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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정원 조선 왕릉23

포근한 매화낙지형 터 大院君 묘제에 맞춰 조성

인조의 친부모 원종과 인헌왕후의 장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포근한 매화낙지형 터 大院君 묘제에 맞춰 조성

포근한 매화낙지형 터 大院君 묘제에 맞춰 조성

1 장릉의 연못은 천원지방설에 따라 조영된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이다. 장릉 연못의 아름다운 연꽃.

장릉(章陵)은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 3∼1649. 5)의 아버지인 추존왕 원종(元宗, 1580∼1619)과 비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 구씨(具氏)의 능으로, 난간이 없는 동원쌍릉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이며 이름은 부()다. 정원군은 선조와 인빈김씨 사이에서 난 세 번째 아들로, 친모가 낳은 형제가 9명이나 된다. 선조는 여러 부인 중 인빈김씨를 총애했다. 생모의 힘으로 그의 동복형 신성군이 세자 책봉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때 병사했다. 신성군이 아들 없이 죽자 선조는 인빈김씨의 봉사(奉祀·제사를 받듦)를 정원군에게 맡겼고, 정원군은 자신의 셋째 아들 능창군에게 신성군의 봉사를 위임했다.

이처럼 선조의 사랑을 받은 정원군은 이복형인 세자 광해군의 섭정에 불만을 갖고 자주 정치에 개입했다. 선조가 근심이 많을 때 정원군의 큰아들 종(倧·능양군, 인조)은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그림을 그려 바쳐 각별한 사랑과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선조의 급서로 이복형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정원군도 어려움에 처했다. 정원군은 임란 중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봉해졌으나, 셋째 아들 능창군이 광해를 축출하려는 역모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렀다. 능창은 신성군의 아들로 입적돼 대북파의 지지를 받고 있어 광해군에게는 정적이었다. ‘광해군일기’(광해군이 폐위돼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로 명명)에 “능창군은 역모로 몰려 위리안치(圍離安置)돼 냉방에서 자고, 모래와 흙이 섞인 밥이라 먹지 못해 나인 관동이 던져주는 밥을 얻어먹다 목매 자살했다”며 이 사건은 “광해군이 넌지시 유도했다”고 전한다.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새문리(塞門里)에 있는 정원군의 집터에 왕성한 기운이 돈다는 설이 나돌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민가 수천 채를 헐고 그 자리에 이궁인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관동이 광해 때는 내놓지 못하고 흙 속에 묻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알려졌다고 한다. 이는 광해군을 음해하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적인 글귀로 해석된다.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단순 둘레석만



정원군은 어려서 기표(奇表·우뚝한 외모)가 있고 우애가 깊어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은 만큼 광해군의 견제가 심해 걱정과 답답한 심정을 술로 달래며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았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았다. 오직 바라건대 빨리 죽어 지하의 선왕(선조)을 따라가는 것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정원군은 광해 11년(1619) 12월 29일 세상을 떠나니, 불과 마흔 살이었다. 광해군은 길지로 알려진 정원군의 어머니 인빈김씨의 장지를 감시하게 하고, 장례도 서둘러 양주군 곡촌리에 군묘 형식으로 치러 조문객까지 감시했다.

4년 뒤인 1623년 능양군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라(인조반정)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大院君)에 봉했다. 그리고 1627년에 묘가 원(園)으로 추숭돼 김포 성산언덕으로 천장하면서 1년 앞서 조영한 인헌왕후의 육경원과 쌍릉으로 합쳐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다. 인조 10년(1633) 이귀(李貴) 등의 주청에 따라 정원군은 다시 원종으로 추존돼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석물을 왕릉제로 개수했다. 존호는 원종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元宗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이라 하고 비는 “경의정정인헌왕후(敬毅貞靖仁獻王后)”로 추숭하면서 성종의 아버지 덕종의 추존 예를 따랐다.

포근한 매화낙지형 터 大院君 묘제에 맞춰 조성

2 장명등 창호로 보이는 안산과 조산(계양산). 장릉은 사신(四神)이 뚜렷하고, 조산과 축의 조영이 돋보이는 왕릉이다. 3 정자각 뒤에서 바라본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침.

