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9

2010.05.31

王權의 무게가 너무 컸을까 13개월 통치, 19세 요절

예종과 안순왕후의 창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05-31 12: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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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權의 무게가 너무 컸을까 13개월 통치, 19세 요절

    예종의 능은 어머니 정희왕후(세조의 비)와 장인인 한백륜과 한명회의 감독 아래 만들어졌다. 장명등의 보주(탑이나 석등 따위의 맨 꼭대기에 얹은 구슬 모양의 장식)가 없어진 것이 아쉽다.

    세조가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뒤 왕가에는 불행이 끊이질 않았다. 세조와 정희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는 왕위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18세에 요절해 경릉(敬陵)에 묻혔다. 의경세자의 아들이자 세조의 원손인 월산대군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海洋大君)이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그가 바로 조선 제8대 왕인 예종(睿宗, 1450~1469). 그러나 재위 13개월 만에 19세로 요절했다.

    예종의 이름은 황(晄), 자는 평보(平甫). 그는 사가에서 해양대군으로 있을 때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의 딸과 결혼했고, 이듬해인 1457년 세자가 됐다. 그러나 세자빈 한씨가 인성대군을 낳고 건강이 악화돼 17세에 죽자 2년 뒤 청주부원군 한백륜의 딸과 다시 결혼했다. 두 번째 왕비가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다.

    모후 정희왕후가 첫 수렴청정

    예종은 ‘성품이 영명과단(英明果斷·총명하고 일에 과단성이 있음)하고 공검연묵(恭儉淵默·공손하고 겸손하며 속이 깊고 말이 없음)’했다. 또한 서책에 뜻을 두어 날마다 시학자에게 세 번씩 진강하게 하고, 몹시 춥거나 더운 날에도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병이 위중해져 수강궁(창경궁)으로 옮긴 세조는 예조판서 임원준을 불러 “내가 세자에게 전위하려 하니 모든 일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정인지 등이 “성상의 병환이 점점 나아가시는데 어찌하여 자리를 내놓으려고 하십니까?” 하자 세조는 “운이 다하면 영웅도 마음대로 못하는데 너희가 나의 하고자 하는 뜻을 어기니,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라고 한 뒤 내시로 하여금 면복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세자에게 내려주었다.



    세자는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이고, 백관이 모여 의위(儀衛·의식의 장엄함을 더하고자 참열해 호위하는 것)하는 가운데 수강궁 중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날이 1468년 9월 7일로 예종의 나이 18세였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 그는 섭정과 원상제도로 왕권을 행사했다. 그의 모후 정희왕후가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했는데 정희왕후는 대담하고 결단력이 있어 예종의 유약한 성품을 잘 받쳐주었다. 원상제도는 왕의 미숙한 업무 능력을 보조하기 위해 그가 지명한 원로 중신들이 승정원에 출근, 모든 국정을 상의해 결정하면 왕이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제도다. 이때 원상으로 지목된 이는 한명회, 신숙주, 구지관 등이었다.

    예종이 즉위한 해인 1468년, 태종의 외손이자 세종의 외종질이며 세조와는 외사촌 간으로 28세에 병조판사에 오른 남이 장군이 이를 시기한 유자광, 한명회 등의 계략에 걸려 처형당하는 역모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예종은 훈구세력의 횡포를 막고자 권문세가들의 기득권을 금지하는 분경금지법과 실세들이 세금을 거둬드리는 경저인제도를 폐지했다. 그리고 최항 등이 세조 때 입안한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병약한 예종은 즉위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왕권을 이어받자마자 아버지 세조의 국장을 치렀고, 세조의 뜻을 좇아 할아버지 세종의 능원을 여주로 옮기는 대역사를 지휘했다. 1년에 국장을 두 번이나 치렀으니 예종은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더군다나 형 의경세자의 요절을 지켜봤고,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백성들의 정서와 단종의 후손들에 의한 복권 기도로 중압감이 컸는지도 모른다.

