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3

2011.09.05

“일자리 창출할 사회적기업 육성 선택 아니라 필수죠”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류시문 원장 “취약계층에 희망 줘야 상대적 빈곤 극복”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11-09-05 10: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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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자리 창출할 사회적기업 육성 선택 아니라 필수죠”
    어린 지게꾼은 한쪽 다리를 절며 힘겹게 산에 올랐다. 말 없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며 땅을 치고 대성통곡했다. 눈물에 주변의 눈이 다 녹을 정도로 펑펑 울었다. 지게꾼은 일곱 살 무렵 한쪽 다리를 다치고 비슷한 시기에 고막마저 터진 장애인이었다.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형편도 넉넉지 못했다. 그에게 아버지는 “그런 몸으로는 군대 못 간다. 출세는커녕 제대로 취직이라도 하겠느냐”며 같이 농사짓자고 했다. 정말 이대로 삶은 끝나는 것인가. 지게에 가득한 나무보다 가난과 장애가 더 무겁게 그를 내리눌렀다. 어린 지게꾼은 한바탕 울고 난 뒤 다짐했다.

    “나는 커서 평생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

    완고한 아버지의 바지 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동생의 양보로 겨우 중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우려처럼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갔지만 귀가 안 들리는 탓에 늘 친구의 노트를 빌려 공부해야 했다. 청각장애로 인한 불안감으로 공황장애까지 겪어야 했다. 좌절의 나락에 떨어지려는 찰나, 그에게 노부부 교수가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어린 시절 좌절이 키운 나눔의 삶

    “장애란 사람이 지닌 수많은 특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너 역시 남을 돕는 삶을 살 것이다.”



    그는 다시 힘을 냈다. 벌여놓은 사업이 조금씩 자리 잡으면서 “평생 어려운 이들을 돕겠다”던 자신과의 약속을 실천해나갔다. 그렇게 기부를 시작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어느덧 그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회원이 됐다. 아너 소사이어티는 개인으로서 1억 원 이상 고액을 기부한 사람들의 모임인데 그는 서울에서 첫 번째, 전국을 통틀어 두 번째로 회원이 된 것이다.

    8월 26일 경기 성남시에 자리한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이하 진흥원)에서 만난 류시문(63) 원장은 어린 지게꾼 시절의 다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기부는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받았던 은혜를 갚아나가는 것”이라고 겸손해했다. 그 자신이 지독한 가난과 장애로 누구보다 큰 어려움을 겪었기에 기부와 나눔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아는 것이다. 적을 때는 십만 원씩, 많을 때는 몇천만 원씩 ‘통 큰 기부’를 하면서 꾸준히 나눔을 실천해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남에게 등 떠밀린 것도, 치사를 받기 위한 것도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부였다.

    “자꾸 가지려 하면 더 갖지 못하는 자신이 나약해지고 미워지겠지만, 나누려 하다 보면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삶의 동력이 됩니다. 제 몸은 비록 장애인이지만 내적으로는 누구보다 활력이 넘칩니다.”

    나누는 것이 뭐 어렵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일반인이 선뜻 기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항상 조건이 따라붙는다. 내가 좀 먹고살 만하면, 자녀 결혼만 시키면, 집 한 채만 장만하면 기부하겠다는 식이다. 그는 “이런 사람은 아마 죽을 때까지 기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기부는 자신을 덜 채운 상태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저의 기부액도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끊임없이 절약해서 모은 것입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는 말처럼 많이 가져서가 아니라, 나누는 그 자체에 가치를 둬야 합니다.”

    그 역시 부자라서 기부를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더 많이 기부하려고 허리띠를 졸라맸을 뿐이다. 다리가 아프지만 자동차 유지비가 아까워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 때문에 정상이던 다리 관절마저 마모돼 지팡이에 의지해 산다. 집의 냉장고가 낡아 붉게 녹슬었을 때도 그 속은 괜찮지 않냐며 아내의 불만을 잠재웠다. 생일에 외식하자는 아들의 칭얼거림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가족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울 따름입니다. 저의 기부활동에 가족이 어느 정도 동의한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더 채우려 기를 쓰지만, 저는 그저 덜어내면서 살고자 합니다.”

    일자리 제공이 최고 복지

    “일자리 창출할 사회적기업 육성 선택 아니라 필수죠”

    류시문 원장(왼쪽)은 강연료를 모아 사회적기업에 근무하는 취약계층 근로자 자녀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하지만 기부로 얻는 뿌듯함과는 별도로, 자신이 기부한 것이 정말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많았다. 실상 기부를 해도 상대방의 반응은 그때뿐이었다. 기부금을 받았다는 영수증도 제대로 없었고, 도대체 그 기부금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현금 기부 방식에 의문을 갖게 되면서 근본적으로 이들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활할 수 있도록 도울 방법은 없는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시기에 ‘사회적기업육성법’을 접했습니다. 책도 보고, 실제 사례도 접하면서 취약계층에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최고의 복지라는 신념을 갖게 됐습니다.”

