. 독성분을 지녔기 때문이다.



    백서향 뿌리는 사촌인 서향과 함께 지혈제, 백일해 치료제, 가래 제거제로 사용되고 강심제와 타박상 치료제로도 쓰인다. 워낙 희귀한 데다 보고 즐기기에도 아까워 손을 대기가 쉽지 않다. 각 섬에 자생하는 백서향은 개량해서 키우는 나무들로, 실제 멸절한 곳이 있을 만큼 귀하다. 제주 천제연폭포 주변에는 증식해둔 나무들을 심어 복원했을 정도다.

    서향은 원래 중국이 고향으로,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보면 고려시대쯤 우리나라에 들어온 듯하다. 강희안은 “한 송이가 겨우 피어 한 뜰에 가득하더니 꽃이 만발해 그 향기가 수십 리에 미친다. 꽃이 지고 앵두 같은 열매가 푸른 잎사귀 사이로 반짝이는 것은 한가한 중에 좋은 벗이로다”라고 칭찬한다.

    게다가 서향은 꽃 가운데 가장 상서로운 행운의 꽃인 화적(花賊), 즉 꽃들의 적이라고도 불린다. 서향의 향기는 밤길에서도 서향인 줄 알고, 잠을 자다가도 알 수 있을 만하다고 해서 수향(睡香)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또 미인의 향수 냄새라고도 했다고 한다. 꽃향기에 대한 칭찬이 이보다 더한 것이 있으랴. 하지만 보라색 서향보다 꽃빛마저 순백으로 순결한 우리의 백서향이 더 아름답고 길하다.

    두 달도 남지 않은 올해의 마지막을 백서향의 향기, 꽃빛과 함께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누가 아는가. 기대치 않은 상서로운 일이 벌어질지.

    미인의 향수 냄새 천 리를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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