    王權의 무게가 너무 컸을까 13개월 통치, 19세 요절

    1 동원이강형인 창릉은 왕(왼쪽)과 왕비(오른쪽)의 능침이 있는 언덕 가운데에 정자각을 세웠다. 2 난간석을 두른 예종의 능침. 3 안순왕후 능침에서 바라본 예종의 능침. 4 연산군 때 만든 안순왕후 능침의 무석인. 연질의 돌을 쓴 탓인지 부식이 심하다. 그래도 수백 년을 지켜온 늠름한 자태는 우리의 조각기술을 자랑하고 있다.

    1년에 국장 두 번 치르고 지쳐

    1469년 11월 28일 예종의 병세가 위독하자 승지와 원상 등이 사정전으로 모였다. 그리고 진시(辰時·오전 7~9시)에 예종은 자미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신숙주, 노사신이 자미당에 들었다. 이들은 승하를 확인하고 대궐문 안으로 들어와 궁성의 모든 문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태비(정희왕후)에게 “국가의 큰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주상(主喪)은 불가불 일찍 결정해야 한다”고 전한 뒤, 주상자(主喪者)를 정해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기를 청했다. 이에 태비가 강녕전 동북방에 나와 원상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자(제안대군, 당시 4세)는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덕종의 장남, 성종의 친형으로 원손이었으나 세조 승하 후 너무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삼촌인 예종에게 왕위를 넘김)은 어려서부터 병약하다. 자을산군(者乙山君·성종)이 비록 어리나 일찍이 세조께서 그의 도량을 칭찬하여 태조에 비했으니 그를 주상(主喪)을 삼는 것이 어떠냐?”

    이에 모두 마땅하다 했다. 태비를 비롯해 신하 모두 슬픔에 잠겨 있자 신숙주가 나서서 왕권 계승을 재촉했다. 선왕의 죽음보다 왕권 계승이 중요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예종이 승하한 지 10시간 뒤인 당일 신시(申時·오후 3~5시)에 자을산군이 면복을 입고 근정문에서 즉위한 뒤 교서를 발표했다.

    이날 대사면이 실시되고 모든 승지와 원상이 대궐 안에서 숙직했다. 졸지에 대비가 된 예종비 안순왕후는 지아비를 잃은 데다 원자인 아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권까지 빼앗겼으니 이중의 아픔이었을 것이다. 반면 인수대비는 지아비(의경세자)의 요절로 왕권을 시동생에게 넘겼다가 다시 작은아들을 통해 넘겨받았으니 한을 푼 기쁨이 가득했을 것이다.

    이처럼 왕이 승하한 지 1~5일 만에 바로 즉위식을 하는 것은 왕위 계승자가 선왕의 장례를 주관하면서 조정을 안정시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선왕의 상주는 반드시 친아들(장자)이 아닌, 왕권을 물려받은 차기 왕이 맡는다. 따라서 예종의 주상(主喪)은 조카인 성종이며, 능의 조영도 성종이 주관했다.

    3개월 뒤 대행대왕의 존시는 ‘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이라 하고 묘호는 ‘예종(睿宗)’, 능호는 ‘창릉(昌陵)’이라 했다. 이때 국장도감은 신숙주·서거정, 산릉도감은 예종의 장인이며 우의정인 한백륜과 조문석 등이 맡았다. 그리고 예조에 명해 대행대왕(예종)의 원자(元子)를 왕자(王子)로 고쳐 부르게 했다. 곧이어 대왕대비(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중앙과 지방에 알렸다. 모든 상례는 세조의 예에 따랐다.

    장례일(음력 2월 5일) 전라도와 경상도에 흙비(황사)가 내렸다. 그때도 중국에서 황사가 온 것으로 추정된다. 능역의 낮고 이지러진 곳은 보토를 하고, 최소 910기의 사가 무덤을 이장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능선과 숲을 잘 보전했다.

