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7

2011.10.10

짧지 않은 인생 돌아보니 프로야구가 내 곁에 있었다

초등학생이 40대가 되기까지, 울고 웃으며 함께 한 30년의 추억

  • 정범준 야구 전문 논픽션 작가 vumjun@naver.com

    입력2011-10-10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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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지 않은 인생 돌아보니 프로야구가 내 곁에 있었다

    1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선동열 선수가 일본에 완투승을 거둔 뒤 한대화 선수와 기뻐하고 있다. 2 1984년 MVP를 차지한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 3 ‘자율야구’ 바람을 몰고 왔던 LG 트윈스 이광환 감독.

    행복하지만 허황한 공상에 이따금 빠지곤 한다. 아직 미혼이지만 10년 혹은 20년 후 아들과 함께 캐치볼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야구기자는 내게 “사람이라면 아들과 캐치볼을 해야 한다”는 농담을 했다. 반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야구를 추억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으면 당신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초등학교 6학년, 프로야구가 생기다

    요즘엔 초등학교지만 그때는 국민학교였다. 6학년이 되던 해인 1982년, 프로야구가 생겼다. 한 친구가 창단 6개 구단의 ‘베스트 나인’을 수첩에 적어 외우기 시작했고, 그를 본 나도 덩달아 외웠다. 곧 어린이 회원 붐이 일었다. 어느 친구는 OB 베어스의 모자와 점퍼가 예쁘다는 이유로 OB 어린이 회원이 됐고, 또 어느 친구는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이 멋있다며 해태 회원으로 가입했다.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이 됐다. 부산에 살았고, 또 부산을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이종도의 그 유명한 끝내기 만루 홈런이 작렬했던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원년 개막전을 보고난 다음 날,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일일이 소감을 물었다. 내 대답은 이랬다.

    “어제 삼성 정구왕 선수가 4타수 4안타를, MBC 정영기 선수가 4타수 3안타를 쳤는데 같은 정씨로서 자랑스럽다.”



    야구란, 추억이란, 이렇듯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내 또래와 공유하는 추억도 많다. 롯데를 응원하면서도 OB 박철순의 멋있는 몸매와 투구 폼에 마음을 빼앗겼고, 역시 OB 소속이었던 신경식의 ‘학다리 캐치’를 흉내 내며 다리를 찢기도 했다. 홈런을 치고 난 뒤 겅중겅중 뛰며 좋아하는 이만수(삼성)를 내가 응원하는 팀 선수가 아니라고 해서 미워할 수 있었겠는가. 해태 김일권이 1루에 나가면 2루를, 2루에 가면 3루를 훔치기를 바란 이가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983년이 되자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주역이 프로야구로 몰려왔다. 김재박, 한대화, 최동원, 장효조.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 뛰게 만드는 영웅이었다. 바다 건너에선 장명부라는 슈퍼스타가 날아왔다. 김진영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은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2단 옆차기를 했고, 왕눈이 이상윤(해태)은 싱거운 20승을 올리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장명부처럼 30승은 해야 ‘좀 던지는구나’ 하던 시절이었다.

    이듬해인 1984년은 최동원을 위한, 최동원에 의한, 최동원의 해였다. 더 말해 무엇하랴. 거인의 팬임이 자랑스럽고 황홀했다. ‘이제부터 롯데도 우승을 밥 먹듯 하겠구나’라는 기대는, 그러나 철저히 무너졌다. 내 눈에는 누구보다 미남이었고 쾌투를 했던 김시진, 신사 중 신사 황금박쥐 김일융이 나란히 25승을 올린 삼성이 1985년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허전하고 쓸쓸한 일이라는 걸 처음으로 느낀 나는 그해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로부터 4년간은 해태엔 황금기, 나머지 팀엔 암흑기였다. 해태 제국의 수호신 선동열은 사람이 아니었다. 괴물이라 불러도 모자랐다.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 김종모, 한대화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돌아가면서 적시타나 홈런을 때려댔다. 이순철은 나올 때마다 다음 루를 향해 뛰는 것 같았다. 제국의 몰락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사이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많은 이가 야구는 아무래도 지방 사람이 잘하는 게임이라고 생각하던 그 무렵, 곱상하고 세련된 선수로 구성된 LG가 1990년 우승을 차지하며 내 선입견을 바꿔놓았다. 김동엽 감독은 말로만 들었던 ‘빨간 장갑의 마술’을 눈앞에서 시현해 보였다. 가히 마술사의 재림이었다. 하지만 해태는 1991년과 1993년 우승을 차지하며 마법은 순간일 뿐이라고 외쳤다.

