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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안방의 두 ‘악녀’ 멋지지 아니한가

미실&박기자 ‘캔디 캐릭터’와 정반대 … 고현정&김혜수 물오른 연기 짜릿

  • 정석희 방송칼럼니스트 soyow@naver.com

안방의 두 ‘악녀’ 멋지지 아니한가

안방의 두 ‘악녀’  멋지지 아니한가
지금까지 우리나라 드라마를 주름잡아온 여주인공들은 대체로 ‘캔디’형이었다. 역경에 처한 여주인공이 꽃미남의 도움을 받아 고난에서 탈출하고,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는 식의 드라마를 그간 얼마나 질리도록 봐왔나.

그중 가장 ‘진상’인 캐릭터를 뽑자면 지난겨울 선풍적 인기를 끈 KBS ‘꽃보다 남자’의 금잔디(구혜선 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금잔디야 나이 어려 뭘 몰라서 그랬다 쳐도 아침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남편의 배신으로 홀로서기에 나선 여주인공들은 철딱서니 없는 연배도 아니거늘 왜 그리 나약하고 비굴한지 모르겠다. 멀쩡한 성인여성이 누군가의, 특히 연하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한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말이 좋아 자립이지, SBS ‘조강지처클럽’의 나화신(오현경 분)을 위시해 수많은 아줌마 주인공들은 스스로 뭔가를 이루기보다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신세졌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걸 ‘그러려니…’ 하고 지켜봐야 하는 시청자들은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고.

남자에 기대기는커녕 거느리기까지!



그런데 최근 지지리 궁상 캔디 타입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불꽃같은 카리스마를 지닌 여주인공들이 등장했다. 바로 MBC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 분)과 SBS ‘스타일’의 박기자(김혜수 분)다. 미실은 아득한 1300여 년 전 인물이고 박기자는 지금 이 시대의 인물이지만, 남자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이를테면 극중 박기자가 쿨하지 못한 남자주인공을 떠나며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이래서 내가 연애를 안 한다니까!” 다른 드라마 여주인공이라면 하다못해 한강 둔치라도 찾아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텐데, 우리의 박기자는 잠깐 씁쓸한 표정을 지었을 뿐 이내 평정을 되찾고 일에 몰두하니 얼마나 멋진가. 이처럼 미실과 박기자는 남자의 도움 없이 살아가는 건 당연지사, 대업(?)에 방해되는 남자를 과감히 ‘가지치기’하는 냉철함도 갖췄으니 금상첨화라 할밖에.

심지어 미실은 남자들을 ‘거느리기’까지 한다. 왕이 후궁들을 거느리듯 남편 세종(독고영재 분)과 정부 설원랑(전노민 분)을 포함, 수많은 남정네를 부리는 미실은 서릿발 같은 가부장제에서 자란 내겐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비단 나뿐이랴.

미실이 눈 한번 치켜뜨면 온 신라가 두려움에 떨고, 박기자의 말 한마디에 한다 하는 패션잡지가 요동치는 걸 보면서 통쾌해하는 여성이 꽤 많지 싶다. 또한 두 여성 캐릭터는 받기보다 주는 데 능하다는 점에서도 똑 닮았다. 미실과 박기자는 자신에게 충심을 보이는 한 돈과 명예가 따르는 기회를 반드시 주는 리더이니 말이다.

안방의 두 ‘악녀’  멋지지 아니한가
끊임없이 남자들로부터 고가의 옷이며 구두며 일자리며, 때로는 집까지도 제공받는 ‘캔디’들과는 확실히 차별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여배우 이미숙이 떠오른다. 그녀의 행보는 여타 여배우들과는 사뭇 다르다. 남들 같으면 슬슬 엄마 역으로 정착할 마흔 넘은 나이에 ‘정사’라는 파격적인 작품으로 작품성은 물론, 흥행에도 성공하지 않았던가.

최근에도 이미숙은 MBC ‘에덴의 동쪽’과 SBS ‘자명고’에서 조연으로 소금과 같은 연기를 보여줬다. 두 배역 다 분명 주인공의 어머니이긴 했지만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를 지닌 여인네인지라 모두가 두려워 떨지 않았나. 아마 김혜수와 고현정도 극중 배역으로는 물론 여배우로서도 선배 이미숙과 흡사한 길을 걷게 되리라 믿는다.

그녀들이 극중에서 자식들의 결혼을 두고 감 놔라 대추 놔라 신경전을 벌인다거나, 바람난 남편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하소연하는 광경을 보게 될 리는 없지 싶으니까. 드라마 ‘선덕여왕’과 ‘스타일’을 보고 있노라면 올해 마흔이 된 김혜수와 이제 곧 마흔 소릴 듣게 될 고현정이라는 연기자가 꽃 같은 20대 연기자들과 견줘 연기로는 물론 미모에서도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니 오히려 더 돋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김혜수는 평면적으로 다가오는 잡지 에디터 캐릭터들 사이에서 홀로 입체감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혹자들은 김혜수의 지나치게 ‘에지’ 있는 연기가 신참 에디터 ‘이서정’ 역을 맡은 이지아의 연기를 죽인다며 김혜수에게 힘을 빼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엇비슷한 조건에서 고현정과 대적하고 있는 이요원이나 박예진의 옹골찬 연기를 떠올려보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 아니겠나.

‘마흔 이후’ 연기에 또 다른 기대

‘스타일’에서 김혜수가 고군분투하고 있다면, ‘선덕여왕’의 고현정은 밤하늘의 수많은 별 속에서 샛별처럼 빛을 발하는 경우라 하겠다. 제목이 ‘선덕여왕’인 만큼 본래 주인공이라 할 미래의 선덕여왕 덕만(이요원 분)이며 알천(이승효 분)을 비롯한 잘생긴 화랑들, 그리고 미실이 낳자마자 버린 아들 비담(김남길 분)까지 매력적인 캐릭터가 좀 많아야 말이지.

그럼에도 악역인 미실에게 정이 붙어 훗날 몰락의 길을 걷게 될 때 슬퍼할까 두렵다는 시청자들까지 생겨나고 있으니, 고현정이 얼마나 미실 역을 잘 소화해냈는지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는가. 솔직히 나 역시 자꾸 미실에게 마음이 기우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극 초반에 남동생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나는 비극으로 마음 아파하는 어린 천명공주를 보듬어 안으며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이다’라고 속삭이는 섬뜩한 장면이 있었다.

제정신이라면 미실에게 핍박받는 천명공주가 가여워 울어야 마땅하거늘, 오히려 독설을 뿜어내며 말갛게 웃는 미실에게 매료되고 말았으니 이 무슨 망발인지. 독설이 매력적이기는 박기자도 미실 못지않다. 분명 서늘하고 단호한 어조로 남에게 상처를 주지만, 당하는 상대방의 편이 돼주고 싶기는커녕 나도 모르게 박기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적이 많으니까. 빼어난 연기는 확실히 악역의 나쁜 점조차 이해하고 감싸주고 싶게 만드니 큰 문제다.

이제 ‘선덕여왕’은 또 다른 여성 리더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천명공주의 뒤를 이어 공주가 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신라의 왕’이 될 것을 선언한 덕만이 타이틀에 합당한 리더십을 보여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더불어 ‘스타일’의 좌충우돌 새내기 에디터 이서정도 편집장 박기자를 롤 모델로 삼아 21세기에 합당한 리더로 성장하길 기대해보자. 물론 지금의 이서정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하다 싶지만.



주간동아 2009.09.08 702호 (p60~61)

정석희 방송칼럼니스트 soyo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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