    예종 승하 29년 후인 1498년(연산군 4년) 12월 22일 대왕대비(안순왕후)의 건강이 좋지 않자 대조전에서 진연(進宴·건강을 위한 잔치)을, 선정전에서 나례(儺禮·귀신을 쫓는 제례)를 베풀었으나 다음 날 왕대비는 승하했다. 대행대비의 시호를 안순(安順)으로 했다. 이때 압존(壓尊·보다 높은 어른 앞에서 어른의 공대를 줄임)해 칭호를 부를 때, 즉 애책(哀冊·애도하는 글, 발인문)에 시호를 쓸 때 정비는 성씨를 붙이나 계비 등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안순왕후가 승하한 뒤 능원을 조영하고 가정자각을 지었다. 구정자각은 길례로, 가정자각은 흉례로 하다 3년 후 길례로 합제했다.

    예종의 첫째 아들 인성대군은 어려서 죽었고, 예종 이후 왕위 계승 1순위였던 둘째 제안대군(안순왕후 소생)은 사촌형인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세종의 일곱 번째 아들 평원대군의 양자로 갔다. 왕권으로부터 아주 멀어진 것이다. 이후 왕권은 성종의 맏아들 연산으로 이어졌다.

    1498년 안순왕후 상 때 연산은 후속 군신으로 삼년상을 하지 않고 백관과 졸곡(卒哭·승하 후 3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 후 최복(衰服·아들이 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상중에 입는 상복)을 벗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친자인 제안대군은 ‘오례의’에 따라 3년 상복을 고집했다. 이에 연산군은 제안대군이 단지 천속지친(天屬之親·친부모 친자의 관계)일 뿐 군신의 예로 하는 것이 아니라며 백성으로서 졸곡 후 상제를 마치도록 명했다. 왕권의 후계자가 아님을 못 박은 것이다.

    제안대군은 두세 번의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노래와 사죽관현의 연주에 몰입했으며, 조카 연산군이 여자를 소개해도 마다했다. ‘패관잡기(稗官雜記·조선 명종 때 어숙권이 쓴 패관문학서)’는 제안대군을 가리켜 “몸을 보전하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했다”고 했다.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이의 생존전략이었을까? 아니면 어려서는 몰랐던 왕권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아무튼 그는 성종보다 30여 년을 더 살다 60세에 사망했다.

    동원이강 형식으로 간좌곤향 배치

    예종과 안순왕후 한씨가 묻힌 창릉은 동원이강 형식이다. 서북 측이 예종의 능침이고 동남측이 안순왕후의 능침이다. 모두 북서에서 남서향하는 간좌곤향(艮坐坤向)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6의 서오릉 능역 북동쪽 가장 안쪽에 있다.

    창릉은 서오릉 영역 내에 왕릉으로 조영된 최초의 능으로, 병풍석을 세우지는 않고 봉분 주위에 난간석을 둘렀다. 석물의 배치는 일반 왕릉과 같고, 양쪽 능침 아래 중간에 정자각과 홍전문을 직선축으로 해 수라청(水刺廳), 수복방 등이 대칭으로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왕비능의 문석인은 왕릉과 달리 왼손에 지물을 쥐고 있으며, 투구가 길고 여기게 짧은 상모(象毛)가 달렸다. 요대는 좌에서 우로 대각선을 이룬다. 30여 년 늦게 연산군의 감독 아래 제작된 석물은 연질의 석재를 사용한 탓인지 풍화작용으로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양쪽 능침 장명등 지붕 옥개석의 상륜부가 없어진 것이 아쉽다.

    예종의 첫째 부인인 세자빈 한씨의 무덤은 원으로 조영됐으나 1472년 성종이 장순왕후로 추존하면서 능명을 ‘공릉(恭陵)’으로 했다. 공릉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4-1 파주삼릉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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