    그사이에 1992년이 있다. 전북 고창군의 한 해안초소에서 나는 롯데의 우승을 꿈꿨고, 그 꿈은 기적처럼 이뤄졌다. ‘영원한 신인왕’ 염종석이 등장한 바로 그해다. 이제는 정말 꿈처럼 아련하고 몽롱한 추억이 됐고, 꽃같이 젊었던 스물세 살의 청년이 마흔두 살이 된 지금까지 롯데는 우승컵을 차지하지 못했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아직 롯데의 우승을 꿈꾼다. 꿈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꿈인 것이다.

    1994년은 내가 제대하고 복학한 해다. 젊고 잘생긴 삼총사 유지현, 서용빈, 김재현, 그리고 선글라스가 잘 어울렸던 이광환 감독이 신바람야구, 자율야구를 선보이며 정상에 섰다. 시대가 변한 것일까. 정말 그랬는지도 모른다. 원년 우승 이후 ‘OB 꼴찌’라는 소리를 줄곧 들어야 했던 OB가 1995년 우승을 했다. 박철순의 뜨거운 눈물만 아니었다면 나는 두고두고 OB를 원망했을 것이다. 롯데가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동열이’는 가고 ‘종범이’만 남았지만, 해태는 그래도 강했다. 이종범은 바람의 역사를 써내려 갔고 해태는 2년 연속(1996·1997년) 한국시리즈의 승자였다. 그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나도, 온 나라도 외환위기를 견뎌내야 했다. 가슴속엔 늘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짧지 않은 인생 돌아보니 프로야구가 내 곁에 있었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6개 팀의 엠블럼.

    야구는 계속된다, 야구를 사랑한다

    어느 팀이든 우승할 권리가 있고, 누구의 것이든 눈물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1998년 현대 유니콘스의 우승과 정명원의 눈물. 삼미,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로 이어지며 마이너리티를 상징했던 팀이 현대라는 메이저의 역사로 편입되고 우승컵을 손에 쥐었다. 태평양 시절부터 10여 년을 한 팀에 머물렀던 정명원의 눈물은 그래서 더욱 진실하고 감동적인 것이었다.

    롯데를 다시 한 번 우승 문턱에서 좌절시킨 셈이었지만, 1999년 한화의 우승에도 나는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이정훈, 이강돈, 유승안, 장종훈으로 대표되는 공포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보유했으면서도, 고무팔 이상군과 도인 한희민, 송골매 송진우를 보유한 팀이면서도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빙그레, 한화였다. 비운의 팀이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누가 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내게 1999년은 롯데의 기적 같은 준우승이 상징으로 남은 해다. 만화 같은 호세의 홈런, 마해영의 분노의 홈런, 임수혁의 기적 같은 홈런이 있었다. 공필성과 박정태는 남자의 근성이 왜 아름다운지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밀레니엄이 바뀐 2000년, 나는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첫 직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부터 야구장을 찾기는커녕 야구 중계방송 시청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먹고사는 게 바빠서만은 아니었다. 현대에서 2루를 향해 달리는 전준호를, 삼성에서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을 치는 마해영을 나는 무심히 바라볼 수 없었다. 롯데도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연속 꼴찌 하며 야구를 등한시한 내 마음을 한결 편하게 해주었다. 이른바 ‘엘롯기 동맹’이 결성된 게 그 무렵이었다.

    쇼는 계속해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야구를 보지 않아도 야구는 계속됐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인의 유전자가 바뀐 것 같았다. 이승엽과 심정수는 홈런 경쟁을 펼치며 한국 프로야구의 50홈런 시대가 일시적이거나 돌발적으로 도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양준혁과 송진우는 서른을 훌쩍 넘겨서도 야구를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렇게 그들은 결국 전설을 썼다.

