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8

2013.07.29

기적소리 떠난 자리 추억이 지키고 있었네

전국 간이역 다양한 모습으로 새 단장… 7080세대 낭만과 세월 여행 장소로 인기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3-07-29 14: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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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소리 떠난 자리 추억이 지키고 있었네
    새벽까지 비가 오고 잘하면 낮에 햇빛도 볼 수 있다는 기상청의 말을 믿고 빗속을 뚫고 경기 남양주시로 향했다. 조안면 능내역에 도착한 건 11시 40분경. 그때까지 햇빛은커녕 가는 빗줄기가 이어졌다. “비가 오면 관광객이 없어 무조건 역사 문을 안 연다”는 능내1리 마을이장의 말과 달리 다행히 역사는 개방돼 있었지만 사람 그림자를 찾긴 어려웠다.

    낭패감에 젖어 역사 주변을 서성일 때 저만치서 자전거를 타고 역을 향해 달려오는 중년 남녀 한 쌍이 눈에 들어왔다. 휴가를 이용해 1박2일 자전거로드에 나선 부부였다. 이들은 하루 전 경기 안양시 평촌동 집에서 출발해 하남과 팔당댐을 거쳐 양평대교를 돌아오는 남한강투어 도중 능내역에 들렀다고 했다. 남편 최영남 씨는 “이곳에 오니 예전 간이역에서 열차가 잠깐 멈추면 뛰어내려 삶은 달걀과 우동을 사먹던 기억이 난다. 새로 생긴 역들은 정취가 없어 아쉽다”고 했다. 옛 중앙선 철길을 따라 능내역 바로 앞을 지나는 자전거도로는 자전거 마니아에게 널리 알려졌다. 역 한쪽에는 관광객을 위한 자전거대여소도 마련해놓았다.

    교련복에 책가방 끼고 ‘찰칵’

    최씨 부부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갑자기 대합실에서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함께 왁자한 소음이 들려왔다. 어느 새 비가 그쳤고 그사이 관광객 10여 명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던 것. 웃음소리를 따라가니 40대 중반 여성 5명이 역사 내 한쪽에 마련한 ‘고향사진관’에서 1960~70년대 남학생, 여학생 교복과 모자, 교련복을 나눠 입고 책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박미순 씨는 “함께 온 친구들이 여중 동창이다. 우리는 교복자유화 때문에 딱 1년밖에 교복을 입지 못했다. 아쉬움이 남았는데 그 시절의 감정으로 돌아가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으니 좋다”고 했다.

    기적소리 떠난 자리 추억이 지키고 있었네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역 ‘고향사진관’에서 1960~70년대 교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며 추억에 잠긴 중년 여성들(왼쪽)과 능내역 내부.

    능내역은 팔당호반을 끼고 달리던 중앙선 철로를 이설하면서 2008년 12월 기차가 끊기고 폐역이 됐다. 이곳을 마을주민이 힘을 모아 ‘추억’이라는 콘셉트로 꾸며놓았다. 역사 안팎의 빈 벽은 여행객이 고향사진관에 들러 교복을 빌려 입고 찍은 사진으로 가득했다. 마치 빛바랜 옛 사진처럼 흑백으로 인화된 사진 속에는 가족 10여 명이 어울려 추억의 ‘말뚝 박기’ 놀이를 하는 모습도 담겼다. 50대와 20대 두 남성이 삐딱하게 교모를 눌러쓰고 찍은 사진 아래에는 ‘아빠와 아들의 일탈’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역사 앞에서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40대 중반 남성 3명을 만났다. 대학 동기라는 이들은 각자 생각에 잠긴 듯 물끄러미 역 주변을 둘러봤고 그들 사이로 낯익은 음악이 들렸다. ‘하얀 날개를 휘저으며, 구름 사이로 떠오네, 한없이 넓은 가슴으로, 온 세상을 사랑하다, 날리는 낙엽 따라서 떠나가 버렸네…’ 역을 쩌렁쩌렁 울린 노래는 1980년대 청춘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그룹 휘버스(Fevers)의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일행 중 한 명이 “옛날 노래를 들으니 대학 때 기차 타고 송내역 포도밭으로 놀러 다니던 기억이 난다. 경춘선 타고 마석이나 강촌으로 MT를 간 일도, 라이브 통기타 연주로 유명했던 백마역도 생각난다”고 했다.

