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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신나는 가을 ‘野敎’에 미치다 01

‘연고’가 아닌 ‘담론’ 프로야구에 빠진 대한민국

경기는 물론 보는 방식까지 즐기는 ‘핫 스포츠’

  • 위근우 텐아시아 기자 eight@10asia.co.kr

‘연고’가 아닌 ‘담론’ 프로야구에 빠진 대한민국

‘연고’가 아닌 ‘담론’ 프로야구에 빠진 대한민국

프로야구가 1982년 출범 이래 최초로 한 시즌 ‘600만 관중’을 달성한 9월 13일, SK와 넥센의 경기가 열린 인천 문학야구장을 찾은 관중이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8월 9일 부산 사직구장은 ‘손에 손잡고’나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 같은 노래가 울려 퍼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롯데가 대승한 날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팀, 그것도 약체라고 평가받는 넥센 히어로즈의 승리였다. 이날이 특별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786일 만의 선발승, 혹은 18연패 후 첫 승. LG에서 넥센으로 이적한 비운의 투수 심수창이 첫 승을 거둔 날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대팀인 롯데를 비롯해 나머지 7개 구단의 팬 모두가 그의 승리를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동안 애썼다는, 마음고생 많았다는 위로 어린 축하였다.

이 짧은 장면은 현재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왜 가장 뜨거운 스포츠인지, 이 어마어마한 팬덤(fandom)의 힘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를 잘 보여준다. 팀을 넘나드는 인간적인 정이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다. 심수창이라는 미남 선수에 대한 관심 때문만도 아니다. 한 선수가 그려온 궤적이 성적과는 별개로 또 하나의 감동적인 서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2011년 프로야구 팬덤의 가장 독특한 지점이다.

연고제 1차 지명권 폐지의 연쇄효과

솔직히 말하자면 그 무슨 어휘를 동원해가며 우회적으로 표현하려 해도 프로야구 팬덤의 기저에 지역감정이 튼튼히 뿌리박혔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지금이야 태어난 곳을 기준으로 자기 팀을 갖는 것을 ‘쿨’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정서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부산이 고향인 사람에게 롯데는 ‘꼴데’이던 시절에도 애증의 ‘우리 팀’이었고, 1980~90년대 해태 왕조는 전라도 사람에게는 현실의 상실감을 극복하게 해주는 단 하나의 오아시스였다. 상대팀의 순위가 어떻든 두산과 LG가 언제나 라이벌 정서를 바탕으로 싸우는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잠실구장을 공유하는 서울 연고의 두 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뿌리가 KIA 타이거즈 팬을 ‘홍어’라고 비하하는 지역차별적 정서로 이어지는 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지만, 지역차별과 지역감정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연고지에 대한 프라이드가 촌스러울지는 몰라도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프로스포츠가 뿌리내리는 데 그보다 더 튼튼한 토양은 없다. 세계 3대 축구리그를 지닌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를 보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시티의 맨체스터 더비, AC밀란과 인터밀란의 밀라노 더비,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 클라시코 더비는 모두 지역감정에서 출발한 전쟁 같은 라이벌전이다.



‘아내는 바꿀 수 있어도 축구팀은 바꿀 수 없다’는 영국 스포츠팬의 구호를 가장 비슷하게 연결할 수 있는 한국의 문화상품은 축구팀이 아닌 프로야구팀이다. 영국 축구팬의 경우 국가대표의 월드컵 성적보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프리미어리그 성적이 더 중요한 데 비해, 한국 축구에서는 거의 모든 관심이 국가대표팀에만 쏠리고 정작 국내 팀의 순위에는 관심이 적지 않은가. 이러한 K리그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국내 프로야구 팬덤이 왜 그토록 튼튼한지 짐작할 수 있는 단초가 풀린다.

그러나 팬덤이 종교적 맹신을 넘어 다양한 논의를 가능케 하는 하나의 문화가 되려면, 먼저 우리 팀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넘어서야 한다. 2011년의 프로야구 팬덤이 그 어느 때보다 흥미로운 이유는 그토록 단단한 기반을 갖춘 팬덤이 단순히 응원을 넘어 야구 자체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방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 오빠’를 응원하던 아이돌그룹 팬이 어느 틈엔가 후크송 작곡 방식이나 K팝 시장 전체에 대한 혜안을 갖게 된 셈이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이 승승장구하거나 치열한 한일전을 펼칠 때 우리 팀이 이기기를 바라는 건 쉽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임창용이 이치로와 왜 승부를 펼쳐야 하는지, 그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등 경기 후 발생하는 수많은 논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프로스포츠 가운데 가장 복잡한 룰과 전술을 가진 야구를 공부해야만 한다. WBC 선전을 비롯한 외부적 요인 덕분에 2008년부터 꾸준히 늘어난 신규 야구팬은 기존의 지역연고 팬덤을 학습하는 동시에 야구 자체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야구 아는 여자’ 같은 입문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여성으로 대표되는 초보 팬의 증가는 야구에 대한 쉽고 체계적인 설명에 대한 수요를 폭발시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존의 팬덤 역시 전투적이고 배타적이기만 한 과거 방식을 고집할 수 없게 됐다. 특히 2010년부터 연고제 1차 지명권 자체가 사라지면서 더는 그 팀이 그 지역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해졌다. 그렇다면 새로운 팬을 우리 팀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뿐이다. 왜 우리 팀의 야구가 다른 팀보다 재미있는지, 다른 팀을 놔두고 왜 우리 팀을 좋아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지역연고를 통해 30여 년 동안 누적된 프로야구에 대한 담론은 좀 더 게임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야구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토론도 단순히 우리 팀이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수준을 넘어 데이터를 분석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SK 김광현의 얼굴이 좋아 ‘야구 팬질’을 시작했다면, 그가 결코 류현진에 비해 과대평가된 선수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평균 자책점 같은 개념을 공부해야 한다.