    현대 선수들은 손쉽게 두 번째 우승을 거머쥐었고(2000년), 한국시리즈에서 핸드볼 점수를 주고받은 두산과 삼성의 대결은 두산의 승리로 끝났다(2001년). 맞선을 보는 자리에서 이 ‘핸드볼 경기’를 우연찮게 봤던 기억이 난다. 2002년에는 야신 김성근, 야생마 이상훈이 이끄는 LG를 맞아 이승엽, 마해영이 삼성의 한국시리즈 한을 풀었다. 그해 양준혁의 눈물은 용광로의 쇳물처럼 뜨거웠다.

    현대와 삼성이 펼친 경제계 라이벌 다툼은 야구장에서도 이어졌다. 2003년과 2004년에는 현대, 2005년과 2006년에는 삼성이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폭우 속에서 펼쳐진 한국시리즈, 심지어 7차전도 아닌 9차전(2004년)까지 이어진 그때의 경기를 특히 잊을 수 없다. 땀과 눈물, 빗물로 범벅이 된 선수들의 열정과 투혼은 아름다운 동시에 감동적이었다.

    짧지 않은 인생 돌아보니 프로야구가 내 곁에 있었다

    1 2004년 빗속에서 열린 사상 최초의 한국시리즈 9차전. 이 경기에서 8대 7로 승리한 현대는 2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2 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 뒤 SK 김성근 감독(왼쪽)이 나주환 선수로부터 샴페인 세례를 받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 아닌 나만의 리그로

    다시 야구를 보고 야구장을 찾게 된 것은 2005년부터였다. 롯데가 시범경기에서 1위를 했다. 그때 나는 첫 책을 쓰며 나의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원고를 쓰지 못할 때면 야구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는 게 낙이었다. 롯데의 양상문 감독은 “레알 마드리드라고 항상 우승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고, 현대 김재박 감독은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고 말했다. 그해엔 양상문의 말이 틀리고 김재박의 말이 맞았다. 롯데는 ‘내려가’ 5위를 했고 ‘레알 마드리드’ 삼성은 신임 선동열 감독의 지휘 아래 우승을 차지했다. 삼성은 이듬해에도 가장 끝까지 남은 승자였다.

    2007년 새로운 제국이 등장했다. SK 김성근 감독은 “야구는 감독이 한다”는 신념을 혼으로 승화시킨 사람 같았다. 두산은 끈끈함, 허슬플레이, 뚝심을 상징하는 팀으로 변모했다. 이종욱, 고영민, 김현주, 김동주 등 두산 타선의 위압감은 대단했지만, 두산이 잠시 당황한 사이 SK는 일구이무(一球二無) 정신으로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해 SK가 아니라 두산이 우승했다면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2008년은 내가 다시 태어난 해다. 최동원 평전을 출간했고 사회인 야구를 시작했다. 이제 야구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었다. 내가 하는 야구, 나만의 야구가 생긴 것이다. SK는 2007년부터 4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며, 2009년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정상에 올랐다. 그런 이유로 2009년 극적인 우승을 차지한 KIA 팬이 무척이나 부럽다. 열 번 한국시리즈에 올라가 열 번 다 우승을 차지하다니 정말 복 받은 팬이지 않은가. 하지만 내게는 끝내기 홈런을 친 나지완의 눈물과 그 홈런을 허용한 채병룡의 눈물이 같은 크기로 다가온다.

    언젠가 책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나는 야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이렇게 말하니 가슴까지 시릴 정도다. 나는 야구를 애틋하게 추억한다. 아마 죽는 날까지 그럴 것 같다. 내게는 나만의 야구가 있고, 나는 나만의 야구를 한다.” 세월이 이처럼 흐른다면 나도 곧 쉰, 예순을 지나 칠순, 팔순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 소주 한 병쯤은 마실 수 있는 건강과 능력, 야구장을 찾아 ‘부산갈매기’를 부를 수 있는 기력이 허락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의 얘기다. 무엇보다 행복한 것은 아직 올해 야구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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