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92

2017.06.14

김승용의 俗 담은 우리말

동서고금 두루 봐도 사람 바뀌는 게 얼마나 힘든지!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랴’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aristopica@gmail.com

    입력2017-06-09 18: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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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은 수전노 스크루지 영감이 크리스마스 영령 셋을 만나 자신의 과거-현재-미래를 보고 개과천선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가만히 되짚어보면 사람이 바뀌는 데는 이런 비현실적인 힘까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과천선이 매우 어려운 일임은 이와 관련한 속담이나 관습적 표현이 많은 것으로도 증명됩니다. 껍데기를 꾸민다고 알맹이가 바뀌겠느냐는 뜻의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랴’, 흉한 일을 하던 이가 고상한 척을 해도 몸에 밴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의 ‘백정이 양반 행세를 하면 개가 짖는다’(개의 감각을 속일 순 없지요), 그리고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다’ 등 여남은 개나 있습니다. 사람의 품성이 쉽게 바뀌지 않는 걸 어느 시대건 진저리나게 겪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개 꼬리 삼 년 묻어도 황모 되지 않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쥐 수염으로 만든 서수필(鼠鬚筆), 암노루 겨드랑이털로 만든 장액필(獐腋筆), 청서(靑鼠·청설모)털로 만든 청필(靑筆) 등이 좋은 붓의 이름입니다. 이 붓들보다 더 좋은 것이 족제비 꼬리털, 즉 황모(黃毛)로 만든 황필(黃筆)입니다.

    족제비 꼬리털은 매끄럽고 탄성이 좋아 명품 붓의 재료가 된다고 합니다. 족제비 꼬리털 중간쯤(끝부분은 땅에 끌고 다녀 품질이 좋지 않습니다)의 털로 황필을 만드는데, 붓을 만들기 전 털을 종이에 싸서 굴뚝 근처 땅에 오랜 기간 묻어둡니다. 그래야 털의 기름기가 자연스럽게 빠지고 기름기가 없어야 먹물이 잘 흡수되니까요.

    하지만 개 꼬리털은 아무리 오래 묻어둔다 해도 품질 좋은 황모가 못 됩니다. 삼 년 뒤 파내봐야 푸석푸석하던 개털 그대로지요. ‘사람 바뀌기 기다리기보다 버리는 게 더 빠르다’는 요즘 말처럼, 품성 나쁜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고 나아질 리 없음을 표현하는 속담입니다.



    애인이나 배우자, 자식에게 손찌검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합니다. 분이 사그라지고 난 뒤 잘못했다 하기도 하고 ‘취해서 한 실수니 용서해달라’ 무릎 꿇고 싹싹 빌기도 하지만, ‘무릎 꿇는 사람은 무릎 꿇을 일 또 한다’는 말처럼, 언제든 같은 상황이 되면 습성대로 나쁜 버릇이 다시 나옵니다. 드라마 대사에도 있지요. ‘한 번 때린 놈이 두 번은 못 때리겠나!’

    손찌검뿐 아니라 도박, 외도, 알코올중독 등 한 사람의 고장 난 내면이 드러난 행위는 웬만해서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겪거나 주변 사람과 환경이 모두 바뀌지 않는 한 말입니다. 도박을 끊겠다고 자기 손가락을 잘라버린 사람이 발가락에 화투 끼우고 하더라는 우스개가 우스개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면 다시는 안 그렇겠다고 애걸복걸해 눈 질끈 감고 용서해주면 아마 속으로 이럴 겁니다. ‘어? 봐주네. 흐흐.’

    개과천선은 상전벽해(桑田碧海)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정신 차리길 참고 기다려봐야 소중한 자기 인생만 날아갑니다. 개털은 절대 족제비털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만 개털인 것으로 모자라 타인의 인생까지 ‘개털’로 만듭니다. 망가진 물건이나 고쳐서 다시 쓸 수 있지, 제멋대로 망가진 사람은 고쳐 쓸 수도 없고 재활용조차 안 됩니다. 쓰레기는 품지 말고 내다 버려야 합니다.

    김승용은 국어학과 고전문학을 즐기며, 특히 전통문화 탐구와 그 가치의 현대적 재발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속담이 우리 언어문화 속에서 더욱 살찌고 자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고자 10년간 자료 수집과 집필 끝에 2016년 ‘우리말 절대지식’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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