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1

2010.06.14

“프로야구만 다인가요? 야구 기반이 튼튼해야 합니다”

베이스볼 아카데미 공동원장 이광환 감독 “티볼을 씨앗으로 야구 활성화 일조할 터”

  •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입력2010-06-14 14: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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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야구만 다인가요? 야구 기반이 튼튼해야 합니다”
    프로야구가 통산 1억 관중을 돌파했다.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2010 남아공월드컵이 시작됐지만 야구장을 찾는 관중의 수는 줄어들 줄 모른다. 야구 국가대표팀이 올림픽,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등 국제대회에서 거둔 성과를 밑바탕으로 롯데, 기아, SK 등 프로구단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광환 감독은 “화려한 프로야구 아래에 그늘이 있다”고 말했다. 여자야구 활성화, 야구장 부족 등의 현안이 가려져 있다는 것. 올 11월 출범 예정인 야구지도자 육성 전문 프로그램 ‘베이스볼 아카데미’의 원장을 맡은 이 감독을 서울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만났다.

    “프로야구를 보면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소프트웨어도 같이 발전해야죠. 옛날처럼 선배 코치에게 배운 것을 흉내 내는 식으로 가르치기보다, 하나를 가르쳐도 이론과 배경을 함께 전달하는 커리큘럼을 짤 겁니다. 한국 지도자도 해외로 나가 야구를 지도하는 시대가 됐으니 미리 공부를 해야죠.”

    서울대 야구부 감독직 맡아 화제

    베이스볼 아카데미는 서울대, 한국야구위원회, 대한야구협회가 힘을 합쳐 만들었다. 스포츠교양과 야구문화, 경기 수행과 스포츠과학, 야구 코치와 코칭 역량 등을 교육할 예정이다. 훌륭한 지도자를 만들어 훌륭한 선수를 키우고, 그 선수가 지도자가 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이 감독의 희망이 담겼다. 서울대와 손을 잡은 이유는 학문적 기틀을 확실히 다지기 위해서다.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와 최고 대학이 손을 잡은 것은 의미가 있어요. 야구 이론은 현장의 야구인이, 학문적 부분은 서울대 교수들이 맡을 겁니다. 지금까지는 지도자가 되려고 해외연수를 가서도 제3자로 훈련과 경기만 구경하다 오거나, 원서도 제대로 못 읽고 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베이스볼 아카데미부터 마친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서울대와 맺은 인연으로 이 감독은 서울대 야구부 감독직을 맡기로 했다.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이 감독이 통산 1승에 불과한 서울대를 맡겠다고 하자 화제가 됐다. 하지만 이 감독은 부담스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전담하는 게 아니라 한 번씩 봐주기로 한 수준이에요. 서울대 야구부의 역사는 깊은데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하는 모습이 안타깝긴 했어요. 관심 있는 건 서울대 야구장이에요. 국내 최고의 대학인데 맨땅 야구장 하나에 동아리 팀들이 몰려 새벽부터 밤까지 바글바글해요. 운동장도 교실이나 마찬가지인데, 학교 건물을 기부받아 짓듯이 기부를 이끌어내 인조잔디도 깔고 보호망도 갖춰야죠. 야구장이 늘어야 야구가 발전합니다.”

    감독을 맡은 만큼 서울대 팀의 전력강화 방안부터 세워두었다. 이 감독은 서울대에 온 뒤 단체종목 고등학생이 전국대회 8강에 들고, 수학능력시험 5등급 이상 받으면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수시모집 특차 지원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수 선수가 입학하면 당장 서울대 야구부 전력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부모들이 안다면 유소년 야구가 더 활성화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5등급 이상을 받으려고 학생들이 공부도 열심히 하길 바라면서.

    “교육 사업으로 야구 보급 했으면…”

    이 감독은 맨 아래 티볼을 놓고 유소년야구, 여자야구까지 활성화하는 마스터플랜을 세워놓았다.

    “티볼은 야구의 씨앗입니다. 투수가 없으니 마운드가 필요 없어 아무 운동장에서나 할 수 있어요. 안전하고 남녀 같이 할 수 있으니 학교 선생님들도 만족해요. 남녀 학생이 공부는 같이 하면서 왜 체육은 따로 하는지 모르겠어요. 초등학교 대회에는 여학생도 30% 이상 뛰어야 참가할 수 있어요. 여기서 소질을 보인 친구들은 유소년야구로 가면 되는데 여학생은 소프트볼을 해도 되겠지요.”

    이 감독은 여자야구연맹 부회장, 티볼협회 고문도 맡고 있다. 남은 걱정은 여자야구. 티볼은 초·중·고 교육과정에 도입되는 등 자리를 잡았고, 유소년야구는 폭발적으로 팀이 늘어나 걱정일 만큼 활성화됐다. 하지만 여자야구는 야구인들에게서 “여자가 무슨 야구냐”는 편견 속에 방치된 상태. 여자야구 이야기를 하는 이 감독의 표정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라며 격려하지만… 곧 세계대회를 하는데 공원 축구장 구석에서 연습해요. 도저히 운동을 못할 만큼 더워야 운동장이 비니, 여자선수들 얼굴이 늘 빨갛게 달아오르죠. 그래도 몸을 아끼지 않는 걸 보면 대견해요. 코뼈가 부러져 3번이나 수술한 선수도 있어요.”

    인터뷰 내내 이 감독은 과거의 성과를 물으면 “거 알면 뭐 하겠소” 하고 말을 돌렸지만, 야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잘 써달라”며 부탁했다. 그의 한국 야구 발전 마스터플랜을 듣고 있으니 ‘돈 안 되는 일’에 몰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야구를 했으니 이만큼 인간이 됐지요. 어릴 적 대구의 가장 험한 동네에 골목대장 노릇을 했지요. 그러나 야구를 하게 돼 늦게까지 운동하고, 방학이면 합숙훈련을 하니 그 세계와 자연히 멀어졌어요. 저는 야구에서 번 돈 다 돌려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빈말이 아니다. 이 감독은 전 재산을 털어 한국야구명예전당을 만들었다. 프로야구 감독 시절, 선수든 구단이든 돈만 벌면 된다는 풍토가 아쉬웠기 때문. 돈 아닌 명예, 품격의 중요함을 알리려고 명예전당을 만들었다. 때로는 몸을 던졌다. 제주도 서귀포 야구장을 만들 때 이 감독은 시즌 중에도 당일치기로 현장에 다녀올 만큼 열심이었지만 인부들은 자갈밭에 흙만 살짝 덮는 식으로 날림공사를 했다. 시즌이 끝난 뒤 이 감독은 야구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불도저로 갈아엎고, 직접 인부들과 흙을 체로 쳐가며 새로 그라운드를 만들었다. 이 감독의 공을 아는 사람들이 ‘이광환 야구장’이라 명명하기를 권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한 가지 부탁은 은행나무 한 그루. 죽어서 야구장 옆 은행나무에 누울 수 있으면 만족한다고 했다.

    “야구는 마라톤입니다. 한 시즌에 팀당 133경기를 치르니 투수 한 명 잘한다고 해서 긴 시즌을 치러낼 수 없어요. 꼼수가 통하지 않고 기본이 중요하죠. 그러니 교육사업의 하나로 야구가 보급되면 좋겠어요. 인내, 협동, 희생, 준법정신, 전략적 사고까지 배울 수 있거든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 길, 야구위원회 건물 엘리베이터에 적힌 명언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이 일을 맡은 첫날부터 완벽해야 하며, 그 후에도 끊임없이 향상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 메이저리그 심판 에드 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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