즐기는 방식마저도 즐겁다면

‘연고’가 아닌 ‘담론’ 프로야구에 빠진 대한민국

8월 18일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와 SK 와이번 스 경기에서 SK 팬이 김성근 감독 경질에 대해 항의성 플래카드를 들고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요컨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두산 팬은 두산을 사랑한다. 다만 지금의 팬은 김경문의 사임이 가져온 전술적 후폭풍과 관련해 내년에 대비한 리빌딩(rebuilding) 계획을 걱정하고 ‘허슬두!’(2000년대 중반 근성 넘치는 야구를 펼치던 두산을 일컫는 응원구호)로 부활하려는 좀 더 디테일한 바람을 갖는다. 앞서 다양한 논의가 가능할 때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지금의 프로야구만큼 팬덤 내에서 다양한 담론이 오가는 영역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의 팬은 어제 경기 결과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넘어 팀의 야구철학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야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이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표현하지만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 대부분이 드라마 평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야구에서는 일어난다. 얼마 전 김성근 감독을 경질한 SK에 대한 팬의 반응을 보라. 그들에게 김 감독은 그저 SK를 거친 한 명의 감독이 아니라 지금의 SK가 SK 야구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롯데의 신임감독인 양승호는 롯데 특유의 화끈한 야구를 살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즌 초반 팬의 엄청난 압박을 받아야 했다.

앞서 언급한 심수창의 경우도, LG 팬은 그가 이어오던 18연패뿐 아니라 팀이 8위를 기록했던 2006년 암흑기에 그가 건져 올린 10승도 함께 기억한다. 승수를 기록하지 못한 786일이라는 숫자와 함께 그동안 가려져 있던 데이터 밖 이야기, 즉 잘 던지고도 타선이 침묵하거나 불펜이 승리 여건을 날려먹었던 불운 역시 고려할 줄 아는 것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래 승부는 언제나 치열했다. 그럼에도 2011년 프로야구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면 팬 모두가 그 승부의 서사를 서로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 됐기 때문이다. 혹은 그 서사에 직접 뛰어드는 주체가 됐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데, 그것을 즐기는 방식까지 재미있게 발달한 텍스트가 있다면 과연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아예 보지 않는다면 빠지지 않을 수도 있다. 2011년 현재 프로야구 팬이 아닌 채로 사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프로야구를 보면서도 야구에 미치지 않기가 쉽지 않은 일임에는 분명하다.

인터넷 달군 야구 유행어

양승호구가 어느새 양승호굿 됐네


‘즐기는 방식조차 즐거운’ 야구의 매력이 가장 빨리, 가장 활발하게 퍼져 나가는 곳은 단연 인터넷이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경기 룰, 쏟아지는 통계수치를 단번에 정리할 수 있는 다양한 유행어와 은어가 오가는 곳 또한 사이버 공간이다. 온라인을 달군 대표적인 유행어를 통해 살펴본 2011년 프로야구 팬덤의 주요 사건.

1. 믿고 쓰는 넥센산(産)

격언 넥센에서 이적한 선수가 새 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는 경우를 일컫는 말

유의어 넥센 마켓

재정 형편이 어려운 넥센은 2009년 이후 핵심 전력이나 유망주를 다른 팀 선수와 바꾸는 납득하기 어려운 트레이드를 여러 차례 진행했다. 최근 3년간 넥센이 트레이드한 선수만 해도 장원삼, 이현승, 이택근, 마일영, 황재균, 고원준, 송신영, 김성현 등 총 8명. 공식적으로는 선수 대(對) 선수 맞트레이드 형식이 많았지만,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대의 현금을 받고 선수를 내준 것 아니냐는 팬의 비판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새 팀에서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반면 넥센은 성적 부진을 면치 못하는 것을 비꼬는 말이 바로 ‘믿고 쓰는 넥센산’이다.

