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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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쏘고, 아들 준생은 사죄하다

조선총독부가 연출한 화해극에 출연 등 친일행각 … 이토 아들에게도 머리 숙여

  • 이종각 jonggak@hotmail.com

    입력2010-03-23 1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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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은 쏘고, 아들 준생은 사죄하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이토 히로부미의 영혼을 위로하겠다며 만든 박문사를 찾은 참배객들.

    3월 26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1909년 10월 26일)한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은 이토가 죽은 지 정확히 6개월이 되는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의 형을 집행했다. 그로부터 5개월여 뒤인 8월 29일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다.

    이토 기리는 절 서울 한복판에 건립

    일제의 식민지체제가 어느 정도 정착돼가던 1930년대, 조선총독부는 초대통감 이토의 공적을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라는 절을 세웠다. 서울 한복판에 한국의 ‘원흉’ 이토를 기리는 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서울 장충단공원에 가면 ‘奬忠壇(장충단)’이라고 쓴 작은 비석이 서 있다. 이 비문은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직접 쓴 것이다. 장충단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일(1895년 10월 8일) 경복궁 침전에 난입한 일본 낭인 등에 맞서 황후를 보호하려다 숨진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역시 같은 날 일본군에게 맞서다 사살된 조선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고종의 명으로 1900년에 세운 제단이다.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주변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장충단 바로 위에 박문사를 세웠다. 현재 호텔신라 영빈관 자리다.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와 재한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토의 공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려는 현창(顯彰) 움직임이 있었고, 이토의 동상을 건립하자는 안이 여러 번 나왔다. 그러나 공공장소에 이토의 동상을 세울 경우 조선인의 반감을 사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 대신 이토 사망 20주년이던 1929년 말 동상보다는 이토의 명복을 기원하는 보리사(菩提寺), 즉 불교 사찰을 건립하자는 움직임이 구체화됐다.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 미노루(齊藤實)가 두 번째 조선총독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정무총감인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가 발의했다. 1930년 초 사찰 건립을 위한 ‘이토공기념회’가 조직됐다. 조선총독부 직원들을 중심으로 박영효, 윤덕영 등 6명의 조선 귀족도 참여했다.

    사찰 명칭은 기념회 조직 때부터 이토의 이름을 따서 박문사로 정해졌다. 사찰 이름 앞에 붙이는 ‘산(山)’ 이름으로는 이토의 아호인 춘묘(春畝)를 써서 정식 명칭은 ‘춘묘산 박문사’가 됐다. 박문사 종파는 이토가 생전 귀의한 조동종(曹洞宗)으로 정해졌다.

    박문사 건립을 위한 기부금 목표액은 조선 20만 엔, 일본과 만주 15만 엔으로 총 35만 엔이었다가, 그후 40만 엔으로 증액됐다. 총독부는 20만 엔 중 8만 엔을 조선 각도에 할당했다. 함경남도 관리들은 월급의 0.5~1%를 내야 하는 거의 강제적인 모금이었다. 일본에선 미쓰이(三井) 같은 재벌이 거액의 기부금을 내겠다고 신청했다.

    박문사 건립 후보지로 삼청동, 사직단, 장충단공원, 장충단공원 동편, 왜성대(倭城臺) 총독관저(구 통감관저) 등 5곳이 선정됐다. 심의 끝에 ‘노송이 울창하게 무성하고 눈 아래 공원이 보이며 멀리 시가지를 전망할 수 있는, 교통이 매우 편리한 땅’이라고 평가받은 장충단공원 동편으로 결정됐다. 당시 노면 전차의 종점이 ‘장충단공원역’이었다.

    안중근은 쏘고, 아들 준생은 사죄하다

    박문사에서 일본인으로 보이는 2명의 감독자가 잔디를 손질하는 데 동원된 조선 부녀자들을 감시하고 있다.

