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8

2013.07.29

몸짱 전설 ‘유진 샌도’ 보디빌딩 역사로 남다

세계 최초 보디빌더로 오늘날 각종 보디빌딩 대회 초석 다져

  • 김원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wongon@plaza.snu.ac.kr

    입력2013-07-29 09: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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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짱 전설 ‘유진 샌도’ 보디빌딩 역사로 남다

    유진 샌도

    오늘날 몸 만들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 중에서도 유진 샌도(Eugen Sandow)란 이름을 들어본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1950~6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운동에 관심깨나 있는 사람들은 유진 샌도라는 이름을 그야말로 몸짱의 대명사이자 보디빌더의 상징처럼 인식했다. ‘유진 샌도의 아령 교범’ 같은 팸플릿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당시 많은 청년이 이 교재를 보면서 몸을 만들어나갔다.

    일세를 풍미한 전설적인 몸짱이자 오늘날 ‘현대 보디빌딩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샌도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1867년 4월 2일 독일(당시 프러시아)에서 변변치 않은 채소장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체격과 총명함으로 주위의 시선을 모았다. 그러나 평소 부모와 충돌이 잦았던 그는 어느 날 동네를 지나가는 서커스단을 따라 가출을 하고 만다.

    본명이 프리드리히 뮐러였던 그는 이때부터 이름을 유진 샌도로 바꾸고 생활하게 된다. 이는 당시 서커스 같은 공연계에 진출한 경우 예명을 쓰는 것이 전통이던 이유도 있지만, 프러시아 군대로 징집되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샌도는 서커스단에서 타고난 힘과 체격을 활용한 연기를 했는데, 이를 위해 계속 운동으로 몸을 가꿔나가면서 나날이 강하고 멋있어졌다. 그 자신도 서커스일을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현대 보디빌딩의 아버지’

    어느 날 그가 일하던 서커스단이 경영 부실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공연하던 중 그만 파산하고 만다. 그런데 이 위기가 오히려 그의 인생 행로를 바꾸는 전기가 됐다. 당시 브뤼셀에는 루이 아틸라(Louis Attila)라는 직업 역사(力士)가 있었는데 그가 샌도의 자질을 알아본 것. 아틸라는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인 후 체격을 좀 더 멋있게 만드는 방법과 역사로서의 공연 노하우 등을 하나하나 전수했다. 그러고는 둘이 짝을 이뤄 유럽 도시를 순회하며 힘자랑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던 중 1889년 둘은 각각 독립해 일을 해나가기로 결정한다. 아틸라는 런던에 정착하고 샌도는 예전처럼 유럽 여러 도시를 떠돌게 된다. 그런데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아틸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 런던에서 두 직업 역사가 삼손과 키클롭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는데, 이들 중 리더인 삼손이 자신들을 힘으로 이기는 사람에게 당시로는 큰 액수인 500파운드를 주겠다고 호언했던 것이다. 물론 인기를 올려 보려는 상술이었지만, 그들 역량이 샌도에게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을 간파한 아틸라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아틸라의 전갈을 받은 샌도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한달음에 런던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공연장에서 삼손과 힘겨루기를 해 그를 보기 좋게 꺾어버렸다. 이 일은 샌도를 일약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영국 곳곳에서 이 힘세고 매력적인 젊은 역사를 보려고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샌도는 그로부터 약 4년간 자신의 근육미를 마음껏 자랑하며 명성과 부를 쌓아나갔다. 그러던 중 1893년 한 미국인 공연 기획자가 샌도에게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해볼 것을 제안했다. 평소 큰 무대를 꿈꿨던 샌도였기에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해 여름 샌도는 마침내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그러나 뉴욕에서의 공연은 실망스러웠다. 관중 반응도 영국 같지 않았고, 특히 한여름 뉴욕의 후덥지근한 날씨가 관중 동원을 방해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실망한 그는 유럽으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굳혀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샌도의 공연을 눈여겨보던 사람 중에 플로렌즈 지그펠드라는 젊은 쇼 비즈니스 흥행사가 있었다. 샌도의 가능성을 알아본 그는 샌도에게 뉴욕을 떠나 좀 더 큰 흥행이 가능한 곳으로 활동무대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1894년 세계적 규모의 박람회가 열리기로 예정된 시카고였다.

    시카고 첫 공연에서 샌도는 지그펠드의 기획 의도에 맞춰 단순한 괴력미보다 균형 잡힌 매력적인 근육미를 과시하는 데 초점을 뒀다. 육중하고 살집이 넘쳐흐르는 거구들의 단순한 힘자랑에 익숙한 관중에게 샌도의 공연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 여성 관객 반응이상상 이상이었다. 이 공연 이후 샌도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그는 곧 회사까지 차리고 미국 각지를 순회공연했다. 샌도는 지그펠드의 조언대로 가급적 많은 공연에 출연해 명성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괴력 과시 수준을 넘어, 어떤 때는 사자와 싸우기도 하고 여성 전용 스트립쇼에까지 출연했다. 그럴수록 그의 인기도 높아져 쇄도하는 공연 요청에 거의 매일 같이 출연했고, 그렇게 3년이 흘러갔다. 아무리 강철 같은 체력을 가졌다지만 이런 고된 일정은 신경쇠약 등 여러 신체 이상증후를 낳기 시작했다.

    여성편력으로 비참한 최후

    몸짱 전설 ‘유진 샌도’ 보디빌딩 역사로 남다

    세계 최고 권위의 프로보디빌딩 대회인 ‘미스터 올림피아’

    샌도는 건강을 회복하려고 영국으로 갔다. 예전에 잠시 영국에 들렀을 때 결혼한 부인을 찾아 어느 정도 정신적 안정을 취한 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여전히 몸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번에는 공연에 주력하기보다 체육관을 만들어 몸 만들기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제대로 된 운동시설을 거의 보지 못했던 대중은 샌도의 체육관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런 대중의 관심만큼이나 그의 체육관은 나날이 성장해 전국으로 확산했다.

    샌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898년 보디빌딩 관련 잡지를 발행하는 등 몸 만들기 관련 잡지와 출판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여러 운동기구를 직접 고안해 상품화하기도 했다. 샌도의 보디빌딩 인생 역정에서 최고의 순간은 1901년 세계 최초로 런던에서 보디빌딩 대회를 개최한 것이었다. 폭발적인 관심 속에서 열린 이 대회의 심사위원 3명 중엔‘명탐정 셜록 홈스’를 탄생시킨 코난 도일도 있었다.

    보디빌딩 지도자로서 명성이 점점 높아지자 샌도는 남아프리카, 인도, 일본, 호주 등 여러 나라를 방문했으며, 1911년에는 영국 국왕의 체육 특별코치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그의 찬란한 명성 뒤에는 어두운 면도 숨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여성편력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정도의 매력적인 몸과 수려한 용모를 갖춘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여성의 유혹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터. 그러나 이로 인한 가정 불화는 치명적이었다. 이는 1925년 샌도가 58세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했을 때 그의 시신이 런던의 한 공동묘지에 비석 하나 없이 오랜 기간 방치된 이유가 됐다.

    하지만 이런 개인 가족사의 아픔에도 보디빌딩에 끼친 그의 공적만은 잊혀질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은 오늘날 세계 최고 권위의 프로보디빌딩 대회인 ‘미스터 올림피아’ 수상트로피에도 담겨 있다. 이는 명실공히 ‘현대 보디빌딩의 아버지’로서의 위상에 맞는 대접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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