인헌왕후는 본이 능성(綾城)인 좌찬성 구사맹의 딸로 13세에 정원군(원종)과 결혼해 능양군(인조), 능원군, 능창군을 두었다. 큰아들 인조가 즉위하자 연주부 부인으로 높여졌고, 궁호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했다. 엄숙하고 화락(和樂)하고 법도가 있으며 침착하고 단정했다고 한다. 1626년 1월 14일 인조의 모친 계운궁 구씨(추존 인헌왕후)가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로 김포, 고양, 파주 교하의 객사 뒷산이 추천됐으나 김포가 풍수적으로 사신이 완벽한 지형이라고 해 이곳에 모셔졌다. 묘호는 육경원(毓慶園)이라 했다.

이때 상주는 사가의 예에 따라 인조가 아닌 능원군이 했다. 다음 해 그의 부군 원종이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흥경원으로 불렸다. 1632년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숭될 때 함께 왕비로 추존했다.

장릉은 남한정맥의 계양산과 가현산의 중간에서 분기, 황하산을 거쳐 장릉(북성)산에 이르는 용맥 아래에 자리 잡았다. 즉 장릉산을 주산으로 하고 계양산을 조산(朝山)으로 하는 사신(四神)이 확실하고, 수계가 맑고 분명히 흘러 장릉 연지에 합수되는 길지로 알려진 곳이다. 풍수가들은 매화낙지형,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 등으로 평가한다.

경사지의 사초지를 따라 볼록한 지형에 자리한 장릉은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단순한 둘레석(호석·護石)을 두르고 있어 대원군의 묘제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석은 봉토를 둘러막는 돌로 호석면에 별다른 조각이나 문양을 새기지 않아 단순하다. 장릉만이 갖는 둘레석이다. 원제(園制)에서 왕릉제(王陵制)로 석물만 교체했기 때문이다. 원에서 왕릉제로 개축되면서 원래에 있던 비석의 받침대가 능침의 우측 계곡에 묻혔던 것을 2008년 발굴해 비각 옆에 설치했다. 흥경원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가 보기에 받침대로는 보기 드문 걸작이다.

장릉은 왕과 왕비의 쌍분 능침으로 2개의 혼유석 앞에 중계와 하계를 두고 있다. 팔각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석인, 무석인 등을 배치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길인 향로(香路)와 어로(御路)가 다른 능과는 달리 약간 경사가 진 계단식이다. 자연의 지형에 어울리게 정자각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능침 앞 강(岡)은 길지만 그리 높지는 않다.

장릉 앞 재실 저수지는 자연학습장

정자각은 3단 장방형 기단에 자리한 익공식(翼工式)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동쪽으로 올라가 서쪽으로 내려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제례의례를 반영한 건축으로, 내부에는 신좌(神坐)가 마련돼 있다. 얼마 전 장릉의 창고에서 정자각에 드리던 신렴(神簾)의 유구가 나와 복원이 가능해졌다. 원래 정자각의 월랑(배위청)과 신문 등에는 신렴이 드리워져 정자각의 신비감을 더해주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비각 아래 자리한 수복방(守僕房)은 능원을 수호, 관리하던 수복이 근무하던 곳으로 2칸이다. 맞은편에 제례용 음식을 준비하던 수라청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수라청 근처에는 반드시 제정(어정)이 자리한다. 이곳 장릉의 어정은 물이 좋아 약수터로 사용하고 있으나 콘크리트로 수리하고 덮개를 씌워놓았다. 원형을 찾아야 할 부분이다.

포근한 매화낙지형 터 大院君 묘제에 맞춰 조성

4 장릉 정자각의 잡상. 5 향로와 어로가 경사지에 자연스럽게 조영된 장릉.

장릉의 장명등은 큰 옥개(屋蓋)와 상륜(相輪), 8각의 지붕 등이 이후 숙종대에 등장하는 사각지붕보다 화려한 맛이 있다. 주변의 산과 조화를 이루며 창호를 통해 멀리 조산과 축이 일정하게 들어온다. 서양 건축의 축 개념과 비교되는 우리만의 조영 예술이다. 장명등은 묘역을 밝히는 상징적 조명기구일 뿐 아니라, 피장자의 신분이나 지위를 상징하는 장식적 능묘 석조물로서 능침의 중심시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장명등 창호로 보이는 조산(계양산)의 전망은 아파트 건설로 훼손되고 있다. 안산과 조산의 경관축 보존 대책이 시급하다.