    박문사는 1931년 6월 공사가 시작돼 32년 10월 26일 이토의 23회 기일에 맞춰 준공식이 거행됐다. 박문사는 13만 8900여 m²(약 4만 2000평) 부지에 본당은 조선식을 가미한 철근 콘크리트의 2층 건물로 건축면적 1320여 m²(약 400평), 높이 약 13m였으며, 부속건물을 합쳐 전체 건축면적이 1650여 m²(약 500평)에 이르는 큰 사찰이었다. 지하에는 집회실과 사무실을 만들고 스팀난방까지 갖춰, 당시 사찰 건물로는 드물게 근대적 구조와 설비를 자랑했다. 도로도 전차 종점에서부터 약 22m 폭의 벚나무 가로수 길로 확장됐으며 도로에서 정문까지 약 120m, 그리고 정문에서 약 65m 떨어진 제1계단, 그 다음 제2, 제3계단을 거쳐 본당 앞 광장에 닿게 돼 있었다. 본당 정면에는 영친왕이 쓴 ‘춘묘산(春畝山)’이라는 편액이 걸렸다. 이토는 한국통감 시절 영친왕을 교육시킨다며 사실상 인질로 일본으로 데려갔었다.

    일제는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光化門)을 허무는 등 궁궐을 멋대로 파괴하고 훼손했는데, 박문사를 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본당은 신축이었지만 가람은 경복궁의 준원전(濬源殿), 정문은 당시 경성중학교 후문으로 쓰던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을 옮겨다 지었다. 정문 옆 돌담은 광화문을 허문 뒤 그 석재를 가져다 사용했다.

    그러나 완공 후 조선인뿐 아니라 조선에 사는 일본인도 이 절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자, 박문사 측은 1930년대 중반부터 절을 서울 관광의 필수 코스로 만들었다. 서울 시내 유람 버스 코스(약 3시간 반 소요)에도 박문사가 포함됐다. 이후 이곳에서 조선총독부에 근무한 일본인이나 박영효 등 친일파의 장례식이 열렸고, 태평양전쟁 중에는 위령제도 거행됐다.

    친일파가 된 안 의사의 아들 안준생

    이토 사망 30주기가 가까워진 1939년 10월 15일 오전 11시, 안 의사의 차남 안준생(安俊生·당시 32)이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 다쓰오(松澤龍雄)와 함께 박문사에 나타났다. 안준생은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주지가 준비한 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뒤 추선(追善) 법요(法要)를 거행했다.

    이날 안준생의 박문사 방문에 대해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망부(亡父)의 사죄는 보국(報國)의 정성으로/ 이토공 영전에 고개 숙이다/ 운명의 아들 안준생[중근 유자(遺子)군]’이라는 제목의 7면 톱기사를 사진과 함께 내보냈다(1939년 10월 16일자 조간). 이 신문은 안준생의 사죄를 “실로 조선통치의 위대한 변전사(變轉史)이며, 내선일체(內鮮一體)도 여기에서 완전히 정신적, 사상적으로 하나가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마음으로부터의 기쁨’이라는 안준생의 담화도 게재했다. 안준생은 이토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절을 방문해 자기 아버지가 이토를 죽인 일은 잘못이었다며 사죄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안 의사에게는 아들 우생(祐生, 분도라고도 불림)과 준생, 딸 현생(賢生)이 있었다. 장남 안우생은 1914년 북만주 무린에서 일제에 의해 열두 살의 나이에 독살됐다고 한다. 안준생은 1907년생으로 39년에는 상하이에서 잡화상을 운영했다. 그 무렵 상하이는 중일전쟁(1937년)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김구 주석이 이끄는 상하이 임시정부도 일본군을 피해 항저우(杭州) 등지로 옮겨가 있었다. 당시 안준생은 이미 친일파로 변절해 있었다. 일본 측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안중근은 쏘고, 아들 준생은 사죄하다
    ‘박문사의 화해극’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

    1939년 10월 7일 상하이의 조선인 친일단체 회장 이갑녕을 단장으로 한 만선(滿鮮) 시찰단 14명이 서울에 왔는데, 여기에 안준생도 있었다. 시찰단은 조선총독부를 방문해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을 만났다. 안준생은 박문사를 방문한 다음 날인 10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伊藤文吉)와 대면했다. 이 자리에 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가 동행해, 둘의 만남에 총독부가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 이토 분키치는 농상무성 관리를 지낸 뒤 1944년부터 일본광업 사장으로 있었다. 이 회사가 평안북도 운산탄광을 사들였고, 그 광산을 둘러보러 왔다가 귀국 길에 서울에 들른 것이라고 했다. 안준생과의 만남이 우연임을 애써 강조한 것이다.

