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9

2010.05.31

어뢰 한 방, 6·15 실체를 벗겼다

천안함 사건으로 6·25 시대로 회귀 … 지난 10년 순진무구한 세월 안보에 치명적

  • 류길재 북한대학원대 교수 kjstar@kyungnam.ac.kr

    입력2010-05-31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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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뢰 한 방, 6·15 실체를 벗겼다
    “천안함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10년 전으로 후퇴했다.”

    “6·15시대가 가고, 6·25시대가 왔다.”

    천안함 침몰사건 조사 결과와 정부의 대북 제재조치가 발표되자 이런 비난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문과 정부 관련 부처들이 내놓은 조치들로 인해 2000년 6·15정상회담 이후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가 진전시킨 남북관계가 다시 퇴보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과연 이 말들은 옳은 것인가.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점을 짚어봐야 한다. 6·15정상회담이 이룩한 남북관계가 그전과 다른 것인가 하는 점과 천안함 사건이 남북관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햇볕정책은 7·7선언의 연장선

    6·15정상회담은 김대중 정부의 이른바 ‘햇볕정책’의 소산이다.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그 평가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노태우 정부가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 즉 ‘7·7선언’으로 더 잘 알려진 선언을 통해 남북 고위급회담의 시대를 열고 ‘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하게 된 대북정책의 연장에 있다. 탈냉전 시대의 도래와 남북 간 국력 격차, 특히 경제력의 격차가 노태우 정부로 하여금 이 같은 정책을 선언할 수 있게 만든 시대적 조건이었다. 이런 조건이 없었다면 이 정책을 추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는 이러한 조건 외에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이 겪은 대기근과 경제난이 추가됐다. 북한은 국가로서의 존립조차 위협받는 상태에 처했고, 북한을 연착륙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은 햇볕정책의 중요한 근거였다. 햇볕정책이 노태우 정부 대북정책의 연장에 있다고 이야기하면 펄쩍 뛸지도 모르지만 김대중 정부도 얼마 가지 않아 노태우 정부 때 나왔던 ‘화해협력 정책’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두 정부의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김대중 정부에서의 남북관계는 두 가지 계기로 추진력을 얻었다. 하나는 ‘소떼 방북’으로 상징되는 정주영 회장의 금강산 관광사업 시작이고, 다른 하나는 6·15정상회담이다.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10년 만에 사업 자체가 벼랑 끝에 내몰린 금강산 관광은 이후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남북 교류협력의 바로미터였고,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상이었다. 금강산 관광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추진된 거의 모든 남북관계의 인큐베이터였던 것이다. 6·15정상회담 역시 이 인큐베이터에서 배양되고 숙성됐다. 정몽헌 회장의 비극적 죽음이 이를 충격적으로 보여줬다.

    김대중 정부는 자신들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그 후의 모든 남북관계가 이뤄졌다고 강변하고 싶겠지만, 금강산 관광과 이를 통해 전달한 대북 송금이야말로 그 원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남북관계가 확연히 달라진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본질적인 변화일 수 없었다. 남북 교류협력이 잦아지고 커지면 남북관계의 적대적인 성격도 변화할 것이라는 두 정부의 환상은 지금 생각해봐도 그 순진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런 정책을 보다 장기적으로 일관해서 추진한다면, 언젠가는 북한의 대남인식과 정책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의 대북정책은 매우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휘발성이 강하다.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첫 번째 의제이지만 사실 국민 다수는 관심을 별로 두지 않는다. “훨씬 장기적으로 일관해서 추진한다”는 전제는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는 명제였다. 더구나 이 두 정부 때 남남갈등의 지수가 최고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두 정부 스스로 이 전제 자체를 망가뜨렸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정권에게 남북관계는 존립을 위한 정당성과 직결된 사안이다. ‘미제의 괴뢰’인 ‘남조선’의 존재야말로 북한 정권이 정당성을 구가할 수 있는 근거다. 분단과 전쟁으로 공고화된 남북관계의 적대성은 북한의 세습독재와 사인(私人)적 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공포정치의 자양분이다. 민주주의는 차치하고 최소한의 국민 생존과 복지를 위한 정책 추진에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는 김정일 정권이 건재한 이유는 오직 남북관계의 적대성에 있다. 그런데 그런 원천이자 자양분을 북한 정권이 돈 ‘몇 푼’과 맞바꿀 거라 봤다면 순진하다는 평가로는 부족하다.

    장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점진적으로 교류협력을 통해 분단을 평화적으로 관리한다는 뜻에서의 관여정책(engagement)은 필요하다. 통일 담론도 끊임없이 역설해야 한다. 그것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그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할 수 있는 대북정책의 요체는 바로 이것이다. 문제는 5년 단임 정권, 그것도 정당정치가 정착되지 못한 한국 정치에서 대북정책의 지속성을 견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각 정권은 남북관계의 속성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한 발자국씩 전진해야 한다. 그런데 두 정부는 이런 상식을 거부했다. 핵실험이라는 한국 안보에 치명적인 사안이 발생해도 북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이들의 평가에 따르면 남북관계는 발전하고 있는데, 북한은 핵실험을 했다는 이 기묘한 동거를 돌파하려 하지 않았다. 임기 말이 돼 애걸하다시피 해서 성사시킨 노무현 정부의 10·4정상회담은 무기력했다. 그리고 북한은 한국과 미국에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자 곧바로 장거리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으로 화답했다.

    이명박 정부의 또 다른 강박

    천안함 사건은 이명박 정부에게 보내는 북한의 최후통첩이다. 정부의 대응조치 발표 다음 날인 5월 25일 북한은 현 정부 임기 동안 남북관계를 단절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진심일 것이다. 이명박 정부 2년 동안 북한은 엄포도 놓고 호소도 하면서, 과거 두 정부처럼 이번에도 교류협력을 이어주면서 정상회담 개최에 집착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5년 임기의 3분의 1이 되는 지난해 8월, 김대중 대통령의 장례식은 북한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해 하반기쯤 정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다면 과거 두 정부 때처럼 남북관계로 이명박 정부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전략적 판단을 했을 법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신중을 넘어서 몸을 사렸다. 북한으로부터 오는 신호가 이명박 정부가 기대했던 남북관계의 발전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의 희망은 갖고 있지만 자신은 두 정부가 잡힌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의미의 강박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안함 사건이 벌어졌다.

    천안함은 북한의 냉전적 사고와 전략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확하게 6·25전쟁 60주년이 되는 해에 북한이 유사한 도발을 반복했다는 사실보다 이를 잘 웅변해주는 것은 없다. 변한 것은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민주화일 뿐이다. 북한도, 남북관계도 변하지 않았다. 6·15정상회담 10주년이 되는 시점에 북한은 6·25전쟁 60주년으로 화답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북한에게 6·15정상회담은 상대에 따라 의미가 있을 뿐, 그 저변에 흐르는 대남인식의 요체는 6·25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 것이다. 6·25를 극복하지 못하면 6·15는 그저 에피소드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남북관계의 진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6·15가 6·25를 극복하는 계기였다는 생각은 전도가 뒤바뀐 미망(未忘)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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