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2

2013.01.21

‘낭만적 영웅’도 잘 어울리는 톰 크루즈

크리스토퍼 맥쿼리 감독의 ‘잭 리처’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3-01-21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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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적 영웅’도 잘 어울리는 톰 크루즈
    지난해 12월 15일 미국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미국 피츠버그에서 예정됐던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잭 리처’ 시사회를 취소했다. 하루 전날 미국 코네티컷 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총기난사 사건 때문이었다. 20세 청년 애덤 랜자가 코네티컷 주 뉴타운의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해 어린이 20명과 교직원 6명, 랜자 자신과 그의 어머니 등 모두 28명이 목숨을 잃었다. ‘잭 리처’는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영화 초반부 범인이 총기로 무고한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저격해 죽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총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영화, 음악, 게임의 악영향 때문”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던 미국 엔터테인먼트 업계로선 긴장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 범인이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인 ‘콜 오브 듀티’에 빠져 있었다는 미확인 보도가 나오면서 총기 규제 법안과 함께 영상물 제한 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잭 리처’와 함께 또 다른 할리우드 신작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서부극 ‘장고 : 분노의 추적자’도 시사회를 미뤘다. TV에서도 폭력적 성향이나 내용을 담은 프로그램 방송을 일부 취소했다.

    미국에서 총기 사건과 영화계의 ‘악연’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7월에는 콜로라도 주 덴버의 한 극장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 상영 중 한 관객이 총기를 난사해 영화를 보던 12명이 사망하고 58명이 다쳤다. 거슬러 올라가 2007년 4월 버지니아 주 버지니아공대에서 한인 학생 조승희가 총기를 난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참사가 발생했을 때는 그가 생전에 찍어놓은 사진 이미지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장면과 유사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

    1999년 4월엔 미국 콜로라도 주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학생 2명이 총기를 난사해 학생과 교사 등 13명이 죽고 23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범인들이 미국 하드록 가수 메릴린 맨슨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문화가 집중 포화를 맞았다. 당시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컬럼바인’이다. 무어 감독은 이 영화에서 문제는 게임, 노래, 영화가 아니라 총기를 팔아먹는 미국 군수산업과 총기협회, 그들과 결탁한 정치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총기난사 사건을 뒤로하고 ‘잭 리처’는 지난해 12월 21일 미국에서 개봉했다. 첫 주말 흥행순위 2위에 오르는 등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1월 17일 한국 개봉을 앞두고 톰 크루즈가 방한하기도 했다. 1994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로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후 벌써 여섯 번째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32세였는데 지금은 51세다.

    영화 제목 ‘잭 리처’는 톰 크루즈가 연기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발칸 등 세계 분쟁지역을 두루 거친 미군 수사관 출신 퇴역병 이름이다. 은퇴 후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자유롭게 살던 그가 다시 현장으로 불려 나오게 된 이유는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총기난사 사건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앨러게이니 강변의 공원. 한낮 평화롭기만 하던 그곳에서 갑자기 총성 6발이 울리고 무고한 시민 5명이 목숨을 잃는다. 총알은 강 건너 공원을 바라보는 건물에서 날아왔다. 체포된 용의자는 ‘제임스 바’라는 인물이다. 현장에 있는 모든 증거가 제임스 바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가운데, 용의자는 검찰 심문에서 “잭 리처를 데려오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거듭한다. 검찰은 잭 리처가 세계 여러 전장에서 실력을 발휘한 유능한 군 수사관 전력을 가졌으나 운전면허, 거주지, 카드 신용정보, 휴대전화, 이메일 등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미상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TV를 통해 사건을 접한 잭 리처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제임스 바가 이라크에서 자신과 함께 복역했던 군인 출신임을 밝힌다. 그러나 제임스 바가 이송 과정에서 다른 죄수들로부터 폭행당해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사건은 “전쟁과 살해 광기에 휩싸인 미치광이의 무차별적 총기난사”로 결론 난다.

    제임스 바의 변호사인 헬렌(로자먼드 파이크 분)과 함께 사건을 재조사하던 잭 리처는 희생자 5명이 무작위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증거를 찾아낸다. 이를 바탕으로 누군가 음모를 꾸미고 제임스 바를 조종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이와 함께 지방 검사장인 헬렌 아버지를 비롯한 검찰 내 세력이 사건을 조작, 은폐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낭만적 영웅’도 잘 어울리는 톰 크루즈
    연쇄살인 둘러싼 모종의 음모

    톰 크루즈가 나오는 영화라고 해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같은 화려한 액션영화를 기대했다면 당혹스럽거나 실망할 수도 있다. 화려한 액션 블록버스터라기보다 하드보일드나 탐정영화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잭 리처는 하드보일드 영화의 냉정하고 음울한 주인공과는 다른 유머러스하며 바람처럼 자유롭고, 상대 여럿을 간단히 제압하는 강한 위력의 소유자다. 낭만적이고 영웅적인 인물인 셈.

    영화는 마지막에 한낮 도심에서 일어난 총기 연쇄 살인사건 배후에 한 기업을 둘러싼 모종의 음모가 있음을 밝힌다. 영화 속에서야 낭만적인 영웅에 의해 총기난사 전모가 명징하게 밝혀지지만, 오늘날 미국에서 끊이지 않는 비극은 그 원인도 대책도 오리무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질없는 논란만 이어질 뿐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총기를 규제하겠다고 나섰지만, 오히려 총기와 탄약 판매가 급증했다는 소식이 잇따른다. 예의 “폭력적 영화, 노래, 게임이 악마를 키웠다”고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날선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과연 누가 범인 손에 총을 쥐어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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