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7

2012.07.23

일본의 ‘배리어 프리’ 인기 왜?

고령자 여행

  • 김동엽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 dy.kim@miraeasset.com

    입력2012-07-23 09:5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일본의 ‘배리어 프리’ 인기 왜?
    “은퇴 후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얼마 전 통계청에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이런 질문을 했더니, 전체 응답자 가운데 44%가 ‘여행’이라고 답했다. 직장에 얽매여 마음 편히 여행을 떠나기 힘든 이들에게 은퇴는 일단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비상구처럼 비칠 수 있다. 하얀 요트를 타고 푸른 바다를 가르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은퇴자의 실제 생활을 들여다보면 은퇴 전 꿈꾸던 삶과 차이가 있는 듯하다. 통계청에서 60대 이상 고령자를 대상으로 주말이나 휴일의 여가활용 방법을 조사했더니, 여행을 하는 사람은 6.9%에 불과했고, 집에서 TV나 비디오를 보며 소일한다는 사람이 66%였다. 은퇴 직후에는 부부동반 또는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나서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빈도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요양자격증 보유 베테랑이 동행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건강이 허락지 않으면 아무리 여행을 좋아해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자녀들이 큰맘 먹고 부모님 효도관광이라도 한번 보내드리려 해도 부모님 건강이 허락지 않아 단념해야 할 때가 많다. 설령 무리해서 패키지여행을 나선다 해도 여행 내내 성한 사람들을 따라다니느라 애를 먹는다. 여행 일정이 빡빡한데 행여나 일행에게 피해를 주거나 짐이 될까봐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들은 숙소나 차량에 머물기 일쑤다. 비싼 돈 내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느니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나을 뻔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몸이 아픈 고령자라고 여행을 떠날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몸이 불편한 고령자만 따로 모아 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휠체어를 탄 사람을 위한 해외여행 프로그램도 생각해볼 수 있다. 노인 문제에 대해서는 ‘인류학 교과서’라 부르는 일본을 보면, 혼자 움직이기 어려워 여행을 포기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여행상품이 있으니 참고할 만하다.

    일본의 ‘배리어 프리’ 인기 왜?
    일본에서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에게 가장 호평받는 여행상품은 ‘보조자 동반여행’이다. 예를 들어, 일본 최대 여행사 JTB가 내놓은 ‘고령 부모를 위한 여행’에는 여행 보조원이 동행한다. 트래블 헬퍼(Travel Helper) 또는 트래블 서포터(Travel Supporter)라 부르는 이들 여행 보조원은 요양자격증을 보유한 베테랑으로, 긴급 사태에 대비할 수 있어 고령자들이 안심하고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여행사는 또 고객들이 고령자인 점을 감안해 까다롭게 숙박 장소를 결정한다. 고령 고객들의 지병과 건강 상태를 반영한 식단을 제공할 수 있는지, 방에서 대중목욕탕까지의 이동이 편리한지,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등을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다. 일반 여행상품보다 20~30% 비싸지만, 고령 여행자들은 대부분 “무리해서라도 다녀오길 잘했다”고 입을 모은다. 한 번 이용한 고객은 몇 번씩 다시 찾는다는 게 여행사 측 설명이다.

    JTB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여행사인 클럽투어리즘(Club Tourism)도 고령자를 위한 여행상품으로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를 내놓고 있다. 본래 ‘배리어 프리’란 건축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휠체어를 탄 고령자나 장애인이 일반인과 다름없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주택이나 공공시설을 지을 때 문턱을 없애는 것을 가리킨다. 클럽투어리즘은 이 표현을 여행상품에 적용해 고령자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휠체어 사용자를 위해 리프트를 장착한 버스를 제공하고, 여행물품 운반을 대행하며, 식사와 목욕도 돕는다. 이 여행상품은 나이나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 이용자가 연간 1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소비 진작 및 소통의 장 기능도

    일본의 ‘배리어 프리’ 인기 왜?

    고령자를 포함해 몸이 불편한 이들의 여행을 돕는 프로그램이 각광받고 있다.

    고베(神)에 거점을 둔 NPO(Non-profit organization·비영리단체) 샤라쿠(しゃらく)도 개호(介護·혼자 힘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 환자를 대상으로 보조자 동행여행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2008년 시작한 ‘샤라쿠 여행클럽’에는 이 단체에 등록한 간호사나 보조원이 동행한다. 전문 매니저가 가족과 면담을 통해 고령자에게 적합한 여행 일정을 짜고, 호텔과 이동수단, 에스코트 도우미와 의료스태프를 결정한다. 개인사정을 일일이 고려해 여행 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대기업 여행사들이 따라 할 수 없을뿐더러, 전문가가 동행하는 여행이라 고객 만족도도 높다. 이렇게 일대일 맞춤서비스를 하다 보니 비용이 많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단점이다.

    여행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여행을 통해 건강을 되찾기도 한다. 다시는 여행을 즐길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고령자가 막상 여행을 나서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경험하곤 한다. 주위에 폐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몸도 마음도 더 쇠약해지고 만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바깥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하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샤라쿠 대표가 사업을 시작한 배경도 이와 관련 있다. 고령자의 부탁으로 휠체어를 밀면서 어르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함께 여행한 경험이 있는 대표는 “여행 과정에서 장거리 보행이 어려웠던 할아버지가 혼자 힘으로 계단을 오르고, 장시간 서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며 ‘여행은 살아가는 힘을 솟구치게 한다’는 점을 실감했다”고 말한다. 클럽투어리즘의 ‘배리어 프리’ 여행에 참여한 70대 노인도 수십 년 만에 넓은 목욕탕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기분을 잊지 못해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재활운동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다.

    고령자 여행 프로그램을 잘만 활용하면 젊은이와 고령자 간 소통의 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클럽투어리즘은 현지 기업의 신입사원 연수생들로 하여금 배리어 프리 여행에 참여해 고령자들을 보조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돕는 기회를 만들었다. 고령자 여행은 고령자들의 소비를 진작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장점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많든 적든, 몸이 건강하든 불편하든 누구에게나 여행할 자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