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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영을 바꾸는 ‘인문학의 힘’

조직 창의성 제고에서 미래 예측, 제품 개발까지…경영 돌파구로 쓰임새 급속 확장

  • 한일영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ilyoung.han@samsung.com

경영을 바꾸는 ‘인문학의 힘’

PT크루저. 2000년 다임러크라이슬러(이하 크라이슬러)는 복고풍 스테이션 웨건 자동차를 내놓았지만, 사실 이 회사의 독일인 경영진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설비가 부족한 멕시코의 한 공장에만 생산을 맡긴 것도 당시 디자인과 사양으로는 시장에서 도저히 성공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독일인에게 자동차는 곧 ‘엔진’인데, 초기 PT크루저는 엔진이 강력하지 않았으며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는 유선형 디자인도 아니었다.

이 무렵 크라이슬러는 인류학 전문가에게 의뢰해 자동차에 대한 미국 소비자의 무의식적 욕구를 분석했다. 그 결과, 어린 시절에 본 머스탱이나 비틀 같은 ‘독특한 자동차’에 대한 동경과 처음 자동차 열쇠를 받았을 때의 떨리는 해방감이 미국 소비자의 공통된 경험임을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크라이슬러는 PT크루저의 디자인 콘셉트를 ‘독특하면서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차’로 잡고 전면부 그릴 확대와 후면부 창문 설계 변경 작업을 단행했다. 알 카포네 같은 갱이 타던 옛날 자동차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었다. 결과는? 5년간 100만 대를 팔아치우는 대박이었다.

이 사례는 소비자와 시장에 대한 직관을 얻기 위해 실제 소비자가 활동하는 공간에서 그 행동과 감정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인류학의 ‘민족지(ethnography)’ 기법을 경영에 활용한 경우다. 이는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태도, 소비 방식, 소비 동기를 연구해 이면에 숨겨진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해석하는 것으로, P·G나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이 제품 개발과 마케팅 과정에서 채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힘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다른 기업과 기술이나 가격을 차별화하는 것만으로는 경쟁우위를 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인문학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로 등장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창의적인 정보기술(IT) 제품은 애플이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구글은 2011년 신규 채용자 6000명 가운데 인문학 전공자를 5000여 명 채용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최고경영자(CEO)도 인문학에 큰 관심을 보이며, 그 중요성도 충분히 인식한다. 그러나 실제 기업경영에서 이를 접목하는 작업은 아직 어려움이 많다. 8월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 회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CEO와 임직원이 사내외 인문학 교육과정을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배양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활용하는 작업은 부진했으며, 인문학과의 접목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응답도 35.7%나 됐다. 갈 길이 먼 것이다.

인문학을 기업경영에 접목하려는 사람이 부딪히는 첫 번째 질문은 ‘과연 어디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다. 실제로 구체적인 성과를 나타낸 사례를 보면 그 쓰임새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먼저는 조직의 창의성을 제고하는 작업, 다음은 미래 경영환경을 예측하는 수단, 마지막은 제품을 개발하고 디자인하는 과정에서의 활용이다. 다시 말해 임직원과 미래, 소비자를 이해하는 데 인문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조직을 이해하는 데 인문학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살펴보자. 마크 주커버그가 20세의 젊은 나이에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연결한다’는 상상력으로 페이스북 열풍을 만들어낼 수 있던 배경에는 그의 인문학적 통찰력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페이스북은 독보적인 기술력을 상품화한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남이 ‘보면서도 보지 못했던’ 부분에 주목한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남다른 점이었다. 주커버그는 하버드대에서 컴퓨터공학과 심리학을 전공했고,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로마 신화 관련 책을 탐독하는 등 고대 역사와 문학에 조예가 깊다. 페이스북 회사 입구에 붙은 ‘우리는 기술 회사인가?’라는 질문은 기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문학적 상상의 세계가 페이스북의 지향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류의 먼 미래 예측에도 유용

경영을 바꾸는 ‘인문학의 힘’

다임러크라이슬러가 2000년 출시한 PT크루저. 20세기 초반의 자동차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 콘셉트는 인류학 조사기법을 통해 도출한 결과물이다.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인재를 확보하고, 나아가 이들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기술공학 중심의 문화를 지닌 구글도 채용 면접에서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문학적 상상력을 평가한다. 포스코는 신입사원 채용과 임직원 교육에서 ‘문리(文理) 통섭형’ 인재관을 강조한다.

이 때문에 임직원 교육에 인문학 프로그램을 강화해 창의성을 함양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토이스토리’ ‘카’ 등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픽사(Pixar)는 사내에 ‘픽사대학’을 설립하고 글쓰기, 문학, 철학, 즉흥연극 등 100여 개 강좌를 운영하면서 직원의 창의성 배양에 힘쓴다. 임직원 교육에 인문학 프로그램을 강화해 창의성을 함양하는 대표적인 경우다. 이러한 노력은 영화 ‘카’ 시나리오의 질을 높이는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졌다. ‘카’ 제작진은 미국의 66번 국도에 정통한 역사학자 마이클 윌리스와 함께 이 도로를 여행하면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인문학적 소양은 기업 내부의 창의성을 배양하는 작업뿐 아니라, 기업문화를 진단하고 근본적인 변화 방향을 제시하는 데도 활용할 수 있다. 기업문화 컨설턴트인 신상원 박사가 저술한 ‘기업문화 오디세이 1’에 따르면, 아모레퍼시픽의 기업문화를 진단한 결과 상당수의 매장 직원이 자기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부족했다. 이에 대한 처방은 모든 공동체의 문화가 신화와 상징, 의례로 구성됐다는 종교학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이었다.

