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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잉락은 ‘탁신’ 그림자를 벗어날까

태국 첫 여성 총리 당선 일등공신은 ‘탁신 현상’…국가 화합이 최우선 과제

  • 정호재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 ‘탁신-아이사에서의 정치 비즈니스’ 옮긴이 demian@donga.com

잉락은 ‘탁신’ 그림자를 벗어날까



푸어타이 265석, 민주 162석, 붐짜이타이 34석, 찻타이파타나 19석, 파랑촌 7석….



7월 3일 치른 총선(투표율 74%)에서 잉락 친나왓(44)을 전면에 내세운 푸어타이당은 지역구 203석, 비례대표 60석을 합쳐 263석을 획득했다. 전체 500석 가운데 과반을 넘긴 압승이다. 집권당이던 민주당은 지역구 116석, 비례대표 46석을 더해 162석을 얻는 데 그쳤다.

푸어타이당은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찻타이파타나당과 찻파타나푸어 판딘당, 파랑촌당, 마하촌당 등 4개 군소정당 지도자를 만나 연립정권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2007년 국민의 힘(PPP)이란 이름으로 선거에 이기고도 사법부의 정당 해산 명령을 받아 패배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포석이다.





왜 태국 국민은 44세의 정치 신인 잉락을 앞세운 푸어타이당에 압도적 지지를 보냈을까. 포퓰리스트이자 부패정치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잉락의 오빠 탁신이 10년간 5차례 선거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군부와 반(反)탁신파 무장시위대 옐로셔츠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잉락은 탁신의 아바타가 아닌 실체로 구실할 수 있을까.


복잡다단한 태국 정치는 외국인에게 당혹감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2006년 탁신의 제2기 내각을 무너뜨린 군부 쿠데타(태국 역사상 19번째) 이후 태국 정계는 그야말로 카오스였다. 탁신을 앞세운 타이락타이(TRT)와 국민의 힘이 선거에서 승리했는데도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가 정당 해산 명령을 내렸고, 2008년 군부 지지를 받은 옐로셔츠는 방콕국제공항과 총리 공관을 점거하며 시위를 벌였다. 2009년 이후에는 탁신을 지지하는 레드셔츠가 방콕 시내 점거 시위를 벌여 100여 명의 사망자와 2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번 총선은 민주당 소속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가 더는 미루기 어려운 마지막 카드였다. 지난해 말 총선을 치러야 했지만 민주당 정부는 주저했다. 5월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도가 반등 기미(푸어타이당 36%, 민주당 34%)를 보이자 도박에 나선 것이다.

서민의 편, 개혁 이미지 여전

잉락은 ‘탁신’ 그림자를 벗어날까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는 2008년 11월 총선이 아닌 국회 투표에서 총리로 선출됐다. 따라서 민주당 정권은 정당성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3년 가까운 집권을 통해 민주당은 현대적 대중정당으로 탈바꿈했다.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도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탁신에 대항할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탁신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잉락의 총리 당선 의미를 파악하려면 태국 국민이 62세의 탁신 친나왓을 어떻게 보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서구 언론은 그를 포퓰리스트로 몰아붙이지만, 이는 동전의 한 면만 바라본 서구적 시각이다.

탁신은 통신 재벌이다. 태국에서 국왕과 비교할 만한 부호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재산만 766억 바트(2조6700억 원). 영국 망명 당시 프리미어리그(EPL) 맨체스터시티를 인수해 구단주를 지냈다.

탁신은 경찰사관학교 출신으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 일기 시작한 이동통신 붐을 활용해 관료와 유착하면서 태국 제1의 재벌로 성장했다. 그의 부패 이미지는 정경유착 없이는 태국에서 사업을 할 수 없는 기업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게다가 집권시절 언론을 탄압하고 이슬람교도를 학대했다. 마약 상인을 학살한 일도 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행세한 것.

그러나 탁신은 겉으로 드러난 ‘부패한 재벌’ ‘독재자’ 이미지와 달리 태국에서만큼은 농민과 도시 서민, 그리고 소외 지역인 북부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는다. 태국 북부, 북동부는 저개발 농촌 지역으로, 이 지역에 할당한 193석 가운데 79%인 152석을 푸어타이당이 싹쓸이했다. 가난뱅이가 부패한 부자 정치인을 지지하는, 모순처럼 보이는 이 현상에 대해 쭐랄롱꼰대 파숙 퐁파이칫 교수는 탁신의 개혁가 성향에 주목한다.

