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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2, 3심에서도 이겨 반드시 KTX 탈 겁니다”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 오미선 씨 … 치열했던 1500일 싸움 통해 사회문제 눈떠

  •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2, 3심에서도 이겨 반드시 KTX 탈 겁니다”

“2, 3심에서도 이겨 반드시 KTX 탈 겁니다”
8월 26일 서울중앙지법 법정. “원고들의 청구는 이유가 있으니 이를 모두 인용한다”는 재판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지난 1500일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괜히 잘못한 게 있는 양,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죠. 하지만 이젠 제가 한 일이 정당한 것임이 밝혀졌으니, 떳떳이 사회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과년한 딸이 파업한다고 안쓰러워하면서도, 다른 사람들 눈치를 살폈던 부모님도 당당해지시겠구나 싶어 정말 뿌듯해요.”

8월 31일 서울 용산역 인근 커피숍에서 만난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 오미선(31) 씨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한국철도공사(이하 공사)와 벌여온 지난한 투쟁에서 오씨와 그의 동료들은 이겼다. 2004년 ‘철도의 꽃’으로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KTX 여승무원들이 왜 2년 만에 공사 측으로부터 해고당하고, 서울역, 용산역 등지에서 천막·단식농성을 했으며, 공사와 법정공방까지 벌여야 했던 것일까.

지난 고생 생각나 기쁘지만 씁쓸

2004년 입사할 당시 이들은 “2년 후 공사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는 공사 측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다. 공사가 100% 지분을 보유한 자회사이자 (재)홍익회 소속인 ‘철도유통’과의 고용계약은 형식적인 것으로 알았다. 공사가 승무원을 채용할 때 직접 참여했고 수습교육도 시켰으며 여승무원의 수당과 퇴직연금, 4대 보험료까지 부담했기 때문. 업무 역시 공사에 직접 고용된 직원들과 동일했다. 하지만 2년 후 이들의 고용계약이 철도유통으로, 다시 ‘KTX 관광레저’라는 계열사로 인계되는 조짐이 보였다. 공사는 이들에게 2006년 5월 15일까지 계열사의 정규직으로 이적하지 않으면 고용시한이 만료된다고 통보했다. 계열사 정규직이 아닌 공사 정규직을 주장하며 이적을 거부한 여승무원들은 해고됐고, 이후 4년 6개월 동안 투쟁을 벌여야 했다.



법원은 KTX 해고 여승무원 34명이 공사를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 및 임금지급’ 청구소송에서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최승욱 부장판사)는 “KTX 해고 여승무원은 공사의 근로자이며, 공사가 계약 갱신을 거절한 것은 정당한 이유 없는 해고”라며 “공사는 이들이 복직할 때까지 미지급 임금과 월 급여를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판결은 명쾌했다. 여승무원이 속한 철도유통은 업무 수행의 독자성이나 경영의 독립성이 없어 공사의 한 사업부서나 노무대행기관에 불과한 만큼 공사를 이들의 사용자로 봐야 한다는 것. 법원은 2008년 12월에도 가처분 결정을 통해 KTX 여승무원이 공사의 근로자임을 인정한 바 있다. 이는 하청업체 노동자가 원청업체 사업장에서 위장 도급이나 불법 파견하는 노동계 전반에 적용할 수 있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기쁘지만 그만큼 씁쓸했어요. 우리는 대부분 1979년에서 1982년생이거든요. 20대 한창 예쁠 나이에 투쟁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죠. 다른 친구들이 돈 벌고 경력 쌓고 외모 꾸밀 때, 우리는 조합원 조끼 입고 서울역, 용산역을 돌아다녔어요. 어쩌다 농성장에서 친한 친구라도 만나면 하루 종일 우울했죠. 그러는 사이 우리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어요. 저도 2009년 결혼해 지금 임신 5개월이에요. 정말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어요. 알았으면 시작하지 못했을 거예요.”

대학에서 체육을 전공한 오씨는 2004년 KTX 여승무원 1기로 입사했다. 당시 항공사 승무원 버금갈 정도로 주목받았던 그를 가족과 친구들은 자랑스러워하고 또 부러워했다. 그 역시 KTX 여승무원이라는 데에 자긍심이 매우 컸다. 하지만 입사 후 1년이 지나자 대우가 조금씩 달라졌다.

