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1

2010.06.14

재정부-한은 밀월 모드로 전환?

금통위 열석발언 뒤 차관 퇴실로 접점 찾아 … 김중수號 정책공조 뚜렷한 색깔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10-06-14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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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이하 금통위)는 통화신용 정책을 수립하고 한국은행의 운영에 관한 주요 사항을 결정하는 정책기구다. 매달 둘째, 넷째 주 목요일에 정기회의를 개최하는데 첫 번째 정기회의에선 통화 정책의 방향을 심의 의결한다. 지금까지는 금통위원들이 최근 경제상황에 대해 토론하고 마지막에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통화 정책 방향과 기준 금리에 대한 의견(표결)을 밝히고 나면, 재정부 차관이 열석발언권을 행사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6월 10일 여느 때처럼 금통위 회의가 열렸지만 이날은 순서가 달랐다. 먼저 금통위 실장은 전날 동향보고회의에서 논의된 토의 내용을 요약 발표했다. 몇 가지 추가 질의가 오간 뒤 기획재정부(이하 재정부) 임종률 제1 차관이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 열석발언을 했다. 이어 금통위원들과 간단한 토의를 거친 뒤, 임 차관은 퇴실했고 금통위원들은 그제야 향후 금리에 대해 의견 개진을 하며 표결에 임했다.

    대립각 세웠던 운영방식 개선

    이렇게 운영 방식이 바뀐 데는 열석발언권을 둘러싼 재정부와 한국은행의 해묵은 갈등이 작용했다. 열석발언권이란 금통위 회의장에 참석해 의견을 밝힐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현행 한국은행법 제91조는 ‘기획재정부 차관 또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금통위 회의에 열석해 발언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비록 법률에 규정돼 있지만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해친다는 우려 때문에 이 조항은 사실상 사문화되다시피 해왔다. 이전까지 정부가 열석발언권을 행사한 것은 외환위기를 겪던 1998년 4월 9일, 1999년 1월 7일, 1999년 1월 28일, 1999년 6월 3일 네 차례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글로벌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정책 당국 간 경제상황에 대한 인식 공유와 정책공조 강화가 불가피하다”며 1월 8일 금통위 회의를 시작으로 열석발언권을 행사해왔다. 재정부 경제정책국 윤종원 국장은 “금통위 참석이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금통위의 독립성을 충분히 존중하며 운영하는 기반이 형성된 만큼, 정부가 금통위에 참석할 여건도 조성됐다고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열석발언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서자 한국은행은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재정부가 한국은행의 고유 영역인 금리 결정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해치는 관치라는 주장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정부가 지켜본다고 금통위가 입김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럽다. 사실 정부가 와서 굳이 말할 게 없다. 재정상황이나 정부가 처한 상황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며 “기본적으로 중앙은행은 정부와 대립각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정부가 열석발언권 행사의 명분으로 정책 공조를 들었지만 한국은행은 “지난해 정부와 한국은행이 맺은 정보공유 양해각서(MOU)로도 충분하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불법이 아닌 만큼 마지못해 정부의 열석발언권 행사를 수용했지만 금통위 내부적으로는 “최소한 금리 결정 때만은 차관이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4월 1일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취임하면서부터다. 한국은행 일부 금통위원이 김 총재와의 환담 자리에서 재정부 차관의 열석발언권 행사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김 총재는 5월 12일 금통위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좀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 현재 상황이 바람직한지, 아니면 시장에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효과적인 방안이 있는지 더 검토하고 시장과의 교감을 통해 대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재정부는 한국은행의 공식적인 입장이 전달되기 전까지는 기존의 방법을 고수하겠다는 의견이었지만, 이미 물밑에선 김 총재의 취임 직후부터 제도 개선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금리인상 출구전략 언제든 갈등 소지

    재정부-한은 밀월 모드로 전환?

    1월 8일 당시 허경욱 기획재정부 차관이 한국은행 본점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하려 하자 한국은행 노조원들이 피켓을 들고 반대하고 있다.

    재정부와 금통위는 수차례 논의 끝에 6월 10일 금통위 회의부터 재정부 차관이 열석발언을 하고 퇴장한 뒤, 한국은행의 금통위원들이 금리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일단락했다.

    ‘열석발언 뒤 차관 퇴실’로 접점을 찾으면서 재정부와 한국은행 모두 “양쪽이 윈-윈 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반응이다. 정부는 열석발언권 행사의 취지를 지키면서 실질적인 논의를 할 수 있게 됐고, 한국은행은 금융통화 정책의 마지막 보루인 금리 결정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요인을 최소화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은행법 개정, 금리인상 등을 두고 갈등을 빚어왔던 재정부와 한국은행이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몇 달 전만 해도 재정부와 한국은행은 출구전략의 핵심인 금리 인상을 두고 충돌 직전까지 갔다. 재정부는 “출구전략은 시기상조”라며 금리 인상에 부정적이었던 반면, 물가 안정에 중점을 둔 한국은행은 “물가 상승이 우려되는 만큼 선제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대립각을 세워왔다.

    김 총재가 이끌 한국은행의 색깔도 분명히 드러났다. 열석발언권을 두고 재정부와 한국은행이 한 발씩 양보해 합의를 이끌어낸 데는 정부와의 불필요한 갈등을 지양하는 김 총재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한 김 총재는 전임 총재들에 비해 정부와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정 직후 “한국은행도 큰 틀에서 정부”라며 “통화 정책을 포함한 모든 경제 정책의 최종 결정은 대통령의 몫”이라고 밝혀 한국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을 정도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라 평가를 내리는 것이 시기상조지만 일부에서 지나치게 정부 쪽으로 쏠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재정부 역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정책공조라는 본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풀이된다. 재정부 관계자는 “제도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논의하던 중이었는데 시기상 (김 총재 취임시기와) 잘 맞아떨어졌다. 단순히 신임 총재가 와서 잘된 것은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다만 “김 총재가 와서 기존의 방식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인식했고, 이를 두고 양측이 함께 논의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금융계 일각에선 열석발언권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한 것을 계기로 재정부와 한국은행이 그동안의 불편한 관계를 털고, 보다 원활한 정책공조가 이뤄질 것으로 내다본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한국은행 내부에서조차 “독립성을 우선시해야 할 한국은행 총재가 너무 정부 쪽으로 기운 것 아니냐”며 볼멘소리가 나온다. 비록 수면 아래로 내려갔지만 출구전략과 금리인상 시기를 둘러싸고 언제든지 갈등이 재연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양쪽의 관계 개선 여부는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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