먼저 ‘신화 만들기’에 돌입해 아모레퍼시픽 창업자가 어린 시절 부친을 도와 운영했던 창성상회에서 회사의 기원을 찾았다. 그리고 브랜드 매장 ‘휴 플레이스’의 부진에 대해서는 고난과 굴곡의 시기라 규정한 뒤 새롭게 구축한 ‘아리따움’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부활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상징 만들기’의 일환으로 매장 직원을 동화 속 요정인 ‘아리엘’로 명명했다. 단순한 화장품 판매원이 아니라 ‘고객의 아름다움을 관리해주는 뷰티 컨설턴트’라는 개념을 도입해 직원에게 소명감과 자부심을 부여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각 매장 매니저가 주관하는 아침조회를 통해 핵심가치를 확인하고 정기적으로 축제를 개최하는 ‘의례 만들기’ 요소를 도입해 직원의 자긍심을 고취했다.

이러한 활용 방식으로 조직 내부에 주목한다면, 거시적 안목을 중시하는 인문학을 통해 장기적인 경영 환경을 예측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특히 경영학 기법으로 상징되는 기존 사고의 틀이나 전제에서 벗어나 거시적 트렌드를 읽고 인류의 먼 미래를 예측하는 데 인문학이 유용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휴렛팩커드(HP)의 CEO를 역임한 칼리 피오리나는 중세사를 전공한 역사학도 출신으로, 르네상스의 출현과 디지털 신기술을 동일한 ‘역사적 신기원’으로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한 바 있다. 또한 많은 선진 기업은 미래 예측 분야의 전문성을 기업의 중·장기 전략이나 비전 수립에 활용한다. 이를 위해 전담 인력과 조직을 구성하고 실행 부문에 적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경영을 바꾸는 ‘인문학의 힘’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팰러앨토에 있는 페이스북 본사 사무실. ‘우리는 기술 회사인가?(Is this a technology company?)’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IBM, 엑손모빌, GE 등은 사내에 미래 연구 및 예측을 담당하는 부서를 설립하거나 미래 예측가를 영입한 바 있는데, 특히 IBM의 전담부서에는 자연과학자, 공학자와 함께 인문학자가 참여했다. IBM의 ‘글로벌 혁신 전망(Global Innovation Outlook)’이 많은 기업이 참고하는 미래지침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텔의 경우, 2010년 컴퓨터와 인터넷, 모바일 기술의 미래 발전 방향이나 인간과의 소통방식 연구를 강화하려고 ‘상호작용 및 경험(Interaction · Experience Research) ’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 소장은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제네비브 벨 박사로, 그의 주도하에 엔지니어와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전문가는 물론 디자이너, 인류학자, 심리학자, 심지어 SF소설 작가까지 함께 일한다.

훨씬 구체적인 적용 방식도 있다. 제품을 개발하고 디자인하려면 인간의 본질적인 행동패턴과 직관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오랜 세월 인간이 물건을 다뤄온 방식, 감각기관으로 수집한 정보가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 지식전달 체계 같은 ‘인간에 대한 이해’야말로 디자인의 기초인 셈이다. 특히 스마트폰처럼 사용자가 빈번하게 조작하는 IT 제품에서 사용자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는 인간의 행동패턴과 직관을 반영해야 하는 대표적인 분야다. IT 제품의 기술적인 차별성이 점차 줄어들면서, 이렇듯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을 반영한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발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구글 엔지니어링 담당이사인 데이먼 호로비츠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발을 위해 사람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작업에서는 인류학자와 심리학자가 가장 뛰어난 결과를 만든다”고 말했다. 디자이너가 시각적 미려함을 중시하고 엔지니어가 기술 측면에 집중한다면, 인문학 전문가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에 부응하는 제품을 개발하는 데 기여한다. 인문학과 각 분야 전문가가 아이디어를 합치고 발전시켜 창의적이면서도 기발한 디자인과 콘셉트를 도출해나가는 것이다.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에서는 철학과 동양사학, 어문학, 사회학 등 다양한 전공자가 디자인 및 기술 인력과 협력해 제품 콘셉트 개발에 전념한다.

매개자가 중요하다

인문학을 경영에 적용한 여러 사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접목이 지식이 아닌, 관점의 접목이라는 사실이다. 경영 전반에 걸쳐 인문학 관점과 이를 통해 구축한 가치관 혹은 세계관을 접목하는 것이 중요하지, 단순한 인문학적 기법을 도입하거나 일회성 교육 이벤트로 활용해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인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학문으로서의 지식이나 기법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한 인간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지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경영 과정에서 인문학을 포용하려면 무엇보다 조직 내부의 다양성을 키운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기존 조직문화의 특성이나 인력의 다양성 정도를 감안해 그에 알맞은 방식을 택해야 한다.

또한 경영과 인문학의 효과적인 접목을 위해서는 매개자(facilitating unit)가 반드시 필요하다. 매개자는 인문학적 식견과 시장에 대한 전문성을 모두 갖춰 양쪽 언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적 사고가 경영 현장에 뿌리내릴 수 있으려면 먼저 CEO가 매개자로서 조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CEO 자신이 인문학적 소양을 쌓을 필요가 있다. “가장 감명받은 책 혹은 좌우에 두는 책을 들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논어’라고 말한다. 나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바로 ‘논어’”라는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의 말을 곱씹게 되는 이유다.



주간동아 807호 (p40~42)

한일영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ilyoung.han@sams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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