“예를 들면 유니폼이라든가 배지, 모자 등을 추가로 주문할 때, 공사 소속의 팀장에게는 무상으로 지급되는데 우리는 월급에서 깎는 거예요. 급여 역시 1년 지나면 올라가는 게 정상인데, 오히려 삭감됐죠. 2년 후 공사 소속으로 바꿔준다는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처우는 점점 나빠졌어요. 그러더니 너무도 쉽게 해고돼버렸습니다. 대학 시절 단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던 노동자 처우 및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에게 닥친 거죠.”

2006년 ‘공사의 KTX 여승무원 직접 고용’을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20대 중후반, 젊었던 이들은 투쟁을 하더라도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민중가요를 부를 때도 율동이 귀엽고 밝은 노래를 선호했다. 또 사소한 것이라도 힘든 농성 생활을 이겨낼 돌파구를 찾았다. 영어 공부를 하기도 했고 동호회 활동도 했다. 오씨도 그동안 불어 공부를 해 관련 자격증을 땄다.

“재미있는 일도 있었어요.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는데, 거기서 만난 경찰관과 승무원이 사귀다가 결혼까지 한 거죠. 이후 아내는 집회를 통해 투쟁했고, 남편은 이를 가로막아야 했죠. 아내가 남편을 향해 ‘물러가라’ 외치는 모습을 보니, 정말 쓴웃음이 나더군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해결될 듯하면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들의 천막농성장을 찾는 사람도 줄었다. 그럼에도 점거시위, 삭발, 단식, 쇠사슬농성, 고공농성이 이어졌다. KTX 해고 여승무원 대표를 맡은 오씨는 2008년 8월 27일 서울역 조명철탑 위에서 4명의 동료와 함께 고공농성을 했다. 어느 투쟁도 그렇게 힘들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고공농성만은 달랐다. 새벽바람은 무척 찼고, 열차가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철탑이 흔들려 많이 무서웠다. 하지만 그렇게 투쟁하는 모습을,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과 가족이 지켜봤다는 게 더욱 부끄럽고 가슴 아팠다.

“고공농성 후 처음 만난 시어머니가 ‘난 우울한 사람이 싫다’고 하시더군요. ‘제3자의 눈에는 제가 무섭고 독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구나’, 처음 깨달았어요. 그동안 육체적 힘듦보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정신적 상처가 더 컸어요. 우리의 투쟁에 대해 ‘배부른 소리 한다’며 못마땅해하는 사람을 처음엔 야속하게 생각했지만, 더 힘들게 투쟁하는 사업장들을 보며 이해하게 됐어요. 하지만 이제 노동 문제는 극소수 빈곤층만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고공농성을 마지막으로 이들은 물리적 형태의 투쟁을 멈췄다. 너무 힘들고 지쳤기 때문이다. 함께 했던 동료도 350여 명에서 34명으로 줄었다. 2008년 10월 ‘근로자 지위 보전 및 임금지급’ 가처분 신청과 11월 본안 소송을 제기하면서 이들은 법으로 공을 넘겼다. 이후 2년 가까운 법정공방 끝에 이번 1심에서 승리한 것이다.

대법 판결 복직까지 시간 더 필요

“판결 후 시아버지가 ‘축하한다’며 가장 먼저 전화를 주셨어요. ‘배 속 아이가 복덩이’라고 하시면서요. 그런데 시부모님은 기쁘다고 하시면서도 ‘이제 임신했으니 너무 앞에 나서진 말라’고 하시더군요(웃음). 보수적이던 친정아버지도 요즘은 광화문 네거리 등에서 집회하는 사람들 보면 당신 딸이 생각나 격려해주신다고 해요. 사회를 보던 눈이 달라진 거죠.”

하지만 오씨와 그의 동료들은 앞으로도 ‘공사의 직업 고용’을 계속 외쳐야 할 것 같다. 공사가 항소하겠다고 했기 때문. 대법원까지 갈 경우 판결이 최종 확정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오씨는 “2, 3심에서도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며 “반드시 KTX 여승무원으로 돌아가겠다”고 강조했다.

“2년 일하고 5년 가까이 투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KTX 승무원에 대한 애착이 커졌어요. 삶의 노하우가 생긴 만큼 진정한 고객서비스가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루라도 빨리 떳떳하게 일하고 싶고, 꼭 그렇게 되리라 믿어요.”



주간동아 2010.09.06 753호 (p48~49)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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