    먼지 나는 시골길을 터덜터덜 걷다 문득 고개를 들면 눈앞에 나타나는 간이역. 수년 전부터 역사 속으로 하나둘 사라진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많은 사람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전국 간이역이 최근 새 단장을 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40대 초반 임태용 씨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서울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삼천포(사천시)로 가족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때는 자가용이 없어 통일호나 비둘기호 열차를 타고 여행을 많이 다녔다. 시골 간이역은 도시를 벗어나 지친 심신을 정화할 수 있는 힐링 장소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40대 중반 김상용 씨는 “기차여행을 좋아해 아내와 전국 간이역을 많이 찾아다녔다. 간이역사에서 발견한 초등학교 책걸상을 보고 어린 시절이 생각나 중학생 아들한테 ‘아빠는 옛날에 쉬는 시간이면 이러고 놀았다’며 책상에 엎드려 앞뒤로 흔들었다. 사춘기가 되면서 평소 웃는 모습을 잘 볼 수 없던 녀석이 나를 보고 깔깔대며 웃어서 좋았다”며 지난봄 가족여행의 추억을 떠올렸다.

    능내역처럼 기적소리와 인적이 끊겨 폐역이 된 곳 중에는 구둔역과 남평역도 있다. 경기 양평군 지평면에 있는 구둔역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을 맡은 이제훈과 수지가 과제를 빌미삼아 첫 데이트를 했던 곳. 영화 개봉 직후 사람들의 발길이 늘면서 역사 앞마당을 지키는 ‘소원성취나무’가 명물이 됐지만 이후 전기와 수도가 끊기면서 인적이 줄어 최근 코레일(KORAIL)에서 활용 방안을 고민 중이다. 등록문화재(근대문화유산)로 지정된 구둔역은 간이역 마니아 사이에서 ‘역사와 전원 풍경이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손꼽힌다.

    역사·문학 체험학습지로 탈바꿈

    기적소리 떠난 자리 추억이 지키고 있었네

    경기 양평군 지평면 구둔역 광장에 서 있는 소원성취나무.

    전남 나주시 남평읍에 위치한 남평역은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역사 앞마당에 반질반질 윤이 나는 항아리 수십 개가 가지런히 놓인 너른 장독대와 오래된 벚나무, 자연 그대로 옮겨놓은 통나무 탁자를 품고 있어 한적한 시골 간이역 특유의 정취를 풍긴다. 군데군데 조각상을 설치해 갤러리로 꾸민 이곳은 가수 서인국의 ‘부른다’ 뮤직비디오 속 배경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유려한 곡선으로 이어지는 철길을 따라 향나무 수십 그루가 늘어선 선로변에서는 기차체험장을 만들려고 레일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전북 군산시 임피면 임피역도 등록문화재다. 전북 익산 춘포역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임피역은 현재 장항선 열차만 간간이 지나칠 뿐 기차가 서지 않는 무인역. 역 광장과 대합실에는 이곳 출신 소설가 채만식의 소설 속 인물상이 군데군데 놓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이 역과 승객들에 얽힌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구성해 보여주는 역사·문학 체험학습 관광지로 최근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간이역 마니아들은 장항선 선장역, 동해남부선 서생역과 더불어 이곳을 ‘간이역 3대 비경역’으로 꼽는다.

    울산 울주군 서생면 서생역은 기차가 서지 않는 무인역으로, 초록색과 갈색이 뒤섞인 댓잎, 억새가 어우러진 한적한 산길을 오르다 보면 불쑥 나타난다. 10여 년 전 역사가 철거돼 유리로 된 간이대합실과 녹슨 역명판, 선로 양편에 선 가로등만 관광객을 맞는다. 하마터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3대 비경역’이 살아남은 건 산골에 위치한 역 주변 풍광이 아름답고 주변에 간절곶, 옹기마을 등 유명 관광지가 많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

    전남 보성군 노동면 명봉역은 서생역과 함께 아름다운 무인역으로 손꼽힌다. 드라마 ‘여름향기’ ‘신데렐라 언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붉은색 벽돌담으로 지은 아담한 역사는 특히 앞마당에 자리한 오래된 벚나무와 꽃잔디가 한가로운 시골 정취를 자아낸다. 대합실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에는 드라마 스틸사진과 함께 ‘여름향기’ 주인공 송승헌, 손예진의 친필사인, 드라마 대본 표지 등이 담겨 있어 역을 찾은 관광객의 기념촬영 배경이 된다. 역을 나서면 맞은편 도로변을 따라 1960~70년대 지은 낡은 주택들이 지붕을 맞대고 옹기종기 자리해 정겨운 고향 동네를 연상하게 한다.

