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1

2010.06.14

쾰러 용퇴? 대통령감 아니었다

‘국익’ 위해 군사개입 망언 이후 전격 사임 비판 고조 … 차기 대통령에 ‘불프’ 유력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gmail.com

    입력2010-06-14 14: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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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1일 오후 3시, 베를린 벨뷔 대통령궁에서 소집된 기자회견은 전 독일을 깜짝 놀라게 했다.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자진 사퇴하겠다고 발표한 것.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독일 연방공화국 건국(1949년) 이래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독일 정치체제에서 대통령의 임무와 권한은 상징적이고 형식적이지만, 그래도 주요 공직의 임면(任免)에는 반드시 대통령의 승인이 들어간다. 이번에 대통령 스스로 사의를 표하고 승인한 격이므로, 이 사퇴는 발표 즉시 유효했다.

    쾰러가 이런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데는 5월 22일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중 ‘도이칠란트 라디오 쿨투어’와의 인터뷰가 직접적 원인이 됐다. 여기서 쾰러는 “독일처럼 무역 의존도가 높은 나라일 경우, 자유무역의 통로를 지키고 무역·고용·수입 등에서 우리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지역이 불안정해지는 걸 막기 위해 필요하다면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현재 가장 큰 규모(4500명)의 독일군이 파병된 아프간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나온 것이어서, 사람들은 그 맥락에서 이 말을 이해했다.

    ‘군사적 개입’ 운운 위헌적 발상

    가뜩이나 아프간 파병에 부정적이던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고, 쾰러는 언론과 정계의 질타를 받았다. “독일 영토 밖으로 군대를 파병해야 한다”는 말에서 사람들은 세계 평화를 뒤흔들던 나치 시절의 악몽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 독일 헌법은 연방군의 해외 파병을 국제 평화와 인권 보호를 위해서만 허용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 ‘국익’을 위해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다는 위헌적 발상을, 그것도 헌법의 수호자여야 할 대통령이 했다는 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쾰러 측에선 “아프간 파병이 아니라 소말리아 해적을 막기 위한 해상 경계를 염두에 둔 발언”이라고 해명했으나, 비판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쾰러는 사퇴 발표를 통해 자신의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5월 22일에 있었던 제 발언은 격렬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제 발언이 우리 민족에게 그토록 민감한 문제에 있어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점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위헌적인 군사 개입을 말했다는 비판은 옳지 않습니다. 대통령직은 필히 존경을 받아야 하는 자리인데, 이런 비판은 존경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나는 대통령직 사퇴를 선언합니다.”



    이렇게 대통령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모습이 어떤 이들에게는 멋지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독일 언론과 학계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비판 여론을 감당치 못하고 전격 사임한 것은 책임 있는 국가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 또 독일이 안팎으로 겪고 있는 정치·경제적 불안 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사퇴는 더더욱 무책임한 처신으로 비친다.

    독일이 아무리 유럽 제일의 경제 강국이라 해도 속을 들여다보면 실업, 의료보험 재정, 빈부 차이 등 문제가 적지 않다. 2009년 출범한 기민련-자민당 연정은 시작부터 삐걱거렸고, 지난 4월 여당 지지율은 임기 중 최저인 30%까지 내려갔다. 정국을 주도하는 여당인 기민련으로선 5월 한 달 동안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위르겐 뤼트거스, 헤센 주의 롤란트 코흐(5월 하순에 돌연 정계은퇴)에 이어 쾰러까지 잃게 된 것. 즉,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어깨에 한없이 무거운 국정의 짐이 놓이게 됐다.

    메르켈은 쾰러의 사임을 극구 만류했으나, 쾰러는 결심을 꺾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임 발표를 듣고 놀란 정계와 학계, 언론은 다음 날부터 쾰러를 ‘유약한 인물’ ‘처음부터 대통령에 어울리지 않았던 스타일’이라며 거친 논평을 쏟아냈다. 쾰러의 자서전 집필자이며 본대학 정치학과 교수인 게르트 랑구스는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쾰러에게 대통령은 과중한 자리였다. 그는 본래 정치가 타입도 아니다. 국회의원 한번 해본 적이 없다. 정치에 대해서 그는 한마디로 문외한이다.”

    ‘슈피겔 온라인’의 사설도 이와 유사한 평가를 내렸다.

    “쾰러의 성품과 그 직책은 어울리지 않았다. 용퇴(勇退)라는 형식, 상처 입은 모습, 동정심을 자아내면서도 누구를 향하는지 알기 힘든 분노가 이를 증거한다. 단지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자리를 박차는 대통령이라니. 이는 과잉반응이고, 직책에 걸맞지 않는다. 민주사회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비판이 있게 마련 아닌가?”

    2004년 혜성처럼 나타나 대통령직에 당선됐고,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쾰러는 지금껏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대통령이다. 사실 독일에서 대통령은 실질적 권한이 없기에 ‘유력 정치인’으로 간주하지도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쾰러만큼은 달랐다. 그는 ‘슈피겔’ 등 유력지들의 정치인 지지도 조사에서 60~70%라는 성적으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IMF 총재였지만 정치 무대에선 무명에 가깝던 그를 당시 야당이던 기민련의 메르켈과 자민당의 베스터벨레가 힘을 모아 대통령 자리에 앉혔을 때, 사람들은 그를 ‘메르켈의 대통령’이라 했다. 그렇지만 이후 쾰러는 기민련의 보수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소신 발언으로 국민의 사랑과 신망을 얻으며 ‘국민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했다. 특별히 아프리카의 고통에 극진한 애정을 보이면서 독일의 국제적 이미지를 진작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국가가 어려울 때 가만히 있던 대통령

    그렇지만 슈피겔 온라인은 “그가 개인의 인기 관리는 잘했을지 모르지만, 독일 연방공화국 대통령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임무 하나를 감당하지 못했다”고 혹평했다. 바로 국가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일이다.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나 로만 헤어초크 전임 대통령이 제한된 권한을 가지고도 훌륭하게 감당했던 바로 그 일 말이다.

    실질적 권한은 없어도 국가적 어려움이 닥칠 때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세계 경제위기가 닥쳐왔을 때, 그리고 기민련-자민당 연정이 삐걱거릴 때 그는 수수방관했다. 국론이 분열될 때 대통령이 초당파적으로 중재해야 하는데, 쾰러는 정치권을 비판함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이런 인기는 국가를 위해 이롭지 않다. 대통령이라면 의당 국민이 국가와 정치권을 신뢰하도록 백방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그는 국민과 정치권의 간극을 벌어지게 했고, 최종적으로 대통령직을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독일 헌법에 따르면 새 대통령 선출은 연방의장의 공고가 있은 뒤 30일 이내에 연방의회 의원 622명과 각 주의 대표 622명으로 이뤄진 연방총회에서 결정한다. 현재 기민련에서 내세울 후보는 크리스티안 불프 니더작센 주지사이고, 사민당은 신학자인 요아힘 가욱이다. 기민련-자민당 연정은 연방총회에서 52%의 과반수를 보유하고 있으니, 큰 이변이 없는 한 불프가 새 대통령직에 오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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