2. 양승호구 → 양승호굿

‘연고’가 아닌 ‘담론’ 프로야구에 빠진 대한민국
고유명사 시즌 초반과 후반 전혀 다른 성적을 보여준 롯데의 양승호 감독(오른쪽 사진)을 일컫는 말

유의어 양승호감, 양승호쾌, 양승호걸, 양승호랑이, 양승호날두

올 시즌 롯데는 팀을 3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던 제리 로이스터 감독과 재계약하지 않은 대신, 고려대 야구팀 양승호 감독을 14대 감독으로 영입했다. 시즌 초반 부진한 성적에 로이스터 감독에 대한 팬의 ‘그리움’이 결합하면서 양 감독의 이름에 ‘호구’라는 비아냥거림을 합성한 말이 ‘양승호구’. 그러나 7월과 8월 승률 1위를 내달리며 팀 성적이 일취월장하자 이 별명은 이름에 ‘굿(good)’을 결합한 ‘양승호굿’으로 탈바꿈했다. 올 정규시즌 동안 드라마틱한 야구를 보여준 롯데의 고진감래(苦盡甘來)를 한눈에 보여주는 은어.

3. 나믿가믿

줄임말 삼성 류중일 감독이 외국인 타자 라이언 가코에 대해 언급했다는 ‘나는 믿을 거야, 가코 믿을 거야’라는 문장의 축약어

반대말 괜믿가믿

2010년 12월 삼성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에서 뛰었던 메이저리그 출신 외국인 타자 라이언 가코를 영입했다. 시즌 개막 이후 그는 기대와 달리 괄목할 만한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류중일 감독은 그를 꾸준히 기용하면서 ‘나는 믿을 거야, 가코를 믿을 거야’라고 신뢰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가코는 결국 올 시즌 58경기 2할4푼3리 1홈런 28타점의 성적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2군으로 내려간 뒤에는 왼손 중지 골절상을 입어 삼성에서 퇴출당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 네티즌은 ‘나믿가믿’을 ‘괜믿가믿(괜히 믿었어, 가코 괜히 믿었어)’로 대체했다.

4. 출첵 야구

줄임말 명사 마치 출석체크를 하듯 불펜 투수를 계속 등판시키는 경기 운영 스타일

유의어 벌떼 야구

투수 교체는 감독이 경기 흐름이나 분위기를 일신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특히 김성근 전 SK 감독은 상대팀 다음 타자의 성향이나 스타일에 강한 투수를 기용하는 등 매우 디테일한 차원에서 불펜 투수를 활용하는 특유의 야구 스타일을 보여주기도 했다. 거의 모든 선수를 경기에 동원한다는 뜻에서 출석체크(출첵) 야구, 혹은 벌떼 야구라고 부르는 이러한 경기 운용 방식은 현대 야구의 수비 집중 경향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점에서 “경기 맥을 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매 경기 최선을 다하는 자세 아니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5. 임작가, 정작가

고유명사 이기던 경기에 등판한 마무리 투수가 대량 실점을 허용해 역전패당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작가’에 특정 선수의 성(姓)을 결합한 말

연결어 불쇼, 블론세이브

‘연고’가 아닌 ‘담론’ 프로야구에 빠진 대한민국
야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승부는 역시 9회 역전일 터. 낙승을 기대하는 상황에서 등판한 마무리 투수가 ‘불쇼’라 부르는 대량 실점을 허용하며 역전패당하면 팬의 원성이 한 몸에 쏟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선수 개인으로도 ‘세이브 스코어를 날려버린다(blown save)’는 점에서 뼈아플 수밖에 없다. 롯데 임경완(오른쪽 사진)과 두산 정재훈이 한때 ‘작가’로 불린 대표적인 선수. 그러나 이들은 2009년과 2010년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불명예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6. 유다만수

고유명사 합성어 김성근 감독 경질로 공석이 된 SK 사령탑을 물려받은 이만수 감독대행의 이름에 예수를 배신한 제자 가룟 유다의 이름을 붙인 말

8월 18일 SK의 김성근 감독 전격 해임은 SK팬뿐 아니라 야구계 전체에 일대 충격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경기장에 난입해 유니폼을 불태울 정도로 악화한 팬의 감정은 지휘봉을 넘겨받은 이만수 감독대행을 향해 쏟아졌고, 네티즌은 ‘인천 예수’라 부르던 김 감독을 배신했다는 뜻에서 ‘유다만수’라는 새 별명을 만들어냈다. 현역 시절에는 ‘헐크’, 코치가 된 후에는 ‘옆집 아저씨’로 불리며 사랑받았던 그로서는 사실상 처음 경험한 ‘안티 행렬’. 이 감독대행은 이후 첫 승 인터뷰에서 “김 전 감독에게 영광을 돌리겠다”고 말하는 등 낮은 자세를 취하며 팬심을 달래려 부심하는 중이다.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주간동아 807호 (p22~25)

위근우 텐아시아 기자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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