“탁신은 엘리트 관료의 타성에 의지하지 않고 경제인을 중심으로 한 기업가 마인드로 국가를 이끌고자 했다. 경제가 부흥하려면 안정된 소비자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사회복지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했다. 그는 분명히 개혁가 이미지를 가졌다.”

태국은 군대와 관료의 나라다. 지난 70년간 태국 정계는 한 정당이 과반 의석을 얻은 경우가 전무할 만큼 명망가나 지역의 실력자를 중심으로 한 후진적 파벌정치가 횡행했다. 1990년대 이전에는 군인이 내각을 좌지우지했고 이후에는 관료가 나라를 지배했다.

1994년 정계에 데뷔한 탁신은 이 같은 관행을 타파하고자 했다. 현대적 정당 조직과 정책을 꾸린 뒤 2000년 이후 태국 정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태국을 현대화한다는 ‘탁신노믹스(Thaksinomics)’가 그것이다.

거리정치에서 의회정치로 바뀌나

일각에선 탁신의 노선을 저급한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다. 30바트(1000원) 의료보험이나 농가부채 탕감 정책이 특히 그렇다. 그러나 탁신은 소수 부자와 절대다수 서민으로 양극화한 태국 사회에서 이단아 같은 개혁가다. 전문가들은 탁신이 앞으로도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을 소지가 크다고 내다본다.

탁신의 부상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태국 주류(왕당파, 군부, 사법부, 지식인 등)의 비토는 2006년 군부 쿠데타나 2008년 사법부의 탁신계 정당 해산 명령으로 나타났다. 재산 중 상당액을 정부에 압류당한 탁신은 여권을 빼앗긴 채 망명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옐로셔츠가 시위를 벌이면 군부와 경찰은 수수방관한다.

탁신과 기득권층의 대립이 태국 정치에 긍정적 구실을 한다는 분석도 있다. 보수파와 혁신파라는 양당정치 체제로 변화할 가능성을 엿보였다는 것이다. ‘탁신 현상’을 겪으면서 태국 국민의 정치의식이 높아졌다. 거리정치를 의회정치로 옮길 수만 있다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민주주의 안착에 성공하리라는 전망도 일각에서 나온다.

민주당이 대표하는 보수파와 푸어타이당이 상징하는 혁신파는 5년간 대립하면서 양측의 실체를 서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잉락이 승리하면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관측도 있었으나, 이렇게 되면 민주당과 군부가 치명상을 입으리라는 전망이 힘을 얻는다. 선거 직후 군부와 민주당이 패배를 인정하고 정권을 내놓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레드셔츠는 2007년 탁신 사면과 귀환을 추진하다가 보수파의 반발로 정권을 빼앗긴 경험이 있다. 2010년 레드셔츠 총궐기는 웬만한 나라에서는 정권이 뒤바뀔 만큼의 강력한 시위였지만 기득권층인 방콕시민과 옐로셔츠는 탁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저지시켰다.

두바이에 머물고 있는 탁신은 화상회의를 통해 이번 선거의 진행 상황을 보고받으며 승리로 이끌었다. 막내 여동생인 잉락을 내세운 초강수가 위력을 발휘했다. 미인대회에 나갈 만큼 외모가 뛰어나고 똑똑한 잉락이 아바타 구실을 200% 수행해낸 결과다.

잉락에게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큰오빠 탁신 문제가 그것이다. 부산외국어대 김홍구 교수는 “잉락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는 탁신의 사면 문제”라면서 “사면을 추진하면 정치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탁신이 태국 정계로 복귀하는 것은 갈등이라는 불에 기름을 붙는 격이 될 소지가 크다. 탁신 자신도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는 “귀국을 서두르지 않겠다. 정치 보복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태국 최초의 여성 총리인 잉락은 “나의 목표는 국가 화합이다. 따라서 여성이란 것이 장점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선거 기간 중 보여준 담대함을 무기로 정치 갈등을 해결해나간다면 안정적 집권이 가능하리라는 분석도 나온다. 가부장제가 사라진 태국은 여성의 발언권이 강한 사회다. 잉락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운 성품에 태국 국민이 희망을 거는 이유다.



주간동아 795호 (p50~51)

정호재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 ‘탁신-아이사에서의 정치 비즈니스’ 옮긴이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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