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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다?

김정일, 아버지 그림자 잡고 유랑 … 중국 측 선물 보따리도 크지 않은 듯

  • 이정훈 동아일보 논설위원 hoon@donga.com

성지순례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로(路)가 김일성 전 주석의 항일투쟁기 행로였다고 한다. 3남 김정은을 대동한 것으로 보이는 김정일이 성지(聖地) 순례를 하듯 아버지의 길을 더듬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의 행적과 김정일의 방중로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김일성이 걸어온 길은 과연 성지가 될 만한지 살펴보기로 하자.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은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은 평양특별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이다. 이곳엔 김일성 일대기를 정리해놓은 만경대혁명사적관이 있다. 사적관에는 김일성 부모는 물론 증조부모와 조부모에 대한 자료도 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반일사상을 갖고 있었고, 어머니 강반석은 기독교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적관은 김형직의 반일사상은 강조하나 강반석의 기독교 신앙은 보여주지 않는다.

김일성 쓰던 책걸상 남아 있어

사적관에는 1919년 만 7세 소년인 김일성이 3·1운동에 참가한 것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3·1운동이 일어난 해 김일성은 가족을 따라 압록강 상류를 건너 백두산 북서쪽의 산골마을인 중국 지린(吉林) 성 바이산(白山) 시 장바이(長白·현재는 장백조선족자치현) 현 바다오거우(八道溝)로 이주해 바다오거우소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같은 바이산 시에 있는 린장(臨江)이란 곳으로도 옮겨가 살았다.

중국에서 소학교를 다녔으니 김일성은 조선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조선말을 배우라며 1923년 김일성을 혼자 평양으로 보냈다. 평양의 외가에 온 김일성은 외할아버지가 설립자이기도 한 기독교 계열의 창덕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1925년 그는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이산 시로 돌아와 푸쑹((撫松) 현의 푸쑹소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1926년 아버지가 병사하자 그는 지린 시로 나와 위원(毓文)중학에 입학했다. 이때의 중학교는 5년제였는데 지금은 3년제 초중(初中)과 고중(高中)으로 나뉘어 있다.



사적관에는 평양에서 바다오거우(북한식 표기는 ‘8도구’)와 린장(북한식 표기는 ‘림강’)을 오간 소년 김일성의 행적을 그린 초대형 지도가 걸려 있다. 북한은 이 길이 혁명가의 길이었다며 집단체조인 ‘아리랑’의 매스게임에서도 보여준다. 평양에서 시작하는 김일성의 이 길은 이번에 김정일이 열차를 타고 지나간 노선과 비슷하다. 자강도 강계까지는 같은 길이고 그 다음부터 갈라졌다.

김일성은 강계에서 북동쪽으로 걸어 압록강 상류를 건너 바이산 시로 들어갔다. 그러나 북한 강계와 중국 바이산 사이엔 철도가 없어 김정일 전용열차는 서쪽으로 틀어 만포에서 압록강을 건너 광개토태왕비가 있는 중국 지린 성 지안(集安) 시를 통과해 지린 시로 달렸다. 김일성이 소년기를 보낸 바이산 시는 건너뛰었다.

중국의 고중(고등중학)은 우리의 고등학교 과정이라 졸업생은 바로 대학 입학시험에 응시한다. 2008년 입시에서 위원 고중은 베이징(北京)대에 2명, 칭화(靑華)대 1명을 합격시켰다. 지방에 있는 고중 처지에서 이러한 합격자 수는 대단한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김정일은 아버지가 이런 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 학교에는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고 김일성 도서관이 있으며 김일성이 쓰던 책걸상까지 남아 있으니, 그는 꼭 보고 싶었을 것이다. 위원중학 시절인 1926년 10월 17일 김일성은 ‘ㅌㄷ’로 약칭되는 반일학생운동단체 ‘타도제국주의 동맹’을 만들었다(1990년대 국내 주사파가 이를 본떠 미 제국주의를 몰아내자며 ㅌㄷ를 결성하기도 했다). 1927년 8월 28일 김일성은 ㅌㄷ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 바꾸었다.