    재작년 철도여행상품 표를 끊어 경북 봉화군 석포면 승부역을 다녀온 대학원생 이영배 씨는 “역사 내에 마련된 숙소에서 묵었다. 방이 2개 있어 남녀 따로 숙소를 썼는데 대부분 또래 대학생이라 함께 음식을 해먹으며 친해졌다”고 했다. 그가 승부역을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는 ‘국내 역 가운데 가장 오지에 있는 간이역’이라는 정보가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침저녁으로 하루 2번 기차가 서고 역사 앞에 집이 딱 한 채였던 이곳은 올해 초 중부내륙관광열차인 V-트레인(협곡열차)의 운행경로가 되면서 넘쳐나는 기차와 관광객으로 붐빈다. 역무원은 “협곡열차 외에 순환열차, 무궁화호 열차까지 지나 요즘은 하루 16번 기차가 선다. 그 덕에 주말이면 활기 넘치는 역이 됐다. 역에서 10여 분 거리에 민박집이 생겨 숙박하는 여행객도 늘었다”고 했다.

    V-트레인은 분천역과 양원역도 지난다. 경북 봉화군 소천면 분천역은 5월 국내 최초로 스위스 알프스 체어마트(Zermatt)역과 ‘기차역 자매결연’을 맺은 곳. 이를 계기로 역사도 목재를 이용해 스위스풍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주말이면 1000명이 넘는 관광객이 ‘예쁜 엽서 속 그림’ 같은 역사 풍경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역무원은 “주변에 트레킹 코스가 개발됐고 카셰어링, 자전거 대여 서비스도 하고 있다”고 했다.

    쇠고기 구워 먹는 진상역

    기적소리 떠난 자리 추억이 지키고 있었네

    경북 봉화군 소천면 분천역 안으로 들어가는 여행객들(위)과 분천역 협궤열차 내부.

    분천역과 같은 면에 있는 양원역은 역사도 없이 ‘대합실’ 팻말이 붙은 초라한 건물 하나가 전부다. 주변에 논과 밭이 펼쳐져 마치 시골마을 한가운데 콕 박힌 점처럼 보이는 이곳은 원래 기차역이 아니었다. 교통에 불편을 느낀 마을주민이 힘을 모아 역을 만들어놓은 것이라 철도노선도에도 나오지 않는 국내 최초의 민간역사로 기록됐다. 비록 역 등급은 ‘임시승강장’이지만 주말이면 1000명, 평일에도 700~800명이 이곳을 찾는다. 역무원은 “V-트레인을 이용하는 관광객 외에 트레킹을 즐기러 오거나 역이 신기해 일부러 찾아오는 여행객도 많다”고 했다.

    전남 보성군 득량역은 주말이면 하루 10여 명이 찾는다. 역무원은 “봄꽃이 필 때는 50~60대가 많이 오고, 휴가철에는 아이를 동반한 40대 부부가 많다. 방학 때면 대학생이 많이 온다”고 했다. 역 주변에는 낡은 빈집들을 활용해 1960~70년대 향수를 자아내는 문화 거리를 조성했다. 장난감가게와 문방구, 사진관과 만화방, 풍금이 있는 초등학교 교실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한편 경북 군위군 산성면 화본역은 뒤편에 과거 증기기관차가 달리던 시절 물 보충 시설로 이용하던 급수탑이 서 있어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간이역이다. 주말이면 1000명 넘는 관광객이 찾는다. 역무원은 “자가용을 타고 오는 사람도 많아 근처 폐교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쓴다. 옛날에 직원들이 사용하던 철도관사를 숙박시설로 꾸몄는데 이용객이 많다”고 했다.

    이 밖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간이역은 국악체험을 할 수 있는 충북 영동 심천역, ‘동화 속 세상으로’를 표방한 경북 문경 점촌역, 역사 내에 한우식당이 있어 ‘쇠고기 구워 먹는 간이역’으로 화제를 모은 전남 광양 진상역 등이 있다. 능내역에서 만난 30대 부부는 “원래 강원 봉평에서 하룻밤을 자고 강릉까지 가는 걸로 계획을 잡았는데 능내역 구경이 재미있어 강릉은 포기했다”며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만나는 간이역은 낯선 여행객의 발길을 붙잡는 ‘그 무엇’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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