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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은의 vitamin 詩

문득 ‘젖통’이라 말하고 싶다

문득 ‘젖통’이라 말하고 싶다

문득 ‘젖통’이라 말하고 싶다
가슴을 바꾸다

한복 저고리를 늘리러 간 길

젖이 불어서 안 잠긴다는 말에

점원이 웃는다

요즘 사람들 젖이란 말 안 써요



뽀얀 젖비린내를 빠는

아기의 조그만 입술과

한 세상이 잠든

고요한 한낮과

아랫목 같은 더운 포옹이

그 말랑말랑한 말 속에 담겨 있는데

촌스럽다며

줄자로 재어준 가슴이라는 말

브래지어 안에 꽁꽁 숨은 그 말

한바탕 빨리고 나서 쪽 쭈그러든 젖통을

주워 담은 적이 없는 그 말

그 말로 바꿔달란다

저고리를 늘리러 갔다

젖 대신 가슴으로 바꿔 달다

― 임현정 ‘꼭 같이 사는 것처럼’(문학동네, 2012)에서

문득 ‘젖통’이라 말하고 싶다

보건소에서 근무한 지도 어느덧 1년 반이 넘어선다. 여기서 일하기 전까지,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보건소에 가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예방접종을 해주러 보건소에서 큰 차를 끌고 학교에 직접 찾아왔다. 수백 개가 넘는 일회용 주사기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몸서리가 났다. 팔을 걷고 기다리는 일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울지 말아야겠다고 속으로 주문을 외며 기다려야만 했다. 중학생 이후에는 그냥 집 근처 병원에 다녔다. 병원은 군데군데 있었지만, 보건소는 말 그대로 눈을 씻고 찾아봐야 했던 것이다. 보건소는 그렇게 기억 저편으로 아스라해졌다.

보건소에서 일하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보건소에 사람이 그야말로 엄청나게 찾아온다는 점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특히 많았다. 시설과 장비는 조금 오래됐지만, 보건소 진료비는 병원보다 훨씬 저렴했던 것이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방사선실. 어르신들은 대부분 가슴팍을 부여잡고 지팡이를 짚으며 힘겹게 들어선다. 할머니에게 공손하게 묻는다. “할머니, 속옷 입으셨어요?” “빤스? 입었지!” “아뇨, 위에 입는 속옷이요. 그러니까 가슴에 하는… 브, 브래… 지어.”

나는 아직까지 여성용 속옷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적이 부끄러운 것이다. “아, 브라자? 젖, 젖통에 하는 거? 했지.” 나는 순간 얼굴이 새빨개진다. 정신을 가다듬고 재빨리 대꾸한다. “네, 그거요. 탈의실 들어가서 그거 벗고 가운 입으세요.” 입에 침이 마른다. 여간 면구스러운 게 아니다.

할머니가 방사선실을 나간 뒤 나는 한동안 골똘히 상념에 잠긴다. “젖”이라니, “젖통”이라니! 머리가 크고 나서 쉬 입에서 내뱉지 못하던 단어를 연속해서 들었더니 머리가 다 어질어질하다. 그러나 젖이란 실은 얼마나 원초적인 부위란 말인가. “아기의 조그만 입술”이 젖을 연신 빨다가 결국 한 손으로 그것을 만지며 잠이 드는 광경은 그 자체로 얼마나 풍요로운가.

나는 머릿속에 있는 또 하나의 견고한 알을 부순다. 알이 없어진 자리를 ‘아랫목’ 삼아 새로운 생각을 품어본다. 젖이, 다름 아닌 젖이 세상에서 가장 “말랑말랑한 말”이 아닐까. 그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결국 “쪽 쭈그러”들거나 축 처지겠지만, 우리는 항상 젖을 갈망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옹알이를 하고 뒤집기를 하고 걸음마를 하고 말을 떼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 바로 그 부위!

“요즘 사람들 젖이란 말 안” 쓰지만, 할머니들은 쓴다. 자식에게 수년간 “빨리고 나서 쪽 쭈그러든 젖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어머니들은, 할머니들은. 젖 대신 가슴이, 가슴 대신 버스트가 세련된 것으로 간주되는 요즘 나는 문득 젖이라고, 젖통이라고 발음해보고 싶어진다. “브래지어 안에 꽁꽁 숨은 그 말”을 해방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문득 ‘젖통’이라 말하고 싶다
우리는 때때로 매우 중요한 것을 쉬 입 밖에 내지 못한다. 중요한 그것을 발설할 때, 마치 그 신성함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어린 시절에 젖 먹던 기억이 공기 중으로 산산이 흩어질 것만 같아서. 그 대신, 우리는 엄마를 또 한 차례 가슴에 고이 담는다. 앙상해진 엄마에게 다가가 힘껏 “더운 포옹”을 한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주간동아 834호 (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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