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2

2009.09.08

무심코 껌 씹다가 “사움(금식)! 사움!”

다종교 공존 이스라엘의 특별한 라마단 에피소드 만발 … 무더위 속 육체노동자 ‘죽을 맛’

  • 예루살렘=남성준 통신원 darom21@hanmail.net

    입력2009-09-02 13: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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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도 어김없이 라마단이 찾아왔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로, 이슬람의 ‘성월(聖月)’이면서 한 달간 금식해야 하는 달이기 때문에 흔히 ‘금식월(禁食月)’이라고 부른다. ‘코란’ 2장 185절엔 “라마단에 인류의 지침서인 코란이 내려졌다”고 기록돼 있으며, 따라서 “금식하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코란의 명령에 따라 오늘날에도 전 세계 무슬림은 라마단 한 달간은 금식을 한다. 금식은 아랍어로 ‘사움’이라고 하는데, 이슬람 신앙을 떠받치는 이른바 ‘다섯 개의 기둥’인 신앙고백(샤하다), 기도(살라트), 금식(사움), 순례(하지), 구제(자카트) 가운데 하나다. 물론 무슬림이라면 이 다섯 가지 계명을 모두 지켜야 한다.

    금식은 해 뜨는 시각부터 해 지는 시각까지 지속된다. 두 사람 이상이 달이 뜬 것을 목격하면 그날 하루의 금식은 끝난다. 해가 지고 난 뒤에는 자유롭게 먹을 수 있지만, 낮 시간에는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이 금지된다. 심지어 물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입 안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침을 삼켜도 되는지에 대한 논쟁이 끝나지 않았을 만큼 라마단 금식규정은 오늘날에도 엄격하게 적용된다.

    단 어린이, 노약자, 임산부, 환자 등에게는 금식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무슬림 여행자에게도 예외 규정을 두어 금식을 미룰 수 있되, 다른 달에 부족한 금식 날수만큼 채워야 한다.

    침 삼키는 것조차 허용 여부 논란



    올해의 라마단은 무더위가 한창인 8월22일에 시작됐다. 10월까지 더위가 지속되는 중동지역의 기후를 감안하면, 가장 금식하기 힘든 계절에 라마단을 맞게 된 것이다. 금식한다고 생업까지 중단해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 기간에도 무슬림은 평상시와 똑같이 일터로 나간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뙤약볕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일한다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라마단 한 달간 길가 그늘에서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이것이다.

    이슬람력은 음력을 사용한다. 우리나라의 음력이나 유대력이 달의 주기를 기초로 날짜를 계산하되 태양의 주기에 맞춰 주기적으로 윤달이나 윤년을 첨가하는 태음력인 데 반해, 이슬람력은 순수 음력이다. 따라서 라마단은 매년 11일씩 빨라진다. 중동지역에 거주하는 무슬림의 처지에서는 덥고 건조한 데다 일조시간이 긴 여름보다 우기(雨期)인 겨울에 라마단을 보내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그러나 한 번 여름에 라마단이 정해지면 7년이 지나야 겨울에 라마단이 오게 된다.

    라마단을 지키는 풍습이야 전 세계 무슬림이 대동소이하겠지만, 이스라엘에서의 라마단은 좀 특별하다. 이슬람이 대세를 이루는 다른 중동국가와 달리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공존하기 때문. 모두 함께 금식을 한다면 모르지만, 라마단에 개의치 않고 먹고 마시는 다른 종교 신도들 사이에서 금식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라마단 한 달간 이스라엘에서는 갖가지 에피소드가 생겨난다. 무슬림이 아니면 굳이 이슬람력을 꿰고 있을 이유가 없기에 아무 생각 없이 담배를 피워 물거나 껌을 씹으면서 아랍인이 거주하는 거리에 들어섰다간 이내 “라마단! 라마단!” 또는 “사움! 사움!”이라는 경고를 듣게 된다. 금식의 고통을 인내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존중해달라는 의미다. 해외에서 온 여행자라면 이런 경험을 더욱 자주 하게 된다.