    다음 날인 10월 17일에는 안중생과 이토 분키치가 함께 박문사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토의 영전 앞에서 두 아들이 ‘화해’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안준생이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하자 이토 분키치는 “나의 아버지도, 당신의 아버지도 지금은 부처가 돼 하늘에 있기 때문에 사과의 말은 필요 없다”고 화답했다고 한다[‘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조선판 1939년 10월 19일자].

    안준생과 이토 분키치의 대면에 대해 언론은 ‘불문의 은혜로 맺는 내선일체’ ‘유아 눈물의 진심/ 가을 깊어가는 박문사에/ 제사 모시는 빈(空) 안중근 영위(靈位)/이제 이토공의 영령도 미소 지을 것’라는 제목에 “참된 내선일체, 과거 30년 전의 사건은 이렇게 박문사의 법등(法燈) 아래서 사랑하는 자식들에 의해 정화(淨化)됐다”고 극찬했다(‘경성일보’ 1939년 10월 19일자 석간).

    ‘박문사의 화해극’은 조선에서 발행되는 신문뿐 아니라 일본에서 발행되는 신문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1937년 10월 17일자 조간은 ‘원수를 넘어 따뜻한 악수/ 하얼빈 역두(驛頭)에서의 비극 지금은 먼 꿈/ 30년 후 이토공과 안(安)의 유아(幼兒) 대면’이라는 제목으로 사진과 함께 6단 기사(11면)로 대서특필했다.

    안중근은 쏘고, 아들 준생은 사죄하다

    1939년 10월 16일 조선호텔. 뒤에 서 있는 사람(가운데)이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 다쓰오다. 안준생(아래 왼쪽)과 이토 분키치(아래 오른쪽)의 대면.

    그러나 ‘동아일보’는 안준생이 조선시찰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왔다는 사실을 1단으로 보도했을 뿐 박문사에서 벌어진 화해극에 대해서는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다음해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이 일을 들었다. ‘조선일보’는 안준생과 이토 분키치의 대면을 ‘역사는 구른다/ 30년 전 하얼빈 역두의 악몽을 초월하여’(1939년 10월 17일)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백범의 통분 “민족의 반역자, 교수형 처하라”

    안준생의 친일 행적에 대해 백범 김구는 통분했고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백범일지’ 619항/ 너머북스 펴냄)

    김구(1876년생)는 안 의사(1879년생)와 같은 황해도 출신에 비슷한 연배로, 안 의사의 부친인 안태훈(安泰勳) 진사의 집에도 들른 적이 있어 소년 시절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가 ‘백범일지’에도 나온다. 또 안 의사의 동생 정근(定根)의 딸이 김구의 맏며느리가 됐다. 그러기에 안준생의 친일행각이 김구에게는 더욱 가슴 아팠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중국 당국에 교수형을 부탁했을까.

    안준생은 1950년 한국으로 돌아와 부산에서 살다가 다음해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의사기념관 홈페이지 가계도에는 그의 2남 1녀 자녀가 미국 등지에 사는 것으로 나와 있다.

    박문사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23일 화재로 전소됐다(‘경성일보’ 1945년 11월 26일자). 이승만 정권 말기인 59년 박문사 본당 자리에서 영빈관 신축공사가 시작됐지만 4·19와 5·16 등 잇단 정변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64년 겨우 영빈관이 완공됐으나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우여곡절 끝에 73년 삼성그룹에 넘어갔다. 79년 영빈관 옆에 호텔신라가 세워졌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2009년)을 맞아 국내 학계, 언론이 다각도로 재조명했지만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다뤄지지 않았다. 다만 ‘연합뉴스’가 ‘안중근 의거 100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2009년 11월 1일자)이라는 제목으로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국내 어느 연구자도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만큼 안 의사가 갖는 영웅성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안준생의 친일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안 의사의 업적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아들이 있었다는 것도 굴곡 많은 한국 근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안 의사의 전체상을 이해하는 데 아들 안준생의 친일행적도 사실대로 알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종각 씨는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다, 2004년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연구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주오대학 겸임강사로 일하면서, 일본 신문과 잡지 등에 한국 및 한일관계에 대한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등이 있으며, 이번 기사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 평전’(근간/ 동아일보사 펴냄)에 실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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