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9

2009.11.03

“황제 칭하지 못하는 나라 살아 무엇하리”

임제, 시대를 앞선 고독한 혁명가 … 성리학적 세계관 거부 사대사상 통렬히 비판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09-10-28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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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 칭하지 못하는 나라 살아 무엇하리”

    임제는 동서붕당으로 갈라져 권력에 탐닉한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낀 나머지 술과 여인, 벗들을 가까이하며 세상을 유람했다. 그림은 김홍도의 ‘후원유연’.

    임제(林悌·1549∼1587)는 ‘백호(白湖)’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진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백호는 섬진강 지류를 가리키는데, 바로 그의 향제(鄕第·고향집)가 있는 곳이다.

    백호의 자유분방한 성품은 성리학이 풍미하던 당시의 경직된 지적 풍토와는 다소 괴리가 있어 그는 창루(娼樓·창기가 영업하는 집)와 주사(酒肆·술집)에 빠져 세상을 배회하다가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고향 회진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22세 되던 해 겨울 속리산에 은거 중이던 성운(成運·1497∼1579)에게 사사해 3년간 학문에 정진할 때 ‘중용(中庸)’을 무려 800독(讀) 하고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려 하지 않으나 속세가 산을 떠나려 한다(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라는 화두를 던졌다는 일화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 후 29세에 알성시에 급제하여 10년간 흥양(현재의 고흥군) 현감, 서도병마사, 북도병마사,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 지제교(知製敎·국왕의 교서 작성 업무를 맡음) 등의 관직생활을 했다.

    하지만 동서붕당으로 편을 나눠 권력에 탐닉한 속물들의 행동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절망과 울분으로 세상을 유람하며 술과 여인과 벗들을 가까이하며 숱한 일화를 남겼다. 백호의 일화 중 기생과 관련된 로맨스는 감동으로 와 닿는 것이 많다.



    특히 그가 30대 중반에 서도병마사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면서 송도를 지날 때 황진이(黃眞伊)의 무덤을 찾아가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방초(芳草) 우거진 골에 시내는 울어댄다. 가대(歌臺) 무전(舞殿)이 어디 어디 어디메오, 석양에 물차는 제비야 네 다 알까 하노라”라는 시조 2수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가 조정의 비판을 받고, 부임하기도 전에 파직당한 것은 풍류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화다.

    속물들 권력욕에 환멸 세상 유람

    또 평양 기생 한우(寒雨)와 백호가 주고받은 시조가 ‘한우가(寒雨歌)’로 전하는데, 남녀 간의 농밀한 사랑을 속되지 않게 표현해 더욱 은근하다. 임제가 한우를 보고 “북천(北天)이 맑다기에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서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가 오네. 오늘은 찬비를 맞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라고 읊자, 한우는 이에 화답해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은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를 맞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라고 했다.

    백호가 ‘한우’라는 이름을 ‘찬비’에 빗대 찬비를 맞았으니 얼어 자겠다고 하자, 한우는 자신을 ‘찬비’에 빗대 원앙침 비취금 속에 녹아 자라고 한 것이다. 참으로 승화된 러브스토리가 아닌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백호집서(白湖集序)’에서 “뜻이 가는 대로 말이 따라가 상상할 수도 없이 물이 샘솟듯 구름이 일어나듯 저절로 일가(一家)를 이루니, 마치 오색 신기루가 바다 위에 떠서 누각이 저절로 만들어져 자귀나 도끼를 댈 여지가 없는 것과 같았다.

    이 어찌 한유(韓愈)의 이른바 ‘물이 크면 그 위에 뜨는 물건이 크고 작고 가릴 것 없이 모두 뜬다’는 게 아니겠는가”라고 백호의 호방하고 쾌활하며 청절(淸絶)한 시풍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백호가 황진이, 한우와 관련한 염문(艶聞)과 일화로서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그를 그립게 한다. 이익(李瀷)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보면 조선의 미래를 걱정한 그의 우국충정을 엿볼 수 있는데 “임백호는 기상이 호방하여 검속당하기를 싫어했다.

    병으로 장차 죽음에 임해서 여러 아들이 통곡하자 그가 말하기를 ‘사해의 여러 나라에서 칭제(稱帝)를 하지 않은 자가 없거늘 유독 우리나라는 천자를 칭하지 못하고 중국을 섬기니 내가 살면 무엇하며 죽은들 무엇하리(四夷八蠻 皆爲帝國 獨我國不能自立 人主中國 吾生何爲也 吾死何爲也)’라는 유언을 남겼다”라고 썼다. 죽으면서까지 사림들의 모화사대사상을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

    당시 사림들의 가치관으로 보면 백호의 유언이 희언(戱言)으로 치부됐을지 모르지만, 그는 시대를 앞서간 고독한 혁명가였다. 사실 백호 몰후(歿後) 2년에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死)에서 정여립(鄭汝立·1546∼1589)은 백호의 유언을 강조하면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으랴(公卿將相 寧有種乎)”라며 인생 천지에서 누구나 천자가 될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을 타파하는 놀라운 발언을 하지 않았는가.

    다케시마 주장 적극·단호한 대응 필요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려는 의도로 제정한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명칭)의 날’ 행사를 내년부터 시마네현뿐 아니라 도쿄에서도 개최한다고 최근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 독도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과 실효적 지배로 우리의 영토가 자명한데도 일본은 독도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며 망발을 일삼고 있다.

    ‘다케시마의 날’은 일제가 러일전쟁 중 마각을 드러내어 한일의정서에 규정된 ‘일본군이 전략상 필요지점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에 의해 독도를 다케시마로 개칭,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1905년 2월22일을 기념해 2005년 3월16일에 조작한 날이다. 당시 우리도 이에 맞서 경남 마산시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이종무(李從茂)가 병선 227척, 병사 1만7000여 명을 이끌고 마산포를 출발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쓰시마)를 토벌한 기해동정(己亥東征)의 6월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제정했다.

    정권교체 후 민주당 새 정부의 일본 총리는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를 반대한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고 한일정상회담에서 “역사를 직시할 용기가 있다”라고 했으며, 일본 외상은 “한·중·일 3국 공통의 역사교과서를 만들기 전에 3국의 역사 공동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지도층의 의지와는 상반되게 일본 군국주의의 후예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주도한 후소샤(扶桑社)와 지유샤(自由社)의 역사교과서를 채택하는 학교가 늘고 있다니 그들의 발호(跋扈)가 심히 우려스럽다.

    2010년은 국권피탈(합방조약) 100주년이 되는 해로, 한일 간의 지난 100년 역사를 매듭짓고 새 역사를 열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앞으로는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뒤로는 구태를 벗지 못하는 일본의 추악한 역사 왜곡에 한국 정부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아, 백호가 죽은 지 400여 년 세월이 흘렀건만 무능한 이 땅의 후손들은 아직도 그의 유언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자괴감에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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