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7

2009.08.04

책임감 있는 엘리트 동문 vs 기득권 구축 패거리 집단

특목고, 인적 네트워크로 새로운 ‘권력’ 카르텔 형성?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09-07-29 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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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임감 있는 엘리트 동문 vs 기득권 구축 패거리 집단
    “대원외고 동문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지난 7월16일 오후 7시 반.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주점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원외고 총동문회 산하 행정분과위원회 주최로 공직에 진출한 동문들의 만남이 마련된 것이다. 40대 초반의 1기부터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14기까지 세대를 넘어 ‘동문’이라는 이름 아래 한자리에 모였다.

    모인 이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기획재정부, 감사원, 교육과학기술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 주요 부처에서 일하는 대원외고 동문이 총출동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명함을 주고받느라 분주했다. 학창시절의 추억에서부터 현재 근무 부처의 업무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동문회장의 간략한 인사가 끝나자 모교의 발전을 기원하는 건배사가 뒤따랐다. 이날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대한민국 1%’ 출신 남다른 자부심

    최초의 외국어고인 대원외고가 1984년 대원외국어학교로 문을 연 지 26년이 지났다. 그간 1만4000여 명에 이르는 대원외고 동문은 법조, 행정, 기업, 언론 등 사회 각 분야에 진출했다. 대원외고 이외의 특목고 출신들도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이들은 무시 못할 막강한 인맥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16쪽 상자기사 참조).



    특목고의 역사가 아직 20년 남짓밖에 안 되다 보니 총동문회조차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곳이 대다수다. 전통 명문고들이 동문들의 사회활동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특목고 동문회는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전공과별 혹은 반별로 모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일외고 이용재 교사는 “예전과 달리 학생과 졸업생들의 개인 성향이 강해지다 보니 총동문회가 잘 운영되지 않는 게 사실”이라며 “사회에 진출한 선배들과 재학생 후배들을 동문회를 통해 연결, 선배들이 후배들의 멘토가 되도록 신경을 많이 쓰는데, 일이 바쁜 탓인지 잘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앞으로 이들 동문회가 중요한 인적 네트워크로 작용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놓았다. 대원외고 총동문회 관계자는 “동문들이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지금은 과도기”라며 “앞으로 10, 20년 뒤에는 사회에 진출한 동문들 간의 단단한 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져 세계와 경쟁하는 인적 네트워크로 기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목고 출신들은 자신이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엘리트라는 믿음을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대원외고 출신인 T-Plus 조영준 부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특정 학교 인맥을 만들어 선배가 끌어주고, 후배가 밀어주는 구악을 되풀이하자는 게 아닙니다. ‘대원외고’라는 학교의 브랜드를 강조한다고 할까요? 사회에 진출한 선후배의 활동을 통해 ‘이 학교 출신은 일도 잘하고 책임감도 강하다’는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만들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특목고 출신들의 진정한 힘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향후 특목고 출신 인맥이 정보 네트워크의 허브로 자리잡으리라는 기대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특목고들이 비평준화시대 명문고교인 경기고, 경복고처럼 견고한 ‘학맥 카르텔’을 형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대내외적으로 변수가 많아 과거처럼 굳건한 학맥을 만들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일단 특목고 출신 스스로가 과거 명문고 출신 엘리트들과는 달리, 단지 동문이라는 이유로 타 고교 출신을 배타적으로 대하고 자기들끼리 뭉치는 패거리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특목고 출신이 인맥을 구축하기에는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원외고 1기 졸업생의 나이가 만 41세. 한창 사회생활의 기반을 닦을 때다. 특목고 출신 졸업생 중 사회생활을 하는 대다수가 30대다. 직장에서 이제 막 자리를 잡아나갈 시기라 동문을 자주 만나고, 막강한 동문회를 구축해나갈 여력이 없다. 더욱이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할 만큼 개성이 강한 그들이 옛 명문고 동문들처럼 잘 뭉칠지도 확신할 수 없다.

    서열·인맥주의 병폐 부추길 우려도

    특목고 출신이 적정 수준을 넘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만큼 요직에 집중되면 역효과가 발생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대일외고와 경찰대를 나온 한 경찰관은 “한국 양궁이 세계무대에서 자기들끼리 금은동을 놓고 경쟁하는 것과 같다. 시간이 좀더 흐르면 특목고 출신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다.

    “앞으로 10년 뒤면 경찰서장 자리를 두고 동문끼리 다퉈야 합니다. 비단 경찰뿐 아니라 대거 합격자를 내는 법조, 행정 등의 공직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텐데, 그런 상황에서 마냥 동문들끼리 좋다고 뭉쳐지지만은 않을 겁니다.”

    특정 학맥에 대한 외부의 견제도 만만치 않다. 기획재정부에 근무하는 한 외고 출신 사무관은 “한 해에도 고교 후배가 몇 명씩 들어온다. 후배가 들어와 반가운 마음에 밥이라도 사고 싶지만, 괜히 구설에 오를까 봐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실제 대원외고 출신 외교통상부 공무원들이 알음알음 동문끼리 모여 식사를 했다가 ‘적발’돼 주의를 받은 일도 있다. 외교부 내 최대 동문의 하나로 성장한 대원외고 출신들을 탐탁지 않게 본 타 고교 출신 직원이 윗선에 이 모임에 대해 보고했다는 후문이다.

    그나마 참가율이 저조한 총동문회마저 제대로 운영되기도 전에 ‘이편, 저편’으로 사분오열되다 보니 과연 총동문회가 특목고 출신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입지를 다질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총동문회장 선출을 둘러싼 잡음이 대표적이다.

    총동문회장에게 당장 이렇다 할 이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미래의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권력욕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된다는 것. A외고 출신의 한 언론인은 동문회의 행태에 실망한 나머지 몇 년 전부터 동문회에 절대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다.

    “동문회는 매우 정치적인 자리입니다. 특히 동문회장 선출을 놓고 벌어지는 파벌 싸움은 역겹기까지 합니다. 결국 무리수를 두게 되는데,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 신입생들을 버스에 대거 실어와 투표장으로 보내는, 이른바 ‘버스떼기’ 같은 추태도 벌어집니다.”

    그동안 특목고 출신과 관련된 뉴스는 ‘좋은 대학을 많이 갔다’ ‘고시에 많이 합격했다’는 데 초점이 맞춰 있었다. 이제는 이들이 30, 40대가 돼 사회 중추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구한 이들이 어떻게 뭉치고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지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송인수 공동대표는 “학연, 지연으로 얽힌 인맥 중심 풍토가 지금껏 한국 사회의 통합력을 약화시켜왔다”며 “특목고 출신들이 좋은 학교와 고시를 휩쓸면서 또다시 서열주의, 인맥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목고 출신들은 “동문끼리 모여 친하게 지내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억울해한다. 하지만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특정 학맥으로 피해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개인들 간의 사교로 치부하긴 어렵다. 특목고 출신 인맥이 ‘책임감 있는 엘리트 집단’으로 성장할지, 아니면 ‘배타적 기득권을 구축하는 패거리 집단’에 머물지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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