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6

2012.07.16

베이스 기타 한번 퉁겼다가 그만…

구자홍 감독의 ‘나는 공무원이다’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2-07-16 10: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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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스 기타 한번 퉁겼다가 그만…
    영화 ‘돈의 맛’이 물었다. “주영작 씨, 월급쟁이죠?” 주인공 주영작(김강우 분)은 재벌 회장의 비서로 무소불위 권력의 ‘대리인’이다. 고액 연봉을 받는 전도유망한 재벌 회사 사원이지만 최후의 정체성은 역시 ‘월급쟁이’다. 창업주의 늙은 비서가 주영작에게 한 말이 있다. “그래봐야, 우린 월급쟁이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영화 ‘아부의 왕’은 이렇게 충고한다. “아침에 나올 때 거울을 보고 자존심은 냉장고에 넣어둬라. 버리지는 말고. 뇌를 툭, 놔버려.”

    그래, 당신은 월급쟁이다. 한국 영화가 말하는 직장인의 생활수칙 하나.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직원은 야전(현장)보다 회사 로비나 상사의 사생활 뒤치다꺼리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다(‘돈의 맛’). 둘, 상사의 불의를 보면 꾹 참아라. 모두가 “예” 할 때 맨 앞에서 “예” 할 줄 아는 부하가 돼라. 무조건 “암요, 그럼요, 당연하죠, 별말씀을” 해야 한다(‘아부의 왕’). 셋, “흥분하면 지는 거다. 버티는 게 이기는 거다”. ‘신이 내린 직장인’이자 모든 월급쟁이의 ‘로망’인 공무원이 던지는 마지막 가르침이다.

    “공무원은 평정심의 대가”

    베이스 기타 한번 퉁겼다가 그만…

    철밥통 공무원으로 열연한 윤제문.

    한국 영화 속 월급쟁이의 삶이란 무릇 모욕과 근성, 철밥통 사이에서 벌이는 생존의 몸부림이다. 그중 ‘나는 공무원이다’의 주인공 한대희(윤제문 분)는 이른바 ‘철밥통’을 쥐고 있다. 바로 공무원이다. 그는 정년 보장에 정시 출근하고 정시 퇴근하며 월급 떼일 걱정 없는 공무원이야말로 연봉 10억 원을 받는 삼성 임원이 부럽지 않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여보세요, 여기 성미산인데요, 웬 양복 입은 남자가 목을 매가지고 자살한 것 같은데….”

    충격을 받고 말을 제대로 못 잇는 구민의 신고 전화를 받은 한대희는 상대방의 장황한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친절하고 침착하게 대응한다.

    “여기가 아니고 112에 신고하셔야 합니다.”

    자기 관할과 담당을 십계명처럼 따르고 민원과 신고 전화를 요령 있게 타 부서로 돌릴 줄 아는 그는 역시 대한민국 공무원이다. 나이 38세. 연봉 3500만 원의 마포구청 생활공해과 7급 공무원. 잦은 공연과 즐비한 유흥업소 때문에 어느 곳보다 소음과 생활 쓰레기 문제가 심각한 ‘홍대 앞’이 그의 관할 구역이다. 날마다 민원과 신고에 시달리며 사는 인생이지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건 뚜렷한 삶의 철칙 덕분이다.

    “(다짜고짜 화를 내고 억지를 부리는 민원인은) 공무원들의 천적이다. 인생의 스트레스를 공무원에게 푸는 이런 사람에게 흥분하면 지는 거다. 공무원은 평정심의 대가다. 요새 공무원을 하고 싶은 젊은이가 많은 모양인데, 스스로 다혈질이라고 생각하면 포기해라.”

    변화 없는 삶이라고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도 없다. 그는 말한다.

    “변화 없는 거, 그게 장점이다. 남는 시간엔 책을 본다. 주로 상식과 잡학, 시사 책이다. 세계 3대 열대어? 세계 3대 맥주? 이런 거 아는 척 좀 해주면 구청 동료 사이에서 좀 먹어준다. 밤이면 (TV로) 내 식구 같은 사람을 만난다. (유)재석이 형, (강)호동이 형, (이)경규 형을 보고 있으면 사는 게 재미있다.”

