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4

2013.09.09

‘수많은 악몽’엔 눈감은 멜로드라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3-09-09 10:4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수많은 악몽’엔 눈감은 멜로드라마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람이 분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를 한 청년의 아름다운 사랑이 이뤄졌던 낭만의 시간으로 추억한다.

    한 일본 병사가 오른팔을 잃고 제2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아내 품으로 귀환한다. 하지만 더는 정상적인 성관계가 불가능하다.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성행위를 통해서만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병사는 강간과 폭행, 살해 등 성범죄를 연쇄적으로 저지른다. 결국 경찰에 잡힌 그는 심문에서 항변한다. 자신의 행위는 전쟁 중에 배운 것이며 일왕이 허락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병사의 다음 말은 일본인이 일본인 스스로에게 묻는 전쟁의 책임에 대한 가장 통렬한 질문일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일왕인데 왜 우리가 죗값을 치러야 하지? 도조 히데키는 A급 전범인데 왜 일왕은 아닌가?”

    일본인이 제작하고 일본 감독이 연출한 영화 ‘전쟁과 한 여자’(감독 이노우에 준이치)의 한 대목이다. ‘전쟁과 한 여자’는 전쟁으로 절망과 허무 속에서 허덕이던 알코올중독 작가와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젊은 매춘부, 전쟁 상처에 시달리며 강간과 살인 행각을 벌이는 상이 병사를 통해 전쟁이 파괴한 인간성을 드러낸 작품이다. 일본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일본의 전쟁책임론과 일왕 비판을 직설적으로 담았다. 비록 관객은 얼마 모으지 못했지만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한국에서도 개봉했다.

    일본 제국주의 청년의 비행체 사랑

    이 영화를 제작한 전 일본 문화청 문화부장인 테라와키 켄은 시나리오 작가 아라이 하루히코와 함께 한국을 방문해 기자간담회, 관객과의 대화 등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두 일본인은 자국 내에서 흥행돌풍을 일으키는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와 거장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한마디로 “부끄럽고 창피하고 화가 난다”고 했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와 과거의 비극적 역사에 대한 반성을 결여한 무책임한 영화라는 것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TV 시리즈 ‘미래소년 코난’을 시작으로 극장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 라퓨타’ ‘모노노케 히메’ ‘반딧불의 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토토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 등을 연출하며 일본뿐 아니라 한국과 전 세계에 열혈 팬을 거느린 거장이다. 과연 그의 신작 ‘바람이 분다’가 어떻기에 이 같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일까. ‘바람이 분다’는 7월 20일 일본에서 개봉해 5주 연속 관객 수 1위를 차지하며 관객 600만 명을 돌파했고, 최근 개막한 제7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 받은 데 이어 국내에서도 9월 5일 개봉했다.

    ‘바람이 분다’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 완벽한 비행체를 만들려 했던 한 청년의 꿈과 사랑을 그린 영화다. 소년 시절부터 비행에 대한 꿈을 갖고 있던 주인공 ‘지로’가 항공공학도로서 꿈을 이뤄가는 과정, 그리고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난 한 소녀와 만나고 헤어지며 이룬 사랑을 그렸다. 미야자키 감독의 다른 작품이 그렇듯,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감동적이다. 소년 소녀의 꿈과 사랑의 시간, 누구나 가슴속에 간직한 ‘순수의 시대’로 관객을 안내한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무서운 살육기계가 아닌 완벽한 비행체를 향한 주인공의 열정은 아름답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미야자키 감독은 ‘전쟁과 한 여자’가 그리는 파괴와 살육, 변태적 충동의 시간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인간의 순수한 열정이 다른 수많은 이의 악몽이 됐을 때 과연 그 꿈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바람이 분다’ 주인공은 실존 인물인 호리코시 지로다.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비행기 설계팀을 이끌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해군 주력 전투기 ‘제로센’을 개발했다. ‘제로센’은 전쟁 초기 미군을 상대로 탁월한 전과를 올렸고, 말기엔 일본군의 자살특공대(‘가미가제’) 병사들을 돌아오지 못할 길로 실어 날랐다.

    영화는 전쟁 장면을 그리진 않는다. 다만 한 항공공학자에겐 아름다운 꿈인 비행기가 현실에선 살육과 파괴의 기계가 되는 아이러니가 거듭 언급된다. 극중 지로가 우상으로 꼽는 이탈리아의 항공설계가 카프로니는 주인공의 꿈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는 “전쟁이 끝나면 폭탄 대신 손님을 싣는 여객선을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지로 역시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정부 위탁을 받아 전투기를 설계하면서 “과연 일본은 누구와 전쟁을 벌이려는 것일까”라고 회의한다. 일견 영화는 반전 메시지를 담아내는 듯하지만 “비행기는 아름답지만 저주받은 꿈”이라거나 “피라미드(살육과 파괴를 상징)가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 중에서 고르라고 한다면 있는 세계를 선택할 것”이라며 전쟁을 숙명으로 긍정한다.

    일본의 우경화 정치적 텍스트?

    ‘수많은 악몽’엔 눈감은 멜로드라마
    이뿐 아니라 지로는 “우리나라는 왜 가난할까”라면서 동료와 함께 기술로 조국을 일으키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거듭 보여준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전범기업이 아니라 당시 청년들이 ‘기술 입국’, 조국 근대화를 위해 꿈과 열정을 바쳤던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서 지로가 “내 비행기를 탄 이들이 한 명도 안 돌아왔다”는 쓸쓸한 고백을 할 때, 이 말은 ‘반전 메시지’보다 단지 조국 패전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발언으로 읽힌다. 친절하고 헌신적이며 항공공학에 강한 집착을 가진 ‘모범적인 일본인’인 주인공은 그래서 극악한 전범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심지어 지로는 어린 시절, 한 소녀를 괴롭히는 불량 친구들과 싸우는 정의로운 소년으로 묘사된다. 전쟁이라는 파괴 및 살육의 축제에 동원된 일본 지식인들과 전문기술인들에게 미야자키 감독이 선물한 ‘면죄부’인 셈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이 영화 개봉 전후 글과 인터뷰를 통해 직접 아베 정권을 비판했고 위안부에 대한 사과 및 보상을 촉구했다. 그와 그의 신작 ‘바람이 분다’는 이처럼 일본 내 극우세력과는 어느 정도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살상을 저지르고 주변국 주권을 유린했던 일본의 침략전쟁 시대를 미야자키 감독은 한 청년의 아름다운 사랑이 이뤄진 낭만의 시간으로 추억하고, 기술 입국이라는 일본의 꿈이 태동한 신화의 시간으로 불러낸다. 그것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살육과 가학, 변태성욕의 이미지로 그린 ‘전쟁과 한 여자’의 대척점에 있다.

    대량살상의 핏자국을 원색의 아름다운 동화로 채색하고, 무차별적인 파괴와 폭력의 시대를 꿈과 열정, 창조의 시간으로 대체한 ‘바람이 분다’를 아련한 감성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일 것인가, 일본 우경화를 합리화하는 정치적 텍스트로 읽을 것인가는 관객 몫으로 남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