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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 이형석의 영화 읽기

흉악범도 ‘얼짱’이면 뜨는 씁쓸한 세상

정병길 감독의 ‘내가 살인범이다’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흉악범도 ‘얼짱’이면 뜨는 씁쓸한 세상

흉악범도 ‘얼짱’이면 뜨는 씁쓸한 세상
“공소시효에 이의 있습니다!”

한국 영화가 한목소리로 주장한다. 공소시효란 특정 범죄가 발생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형벌권이 소멸하는 제도다. 범죄 경중에 따라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25년까지다. 한국 영화는 주로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다뤘다. 현행 살인죄 공소시효는 25년이지만, 2007년까지만 해도 15년이었다.

1991년 발생한 ‘개구리소년 사건’을 소재로 한 ‘아이들’과 1986∼91년 일어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 그리고 1991년 발생한 ‘이형호 군 유괴살해 사건’을 그린 ‘그놈 목소리’가 대표적이다. 이들 영화가 소재로 다룬 사건은 모두 2006년에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범인을 잡아도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신작 ‘내가 살인범이다’ 역시 공소시효에 대한 문제제기를 바탕에 깐 액션영화다. 연쇄살인 사건으로 여성 10명이 희생됐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고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어느 날 자신이 연쇄살인범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난다. 이두석(박시후 분)이다. 그는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책을 내면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2년 전, 그를 거의 잡았다가 놓친 형사 최형구(정재영 분)는 그의 얼굴을 보고 분에 못 이겨 주먹을 부르르 떨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건은 17년 전 벌어졌고, 공소시효는 2년 전 만료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사건은 살인죄 공소시효가 15년이었던 2007년 이전에 일어났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사람들



기발한 발상이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정병길 감독은 “‘살인의 추억’ 속 범인이 공소시효가 끝난 후 스스로 세상에 나온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영화는 미디어시대의 일면을 살짝 풍자한다. 연쇄살인범의 자기고백이 TV와 신문,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다. 온 매체가 달려들고, 세인의 눈과 귀가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 “나의 죄를 참회하고, 다시는 이런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책을 냈다”고 말하는 주인공은 이른바 ‘꽃미남’ 외모에 말솜씨까지 뛰어나다. 그러니 그가 가는 곳마다 여학생 팬이 몰려드는 등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과시한다. 흉악범도 ‘얼짱’이면 스타가 되는 기이한 세태를 반영한 대목이다.

연쇄살인범 이두석을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건 최형구 형사만이 아니다. 이두석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희생자 유가족이 복수심에 치를 떤다. 대기업 회장이나 부잣집 사모님쯤으로 보이는, 딸을 잃은 여인(김영애 분)이 다른 희생자 유가족을 불러 모아 복수를 계획한다. 가족을 잃은 뒤 은둔해 살면서 뱀과 약초를 구해다 파는 부녀, 그리고 범인을 쫓다 엉뚱한 사람을 공격해 전과자가 된 청년 등이 범인 납치 계획을 모의하고 실행에 나선다.

그 와중에 이두석은 피해자 유족을 찾아다니고 책 판매수익금을 사회에 기부하는 등 언론플레이를 하는 한편, 자신을 검거하는 데 실패한 최 형사를 농락하고 모멸한다. 최 형사는 시신을 찾지 못한 마지막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려고 이두석을 은밀히 뒤쫓고, 희생자 유가족은 그들 나름대로 작전을 펼쳐나간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화끈한 격투와 골목 추격 신, 자동차 추격전과 대규모 충돌 사고 등으로 긴박한 액션을 이어간다. 반전도 거듭된다. 이두석과 최 형사가 출연한 TV 시사토론 생방송 도중 한 시청자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와 “내가 진범”이라고 주장하고 마침내 이두석, 최 형사와 삼자대면하는 순간에 이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방송국 앞에서는 여고생을 비롯한 이두석 ‘지지자’들이 모여 “이두석을 믿는다, 이두석이 진짜 살인범”이라고 외치며 시위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진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범인은 과연 응징을 받게 될까. 자기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인물 2명과 범인 검거에 실패했던 형사가 TV 시사토론에 나란히 출연하고 다시 반전을 거듭한다.

흉악범도 ‘얼짱’이면 뜨는 씁쓸한 세상
스턴트맨 출신 감독의 진가

매력적인 스토리다. 공소시효가 지난 후 끔찍한 범행을 만천하에 밝힌 ‘꽃미남 살인마’와 그를 쫓다 실패하고 분에 찬 형사, 복수를 꿈꾸는 유가족이 포진함으로써 처음부터 보는 이의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세 진영을 중심으로 충돌과 와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달려가는 드라마의 속도와 추진력도 좋다.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길 바라는 연쇄살인마와 스타의 출현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미디어의 속성을 통해 세태를 풍자하면서도 극에 짭짤한 양념거리를 더했다.

각 요소의 이음새가 다소 거칠긴 하지만 긴박감 넘치는 액션이 그것을 충분히 상쇄한다. 정 감독은 서울액션스쿨 출신으로, 원래 스턴트맨 지망생이었다. 동료들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엮은 휴먼다큐멘터리 ‘우린 액션배우다’를 연출해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의 권귀덕 무술감독이 정 감독의 서울액션스쿨 동기이자 ‘우린 액션배우다’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다. 권 감독은 자동차 액션 전문 스턴트맨 출신이다. 119 구급차와 승용차 3대가 뒤엉키고 등장인물들이 달리는 차 위에서 격투를 벌이는 액션장면이나 대형 트레일러가 전복되는 대규모 충돌 신에서 두 감독의 장기가 십분 발휘됐다. 촬영 중 차량 14대가 완파됐다.

이 영화 외에도 최근 복수극과 흉악범죄를 소재로 다룬 작품이 잇따라 제작돼 눈길을 끈다. 개봉 예정인 ‘공정사회’와 ‘돈 크라이 마미’는 성폭행 후 살해당한 딸을 대신한 부모의 복수극을 다뤘고, ‘나쁜 피’는 강간 피해자에게서 태어난 딸이 훗날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에게 복수하려는 내용이다. 모두 공권력이 단죄하지 못한 범죄자를 피해자가 직접 응징하는 스토리다. 한국 영화에 반영된 씁쓸한 현실이다.



주간동아 862호 (p64~65)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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