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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 이형석의 영화 읽기

시대를 앞서 간 천재, 서둘러 찾아온 신화

조슈아 마이클 스턴 감독의 ‘잡스’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시대를 앞서 간 천재, 서둘러 찾아온 신화

시대를 앞서 간 천재, 서둘러 찾아온 신화

영화 ‘잡스’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대학 시절부터 아이팟 공개 전까지의 시간을 담고 있다.

지하의 스티브 잡스가 자신을 소재로 삼은 이 전기 영화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잡스는 1980년대 애플 내에 매킨토시 개발팀을 독려하려고 “우리는 우주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여기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내 삶의 ‘흔적’이라고 말하기에는 혁신적이거나 창의적인 구석이라고는 한 치도 없는, 덜 떨어진 모조품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았을까. 혹은 “뛰어난 예술가는 흉내 낸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피카소의 말을 “그들(마이크로소프트)은 뻔뻔하게 흉내 냈다. 하지만 우리는 뻔뻔하게 훔쳐냈다”고 받았듯, “이 영화는 나 스티브 잡스를 훔쳐내는 데 실패했다. 단지 어설프게 흉내 냈을 뿐”이라며 한심해하지 않았을까.

영화 ‘잡스(Jobs)’ (감독 조슈아 마이클 스턴)는 21세기 인류가 이룬 기술적 상상력의 위대한 아이콘인 잡스의 이름을 직접 내세운 대담함과 지극히 ‘애플스러운’ 간결한 작명법이 인상적이긴 하다. 하지만 한마디로 너무 서둘러 도착한 작품 같다. 너무 빨리 쓴 신화이며, 너무 일찍 배를 가른 황금 알 낳는 거위가 돼버렸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물건 창조

시대를 앞서 간 천재, 서둘러 찾아온 신화
아니면 너무 급하게 출시하느라 소비자들을 ‘모르모트’로 우롱한 ‘쓰레기폰’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국내 모 기업의 초창기 스마트폰 모델 같은 영화가 돼버렸다. 잡스의 이름값과 상품성에 기댔지만 발견도, 발명도 없으며 해석도 없는, 영감 없는 빤한 전기 영화다.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 ‘스티브 잡스’의 처음 몇 쪽과 위키피디아의 ‘스티브 잡스’ 항목, 인터넷 동영상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넘쳐나는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영상, 그리고 영화배우 애슈턴 커처만 있으면 누구든 만들 수 있는 작품이 됐다.

영화는 1970년대 잡스의 대학 시절부터 2001년 아이팟 공개 전까지의 시간을 담았다. 영화 속에서 다루는 시간조차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세계 모바일 시장을 흔들었던 그의 가장 뜨거운 시기를 피해간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그래도 볼만한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잡스의 청년 시절, 꽤 잘 알려진 사실들과 소소한 에피소드, 그의 성공시대를 함께한 주변 인물들을 비교적 충실히 담아냈다. 영화는 1974년 리드대 교정에서부터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간다. 며칠 감지 않은 산발한 머리에 맨발로 걷는 청년. 곁을 지나던 한 교수가 불러 세워 “자퇴한 것은 알고 있네만, 그래도 내 강의를 들어보는 게 어떻겠나. 앞으로 자네가 학위를 따고 직장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될 걸세”라며 설득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에 가까운 청년의 대답이다.

“기존 체제에 순응하며 사는 게 싫습니다. 학위나 안정된 직장 따위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대학을 자퇴한 잡스는 한 컴퓨터 게임 개발 회사에 일자리를 얻지만, ‘신발을 안 신고 며칠간 씻지도 않는’ 동료나 부하직원을 달갑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그 특별한 재능은 어디서든 숨길 수 없었지만 수시로 동료들과 상사들을 “멍청하다”고 비난하며 분란을 일으키는 ‘싸가지 제로’의 새파란 청년을 품어줄 회사도 없었다.

결국 청년 잡스는 친구 몇 명과 함께 자신을 키워준 양아버지의 좁은 차고에 회사를 차린다. ‘애플컴퓨터’의 출발이었다. 영화는 잡스의 창업 과정과 컴퓨터 개발 과정, 매킨토시에서 아이팟에 이르기까지 ‘세상 어디에도 없던 물건’의 창조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 초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잡스는 자신이 다니던 게임 개발 회사로부터 한 프로젝트를 수천 달러에 수주한 뒤 친구(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를 꼬드겨 함께 작업을 하게 된다. 잡스는 아이디어만 제공했을 뿐 일은 사실상 친구가 다 한다. 그런데 프로젝트로 받은 수익금을 속여 친구에겐 단돈 몇백 달러만 준다.

애슈턴 커처 뛰어난 연기 볼만

시대를 앞서 간 천재, 서둘러 찾아온 신화
잡스는 싸고 사용하기 쉬우며 창의적인 디자인에 상상력까지 넘치는 기계와 컴퓨터에 종교 같은 집착을 가졌고, 투자 유치나 마케팅과 관련해서도 천재적 감각과 수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세상의 기준을 벗어난 비도덕적 면모가 적지 않아 막역한 지인이나 은인, 친구조차 냉정하고 잔인하게 내치기 일쑤였다. ‘잡스’는 기술과 마케팅에 관한 잡스의 천재적 재능과 종교적 열정을 그리는 한편, 때로는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그의 이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창업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룬 영화 전반부가 지나면, 후반부에선 잡스와 애플의 부침을 다룬다. 잡스는 애플컴퓨터로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지만 라이벌 마이크로소프트의 공세를 견디지 못해 급격한 침체기를 맞게 된다. 애플의 투자자들과 이사회는 비전 없는 신제품 개발에 무리하게 투자와 마케팅을 했기 때문이라며 잡스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결국 잡스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당시 펩시콜라에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던 최고경영자(CEO)를 불러온다. 잡스가 “나머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면서 보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꿔놓을 기회를 갖고 싶습니까”라고 설득했다는 당시 일화는 유명하다.

잡스의 인간적 면모는 아이작슨의 전기 첫 장에 잘 요약돼 있다.

‘버림받음, 선택받음, 그리고 특별함. 이러한 개념들은 잡스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고 스스로를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잡스는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인 친모와 시리아 무슬림 친부 사이에서 태어난 직후 평범한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와 가정주부였던 어머니에게 입양됐다. 양부모는 아들의 남다른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헌신적으로 키웠으며, 잡스 또한 그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버려졌다’는 사실은 그의 내면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전기는 주장한다. 영화 속에선 청년 잡스가 “거지 같은 인생이다. 낳아 놓고 버리는 게 부모냐”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잠깐 등장한다.

잡스 사후 2년 만에 찾아온 전기 영화는 설익은 면모가 두드러지지만, 잡스에 빙의된 듯 외모와 말투, 걸음걸이까지 ‘복사’해낸 커처의 연기는 찬사를 받을 만하다.



주간동아 2013.09.02 903호 (p68~69)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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