당시 중국을 이끈 것은 반공노선의 국민당 정부로 공산주의 활동이 금지돼 있었다. 1929년 김일성은 공산주의 활동을 한 혐의로 중국 공안에 검거돼 투옥되면서 학교에서는 퇴학 처리됐다. 1930년 출소한 그는 전설적인 조선인 항일운동가 김일성을 따서 이름을 김일성으로 바꾸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장악을 본격화했다. 그러자 이 지역에 있던 중국인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항일유격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1932년 4월 25일 김일성도 반일인민유격대(빨치산부대)를 조직했다.

성지순례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다?
위원중학을 중퇴한 뒤 김일성은 광복할 때까지 한 번도 고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보천보 전투에 그는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의 북한 정부는 그가 귀국한 뒤 1948년 9월 9일 출범한 것이다. 북한 정부 출범에 앞선 1948년 2월 8일 김일성은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조선인민군을 창설했다. 이후 1948년 2월 8일을 인민군 창군일로 기념해왔는데, 1977년 돌연 인민군 창건일을 1932년 4월 25일로 바꿔버렸다.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할 때 만든 빨치산부대를 소련군 도움으로 만든 조선인민군의 뿌리로 하는 역사 조작을 한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부대가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자 1934년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부대를 묶어 동북인민혁명군을 만들고, 1936년엔 중국인 주바오중(朱保中)을 사령원으로 한 동북항일연군(抗日聯軍)으로 개편했다. 동북항일연군은 몇 개의 ‘로군(路軍·군단)’으로 편제됐는데 김일성은 1로군 6사장(師長·사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6사의 병력은 지금의 중대 규모보다 적었다. 1937년 6사는 압록강 최상류를 건너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진의 보천보로 침투해 파출소, 우체국 등을 공격해 7명을 사살하고 도주했다. 북한은 이 기습을 보천보 전투로 명명해 김일성이 이룬 최대의 빨치산 투쟁으로 자랑했다.

“공산당 대 공산당’ 관계로 성사

1938년부터 일본은 이 지역에 배치한 관동군(일본군)과 만주국 군대를 동원해 대대적인 공산 게릴라 소탕전을 펼쳤다. 이에 견디지 못한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어 일본과 싸우지 않는 ‘안전지대’인 소련으로 도주했다.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는 하바롭스크에 주둔했는데, 1942년(1941년 설도 있음) 이곳에서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이 김정일을 낳았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김일성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출동한 소련군을 따라 평양에 들어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다.

김정일이 아버지의 길을 답습하려 했다면 지린 성의 성도(省都)인 창춘(長春)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주석을 만난 다음 바로 러시아의 하바롭스크로 갔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헤이룽장(黑龍江) 성의 성도인 하얼빈(哈爾濱)을 찾았다. 하얼빈은 소련에 있던 김일성이 광복 후 북한으로 가기 전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이곳 동북열사기념관에 김일성을 포함한 동북항일연군의 활동 자료가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무단장(牧丹江)을 들른 뒤 투먼(圖們)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왔다. 김정일의 방중은 ‘국가 대 국가’의 외교로 이뤄진 게 아니라 ‘공산당 대 공산당’ 관계로 성사된 것이다. 양측은 ‘조·중 친선의 바통을 후대에게 잘 넘겨주자’는 식으로 우의를 강조했다. 외국 정상의 공식 방문이 아니기에 중국은 공식 의전을 제공하지 않았다. 중국 방문을 통해 김정일이 중국으로부터 받아낸 것은 6자회담을 재개하자는 것뿐이다.

김 위원장의 이번 중국 방문길은 쓸쓸했다. 중국에서 김정일의 행적을 지켜본 한 소식통은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 일행 이끌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꼭 최후를 앞둔 사람이 미리 하직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보면 지금 김정일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국내에서 하도 힘드니까 중국이 열심히 보존해주지도 않은 아버지 흔적을 찾아 유랑한 격이다. 중국에서도 이미 마오쩌둥(毛澤東) 등 빨치산 세대의 흔적이 사라져가는데 김일성의 흔적이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라고 평했다.



주간동아 2010.09.06 753호 (p42~43)

이정훈 동아일보 논설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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