    그가 단순한 기부가에서 사회적기업을 지향하는 경영가로 변신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09년 10월 사회적기업 육성법보다 더 엄격한 규정을 정관에 담아 (주)한맥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재활복지대학에 다니는 장애인들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취약계층인 고령자를 위한 일자리도 창출했다. 젊고 건강한 이들을 채용했을 때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 회사가 손해를 봤음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사회적기업은 이윤 추구가 목적이 아닙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회적기업만큼 훌륭한 대안은 없습니다. 예컨대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꼽히는 것은 빈부격차에 따른 양극화인데, 사회적기업은 취약계층에 일자리와 사회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재기의 기회와 희망을 갖고 상대적 빈곤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일조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류 원장은 일자리 제공이 최고의 복지라고 했다. 대책 없는 복지는 미래 세대에 엄청난 짐을 넘겨줄 뿐이라며,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취약계층 문제와 복지 문제는 국민 세금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입니다. 스스로 땀 흘리고 노력해 얻은 소득으로 생활수준을 높여 나가야 합니다.”

    사회적기업이 복지의 최우선에 설 수 있다는 믿음도 바로 이런 생각에서 비롯했다. 취약계층이 사회적기업을 통해 스스로 땀 흘려 번 소득으로 중산층 이상으로 힘차게 올라설 수 있다면 이보다 효과적인 복지는 없다. 늘린 일자리가 취약계층에 돌아가면 계층 간 갈등도 줄어들어 좀 더 안정된 복지사회를 만들 수 있다. 정부는 2012년까지 1000여 개 사회적기업을 육성해 일자리 5만 개를 창출하려 한다.

    “사회를 안정되고 조화롭게 유지하려면 가진 자의 수레바퀴와 덜 가진 자의 수레바퀴가 조화롭게 굴러가야 합니다. 사회적기업은 덜 가진 자의 수레바퀴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돕습니다. 사회적기업 육성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상생의 협력적 네트워크’ 구축

    “일자리 창출할 사회적기업 육성 선택 아니라 필수죠”
    2월 22일 정부 차원에서 진흥원을 만든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사회적기업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진흥원의 ‘존재 이유’다. 단순히 사회적기업을 인증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기업을 발굴하고, 이들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담당한다. 류 원장은 진흥원 출범과 함께 초대원장으로 취임했다.

    “처음 진흥원 원장직을 제안받았을 때는 거절했습니다. 저는 9급 공무원 끝자락에도 못 가본 사람입니다. 지연, 혈연, 학연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눔의 의미를 실천하고, 사회적기업의 활성화를 돕기 위해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권고에 용기를 내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올해 출범과 동시에 류 원장과 진흥원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사업은 ‘청년 등 사회적기업가 육성’이다. 112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1600여 명의 사회적기업가를 키운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과 열정을 가진 청년에게 창업비용과 공간은 물론, 멘토까지 제공한다.

    “청년 사회적기업가에게는 세 가지 자질이 필요합니다. 먼저 사회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모르면서 사회적기업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다음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할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어떤 기술이나 지식보다 인간애가 앞서야 합니다.”

    사회적기업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확보하려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사회적기업육성법을 개정해 현재 연간 1회 제출하도록 된 사업보고서 제출 주기를 연간 2회로 확대하고 사회적·재무적 성과 모니터링을 강화할 계획이다. 경영공시제도도 자율적으로 도입하고, 2012년에는 전체 인증 사회적기업을 대상으로 전수 실태조사를 실시할 방침이다.

    “맛있는 열매를 얻으려고 잡초를 뽑고 부실한 열매를 솎아내는 것처럼, 책임 있고 견실한 사회적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사회적기업이 과연 기대만큼 큰 성과를 내겠느냐는 회의적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지역공동체와의 협력을 통해 충분히 성공을 거둘 것으로 믿는다. 이런 확신의 근저에는 사회적기업이 가진 몇 가지 특이점이 자리한다.

    “사회적기업에서는 개인이 기업을 독단적으로 운영하지 않습니다. 많은 이해관계자가 참여해 협력하며 아이디어를 결집합니다. 지역사회의 다양한 인적 자원이 ‘상생의 협력적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가므로 지역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요즘 사회적기업 전도사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현장을 뛰어다닌다. 주말도 반납한 채 지방으로 내려가 사회적기업가들을 만나서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책을 강구한다. 빠듯한 일정에 피곤하지만, 그는 몸을 지탱해주는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힘차게 움켜잡으며 오늘도 각오를 다진다.

    “사회적기업은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착한 기업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국민 인식이 개선되고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진흥원이 사회적기업을 반석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자리 창출할 사회적기업 육성 선택 아니라 필수죠”

    7월 1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2011 사회적기업의 날 네트워크 파티가 열렸다(왼쪽). 사회적기업 ‘청담’을 방문한 류시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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