    베이스 기타 한번 퉁겼다가 그만…
    그랬던 그의 삶이 꼬이기 시작한다. ‘삼삼은구’(3×3=9)라는 요상한 이름의 인디밴드를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엔 해결해야 할 민원 대상으로 맞닥뜨렸다. 너무 시끄럽다는 인근 구민의 항의가 빗발치자 밴드의 지하 연습실을 찾아간 그는 밴드에게 부동산 중개업자를 소개해주며 새로운 곳을 물색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부동산 중개업자가 밴드를 속이고 계약금과 악기를 챙겨 줄행랑을 치자, 졸지에 밴드 연습실을 구해줘야 하는 난감한 처지가 된다. 그냥 뒀다간 밴드 멤버가 구청장에게 직접 민원이라도 넣을 태세다. 말썽 한 번 낸 적 없고, 시말서 한 번 쓴 적 없이 평탄했던 10년 공무원 생활이 자칫 공염불이 될 위기다. 한대희는 결국 허름하나마 번듯한 자신의 2층집 지하실을 밴드에게 내준다.

    그러던 중 밴드 멤버와 나누던 한 마디가 두 마디가 되고, 두 마디가 세 마디가 되면서 젊은이들의 고민이 그의 머릿 속에 슬며시 자리잡는다. 급기야 멤버 두 명이 생계의 어려움과 음악에 대한 견해차로 탈퇴하고 밴드가 해체 위기에 몰리자, 한대희는 당장 코앞에 다가온 음악 경연 대회 출전을 위해 베이시스트 자리를 제안받는다. 상식 책을 많이 본 덕분에 ‘세계 3대 기타리스트’나 록음악의 역사엔 누구보다 훤하지만 악기라곤 만져본 적도 없는 그다. 하지만 ‘두둥’ 한번 퉁겨본 베이스 기타가 공무원 한대희를 평생 금기였던 짜릿한 흥분 상태로 몰고 갈 줄이야.

    베이스 기타 한번 퉁겼다가 그만…
    인디 록밴드와 중년의 재발견

    ‘나는 공무원이다’는 독립영화로 제작해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선을 보였다. 당시 관객 반응이 워낙 좋았고, 작품 면면이 탄탄하다 보니 입소문이 나 이번에 대규모로 개봉했다. 우연히 국내 대중문화의 최신 유행 코드인 ‘인디 록밴드’와 ‘중년의 재발견’을 매력적으로 결합했다. 최근 MBC TV ‘일밤-나는 가수다Ⅱ’에서 국카스텐이 선전하고, KBS 2TV ‘톱밴드2’의 영향이 더해지면서 홍대 앞 등에서 활동하는 젊은 인디 록밴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졌다. 또한 ‘건축학개론’이 기대 이상의 흥행 성적을 거둔 것에서 보듯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연령층의 정서와 감성, 시대적 경험이 영화, 가요, 방송, 문학 등 사회·문화 전반에서 중요한 흐름으로 떠올랐다.

    TV와 영화에서 주로 조연으로 활약하며 연기파로 각광받은 윤제문이 단독 주연을 맡아 폭발력 있는 코미디와 공감도 높은 연기를 보여준다. 음악도 신난다.

    다시 월급쟁이 이야기로 돌아가, ‘돈의 맛’에서 주인공 주영작은 결국 삶의 모욕과 ‘돈의 맛’을 맞바꾸는 대신 최후의 순간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 ‘아부의 왕’이 된 동식(송새벽 분)은 결정적인 순간, 버리지는 않고 냉장고에 넣어뒀던 자존심을 꺼낸다. 그리고 베이스 기타를 잡은 ‘철밥통’ 한대희는 난생처음 흥분에 휩싸여 앞뒤 가리지 않는다. 한국 영화가 당신에게 외친다. ‘월급쟁이,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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