    여행 중에 한낮의 더위와 갈증을 식히기 위해 가게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살 때면 주인에게 “살 수는 있지만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는다. 또한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라마단을 맞이한 무슬림들에게 축하인사를 하면서 “중동과 세계의 평화, 그리고 번영의 성취를 위한 기도에 우리도 동참할 것”이라고 밝힌 것처럼, 무슬림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일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덕목이다.

    이스라엘 국방부는 병사들에게 라마단에는 팔레스타인 대중 앞에서 먹고 마시거나 흡연하는 행위를 자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 밖에 이스라엘 주요 언론들이 라마단과 관련해 다룬 머리기사들을 살펴보면 ‘하마스, 라마단 앞두고 파타흐 수감자 석방’ ‘하마스, 라마단 맞이해 노동자들에게 100달러씩 지급’ ‘파타흐, 하마스에 3개월 휴전협정 제의’ 등으로 마치 우리나라 명절이나 국경일에 보도되는 기사들과 비슷하다.

    라마단에 오히려 음식 소비량 늘어

    고된 하루의 금식이 끝나면 달콤한 식사가 기다리는데, 대부분 다음과 같이 식사를 한다. 하루 종일 굶은 상태이므로 해가 지면 일단 가벼운 음식으로 요기를 한다. 이때 주로 먹는 음식은 핫케이크처럼 생긴 빵. 따라서 라마단 한 달간은 해질 무렵 거리 곳곳에 화덕을 내놓고 빵을 굽는 광경과 그 빵을 사먹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이렇게 가벼운 음식으로 위장을 다스려놓은 뒤 한두 시간이 지나면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한다. 이때 식사는 하루 종일 굶은 것에 보상이라도 하듯 평상시보다 푸짐하다. 식사가 끝나면 잠자리에 들고 새벽녘 동트기 전에 일어나 다시 가벼운 식사를 한다. 지난밤 푸짐하게 먹은 터라 밥맛이 있을 리 없지만, 하루 종일 굶을 것에 대비한 식사라고 할 수 있다. 금식월이라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하루 세 끼를 다 먹는 셈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한 달간 금식하기 때문에 이 기간에 음식물 소비량이 다른 달보다 현저히 적을 것 같지만 오히려 훨씬 많다는 점이다. 라마단이라고 해도 실제로 하루 세 끼를 다 챙겨먹는 데다, 이 달 자체가 일종의 축제월에 해당해 매일 밤 이웃, 친지들과 음식을 돌려 먹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양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일부 부유층의 경우, 라마단 한 달간 낮에는 잠을 자고 저녁에 일어나 밤새 먹고 즐기는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한다.

    일부 왕정국가의 왕실이 종종 구설에 휘말리는 이유도 이런 행태 때문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라마단은 손실이 큰 때다. 하루 종일 굶은 상태로 일하는 데다 단축 근무까지 하기 때문에 생산성이 크게 떨어진다. 반면 소비량은 늘어나므로 자연히 물가가 오른다. 한 번 오른 물가는 라마단이 끝나도 내려가질 않는다. 또한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속히 귀가하려는 차량들 때문에 1년 중 교통사고가 가장 많은 때이며, 각종 안전사고 발생률이 가장 높은 달이기도 하다.

    하지만 라마단에는 장점도 있다. 이와 관련해 동양사학자 정수일 씨의 저서 ‘이슬람 문명’은 1958년 이라크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후 감옥에 수감된 정치지도자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개한 바 있다. ‘금식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알라)에 대한 순종과 그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정신적 훈련이며, 사회적으로는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에 대한 동정은 물론 모든 무슬림의 연대의식과 동등의식을 권장하는 집단훈련이다.’

    이처럼 라마단은 신성한 달이므로 이 달만은 ‘뽑았던 칼을 칼집에 집어넣는다’고 한다. 마치 우리가 설 같은 명절에 덕담을 주고받듯, 무슬림도 라마단에는 다툼을 삼가고 서로에게 화해와 용서를 구한다. 라마단을 계기로 팔레스타인 내 라이벌 정파인 파타흐와 하마스 사이에 휴전협정이 제안되는 것도, 또 서로의 수감자들을 석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화해와 용서의 달인 라마단을 맞아 팔레스타인 내 분열이 치유되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에도 청신호가 켜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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