장릉의 문석인은 머리에 복두(頭)를 착용하고 공복(公服)을 입은 채 석마와 나란히 서 있다. 하체에 비해 상체가 긴 4등신으로 무표정한 얼굴에 홀을 공손히 쥐고 있다. 무석인은 장군의 형상으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다. 얼굴은 정면을 응시하며 마주 서 있고, 문석인과 마찬가지로 무표정하게 위엄을 나타낸다. 전체적인 조각 수법과 비례는 문석인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세부적으로는 한껏 멋을 부린 것 같다.

장릉의 재실은 깔끔한 한옥으로 장릉(章陵) 관리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일부 전사청과 향대청은 소실됐다. 재실 옆 지당은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따른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연못의 형태다. 이곳 연꽃이 아름답다.

장릉 재실 앞에 있는 저수지는 1960년대 이전에 조성돼 다양한 수생식물이 자라고 철새가 찾아오는 자연학습장이다. 장릉 숲은 거닐기에 좋은 능원으로, 인헌왕후 구씨를 떠올리게 하는 포근한 곳이다. 장릉의 현재 입구는 청룡 맥을 끊고 능원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가는 훼손된 모습이다. 능역 입구 쪽으로 옮기고 용맥을 살려야 한다.

근처 우백호 능선 너머에는 장릉의 원찰인 금정사(金井寺)가 자리한다. 원래의 금정사는 능원의 우백호 안쪽 능침 북서쪽에 있던 것으로 장릉을 확장, 조영하면서 옮겼다고 한다.

원종의 맏아들인 인조의 능은 경기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에 있다. 능호는 장릉이다. 이곳은 어머니 인헌왕후의 초장지로 지목되던 곳이다.

왕실과 뽕나무

누에 길러 어의 만들고 상례 땐 신위 제작


포근한 매화낙지형 터 大院君 묘제에 맞춰 조성

장릉의 오래된 뽕나무.

장릉 정자각 수라청 터 뒤편 사초지 모서리에는 오래된 뽕나무(桑)가 있다. 오래된 뽕나무는 궁궐에도 있다. 특히 창덕궁 금원(비원)에 많다.

뽕나무는 누에를 길러 고급 비단의 어의(御衣)를 만들었다. 그래서 궁궐에 누에를 기르는 잠실을 두었다. 서울에도 강남에 잠원과 잠실을 두어 뽕나무를 장려했다. 뽕나무는 뿌리가 깊고 황색으로 왕실을 상징하는 황색의 수피를 갖고 있다. 뿌리 속이 흰색이라 한약재로 상백피(桑白皮)라고도 한다. 열매는 푸르다가 차츰 적색, 검은색으로 변한다. 오행색(五行色)을 다 갖추고 있어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정성 들여 가꾸고 이것으로 어의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에서는 상례 때 왕과 비의 영혼이 의지할 신위(神位∙지방)를 혼전에 모시는데 이것을 우주(虞主∙우제 지낼 때 쓰던 신주)라고 한다. 우주는 뽕나무로 제작한다. 그래서 신위를 상주(桑主)라고도 한다. 우주는 부묘 시 종묘 터에 묻고 밤나무로 만든 신주로 부묘(祔廟)한다. 밤나무(栗)는 자손의 번성과 왕권의 영구한 승계를 의미해, 지금도 폐백 때 시어머니가 신부에게 밤을 준다. 밤은 밤알(열매)을 파종해 새싹을 틔워 키우는데, 밤알은 거목이 돼 죽어도 껍데기가 계속 뿌리에 붙어 있어 혈통의 정통성을 확인시켜준다. ‘ 임원경제지’ 등에 밤알을 심을 때는 가운데 밤알을 심도록 돼 있다. 이는 가운데 밤알이 실해 건실한 혈통 계승을 의미한다. 인조는 아버지를 종묘의 혼전에 모시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장릉에 부모의 영혼이 의지할 뽕나무를 직접 심었다고 한다. 이 나무가 지금도 살아 있다.




주간동아 2010.09.06 753호 (p76~78)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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